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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Nov 07. 2017

느리지만 꾸준히, 나를 알아가는 삶

까탈스러웠던 내가 유연해지기까지


그와 인터뷰를 위해 찾은 곳은 세련된 분위기로 꾸며진 어느 북카페였다.

간단한 간식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카페의 메뉴를 보니 '하루키 샌드위치'가 있었다. 알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한 장면에 묘사된 샌드위치를 재현한, 북카페 다운 귀엽고 센스 있는 메뉴였다. 나는 하루키 샌드위치를 골랐고, 그는 사과당근주스를 시켰다. "혹시 당근 맛이 심하게 나나요?"하는 질문과 함께.


하루키 샌드위치는 식빵과 마요네즈, 그리고.

얇게 저민 오이가 들어가는 샌드위치였다. 

실제 소설 속 묘사를 그대로 재현한, 보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비주얼과 담백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사과당근주스를 따르는 그의 표정을 살핀 후 "오이 냄새 많이 나나요? 괜찮죠?"라고 물었다.


그렇다. 

그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의 이야기는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싫어할 권리



-먼저 인터뷰이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하는 인터뷰라니 죄송해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맛은 정말 괜찮아요.  

이런 메뉴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시켜먹는 사람이...(웃음). 그래도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오이를 싫어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먹는 것까지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오이향도 자주 경험하면서 익숙해졌으니 괜찮아요.


-요즘 연재하시는 '오늘의 싫음'시리즈에 글 한편 올라오겠네요(웃음). 이야기 나온 김에 '오늘의 싫음'에 대해서 말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연재하기 시작했고, 어떤 의미로 글을 쓰고 계신지 궁금해요. 

최근에 친구들에게 제가 싫어하는 것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농담 식으로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었죠. 알고 보니 저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사람이었어요. 물론 표현을 잘 하지는 않지만요. 그래서 '제대로 한 번 들여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기호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타인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원래 좋아하는 게 같은 사람보다도 싫어하는 게 같은 사람이랑 더 빨리 친해진다는 말도 있는데, 서로 싫어하는 것을 알면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또 싫은 것들을 들여다보겠다는 것도 재미있는 발상인 것 같아요.

어떤 프로그램에서 들은 말인데요. 상대방이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말하지 않으면, 그거에 대해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있다고 해요. 싫어하는 것을 안 하면 좋아하는 줄 안다는 거죠. 그런데 싫어하는 것을 안 했다면 세 가지 경우가 있잖아요.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아무 생각 없을 수도. +1이 좋아함이고 -1이 싫어함이면 0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아무 생각 없거나 일 수 있는데. 겉으로 0인 사람은 대체로 +1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면 될까요? 싫어하는 것을 안 하면 좋아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죠.


-흥미롭네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싫어하는 것들에 집중하면 나나 타인을 대할 때 조금 더 빡빡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또,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할 때가 많기도 하고요. 

개인의 경우 본인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죠. 하지만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싫어하는 게 뭔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싫은 것을 굳이 찾아내서 서로를 미워하자가 아니라, 서로 싫어하는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자는 거예요. 그런 태도는 오히려 '배려'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사회는 개인이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인상 깊어요. '사회'의 자리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들어갈 수 있겠어요. 다수, 단체, 기업, 기득권 등등이요. 

맞아요. 개인적으로 한국사회에서는 남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는데, 싫어하는 것을 모른척하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느껴요. 정말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이죠. 여전히 남아 있는 술 강요 문화라던가. 개인의 기호는 다수에 의해 무시되는 그런 관행적인 분위기들이 깨지면 좋겠어요.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도 여자아이가 남자아이가 괴롭힌다며 선생님께 호소하자,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와요. 약자에게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해하라는 강압적 매뉴얼을 정해 주는 거잖아요. 이런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생각 아닐까요? 


-그렇네요. 개개인이 싫어할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안 하고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싫음'이라는 건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것도 저를 이루는 중요한 특징이고요. 저는 무언가를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싫어할 수도 있죠. '나를 파괴할 권리'처럼 '무언가를 싫어할 권리'도 있다고 봐요.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라고 누군가 강요해서는 안되죠. 또 주의해야 할 것이 '무조건 다해봐라, 다 경험해봐야 한다'는 생각인데, 이거는 좀 아닌 것 같아요.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다 다른데 어떻게 모든 경험들을 다 해볼 수 있겠어요. 개성에 따라 굳이 안 해도 될 일도 있을 텐데요.


이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해요. 싫은 것을 생각해보고 이게 왜 싫은지부터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인지까지 잘 생각해보아야 하고요. 그러면 절대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것도 있고, 생각해보니 이건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것들이 구별되겠죠. 싫은 것들에 대해 선별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 내가 살면서 피해야 할 것과 참을 것을 구별하는 법을 알아가고자 해요.


