( SF 무협 판타지 )독심잠식毒心蠶食
남산의 바람이 멎었다.
불도 꺼졌고,
웃음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비린 냄새.
아주 미세한 독기.
멜키오르가 말없이 물러섰다.
가스파르도 눈을 감았다.
발타자르조차 숨을 낮췄다.
이번은—
간섭하지 않는 시험.
녹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온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독맥毒脈이
심장을 감싸며 조여왔다.
땅이 스르륵 갈라졌다.
연기가 아니라—
안개.
푸른빛.
숨을 들이키는 순간
폐가 얼어붙는 기운.
안개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녹독.
그러나—
눈동자가 전혀 달랐다.
탁하다.
깊다.
썩은 연못처럼.
“왜 늘 조절하려 하지?”
거울 녹독이 말했다.
“독은 쓰는 게 아니야.”
“퍼뜨리는 거야.”
녹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리를 낮췄다.
발끝이 흙을 스쳤다.
무형보無形步.
소리 없이 이동.
거울 녹독이 웃었다.
“이미 늦었어.”
그 순간—
녹독의 팔에
푸른 실핏줄이 솟구쳤다.
내독역행內毒逆行.
심장 박동이 어긋났다.
“독은.”
거울 녹독이 속삭였다.
“넌 늘 두려워했지.”
“통제하지 못할까 봐.”
찰나.
거울 녹독의 손톱이
허공을 긁었다.
보이지 않는 독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만천화우滿天花雨.
그러나 꽃이 아니라—
치명.
녹독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숨을 들이켰다.
주위의 독기를
스스로 삼켰다.
자승자박自繩自縛.
그러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거울 녹독이 멈칫했다.
“미쳤군.”
녹독이 낮게 답했다.
“그래.”
“난 항상
독과 함께 살아.”
순간—
혈맥이 폭발했다.
청색 기운이
피부를 뚫고 솟구쳤다.
독화신공毒化神功.
몸이 무기가 된다.
두 녹독이 동시에 움직였다.
잔상.
침투.
목숨을 스치는 손끝.
한 치 차이.
일초지간一招之間.
거울 녹독이 팔을 꺾어
목을 노렸다.
녹독은 몸을 틀어
상대의 복부에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퍽.
그러나—
피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독이 스며들었다.
거울 녹독이 웃었다.
“그게 네 한계야.”
“넌 죽이지 못해.”
“독은.”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결국 다 삼켜.”
녹독의 시야가 흐려졌다.
몸이 차가워졌다.
독이 역류했다.
심장박동이 느려졌다.
풍전등화風前燈火.
그때—
녹독은 기억했다.
처음 독을 배웠던 날.
스승이 말했던 한마디.
“독은 죽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녹독의 눈이 또렷해졌다.
“넌.”
그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경계를 넘은 나야.”
거울 녹독이 달려들었다.
마지막 일격.
치명.
녹독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손을 붙잡았다.
피부가 타들어갔다.
독이 서로를 삼켰다.
잠식.
융합.
콰앙—!
청색 기운이 폭발했다.
안개가 찢어졌다.
산이 울렸다.
정적.
거울 녹독의 형상이
균열을 일으켰다.
“왜…”
그녀가 속삭였다.
“날 죽이지 않았지?”
녹독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죽이면.”
“또 생겨.”
“난—”
그녀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함께 산다.”
독이
거울을 삼켰다.
그러나—
독은 폭주하지 않았다.
정렬整列.
통제.
심독일체心毒一體.
안개가 사라졌다.
남산의 공기가
맑아졌다.
녹독은 무릎을 꿇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연화가 달려왔다.
“살았어?”
녹독이 미소 지었다.
“죽기엔.”
“아직 독이 아깝지.”
멜키오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완성됐군.”
가스파르가 덧붙였다.
“자멸하지 않는 독.”
밤하늘에
푸른 기운이 잔잔히 퍼졌다.
독심잠식毒心蠶食.
독은
남을 삼키지 않았다.
자신을 삼켰다.
그리고—
남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