-싫어하는 것을 안 해도 될 권리는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한 건데. 그 권리를 자꾸만 잊게 만드는,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사회 분위기가 일조하는 것 같아요. 정상의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에 맞지 않고 튀면 안 되는 그런 분위기가 아직 있는 편이죠. 

최근에 페이스북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는 페이지가 인기를 끌었잖아요. 저도 바로 좋아요를 누르고, 아직도 재밌게 잘 지켜보고 있어요. 그 페이지에선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오이를 싫어한다고 하면 들어야 했던 말이나 사소한 불편을 함께 이야기해요. 


그 페이지에서 본 글인데 한 냉면집을 굉장히 칭찬하면서, 냉면이 나왔는데 오이가 없이 나오는 것이 기본이었고 '오이 추가'가 따로 있더라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오이를 빼 달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 당연했는데 그 냉면집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되는 거죠. 보통 냉면의 디폴트는 오이가 들어가 있는 건데, 상황이 바뀌면 부탁할 것도 바뀌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과 시선을 조금 다르게 보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특이한 건지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맞아요. 당연하게 여겨왔던 '디폴트들'이 누구에게 맞춘 기준이며 누가 배제되어 있는가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해지는 것들이 많죠.

개개인의 특성이나 성향을 무시하거나 지워버리려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분위기가 당연해지면 좋겠어요. 개개인의 호불호 맞춤 시대가 된다면,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는 '부품이 된듯한 기분'을 덜 느끼게 되지 않을까도 싶고요. 



진지한 내가 좋아



-'싫어할 권리'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회 문제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네요. 다시 돌아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제 인터뷰 공통 질문 중 하나인데, 당신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키워드가 있을까요? 

'진지'인 것 같아요. 그 이유는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요. 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다른 이의 시각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시선에는 왜곡이 없는 편인 것 같아요. 동물원에 있는 동물에 대한 설명처럼 말이에요. 


-그런가요. 그래도 타인들의 평가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되시나 봐요. 진지하다는 건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는 특징일 수 있죠. 

'진지충이다, 노잼이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는데... 지금도 좀 진지하지 않나요?(웃음) 저는 무슨 일이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일의 인과를 처음부터 설명하는 습관이 있어요. 구구절절 설명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설명충이 되어 있던데요.(웃음) 


또 그런 성격이 글 쓸 때도 반영되어서 어떤 글을 써도 초고를 쓴 후에 지워버릴 문장이 굉장히 많아요. 이런 성향의 단점일 텐데, 번뜩이는 상상을 잘 하지 못하는 편 같아요. 글을 쓰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임팩트 있는 부분은 쓰기 어려워요. 평범하고 안전선 안에 있는 느낌이 들어요. 고쳐보려고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네요. 하지만 장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주변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평가를 자주 듣거든요. 진지한 편이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 저를 믿어 주는 것이 느껴져요. 


-진정성 있다는 피드백은 매우 기분 좋은 피드백일 것 같아요. 그런데 사전 인터뷰에서 솔직함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진정성과 솔직함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정성이 있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그 이유로 듣는 것들은 '변함없음'이라는 특징에 포함되는 것들이에요. 예를 들면 목소리 자체가 톤이 낮고 천천히 말해서 믿음이 간다는 것 등인데요. 제 성격 자체가 감정 변화의 폭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비치게 되는 것 같고. 그 특징은 진정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약간 솔직함은 부족한 느낌인데요. '솔직하다'는 피드백을 받으려면 제 감정 자체를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자라온 환경이나 해온 공부 등 다양한 영향이 있었겠지만 감정 기복 자체가 잘 없는 편인 데다가 표현하기 어려워하거든요. 차이를 생각해보면 진정성은 타인을 향해 있는 건데 솔직함은 나의 감정을 향해 있는 것 같아요.


-제 생각으로는 솔직함과 무례함을 잘 구별해야 할 것 같아요. 감정을 표현하는 게 꼭 무례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 적절한 선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죠. 무조건 참거나 말하지 않는 것이 쌓이면 나중에는 더 관계를 풀기 어려워질 수 있으니. 동석 씨가 말하는 진정성이라는 건 어찌 보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네. 저도 그래서 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지려고 하고 있어요.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고,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많이 배워요.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 나와는 다른 성격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배우는 거죠. 나와는 다른 삶과 다른 행동 양식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면서 저의 행동이나 사고도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소설과 타이밍



-그러고 보면 동석 씨는 이공계 전공을 하시면서 국문과 소설 창작 학회 활동도 하셨고, 꾸준히 글을 쓰시네요. 어떤 계기로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20대 초반에 아팠던 경험이 있어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에 정말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 하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 하는 고민까지. 사람이 우울해지면 더 내면에 침잠하고 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이때가 그런데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한 시기와도 겹쳐요. 


이전까지는 관심 있는 과학 도서를 읽는 것 정도였는데, 친구가 당시에 김영하 작가의 <퀴즈쇼>를 선물해줬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자연스럽게 다른 소설들을 추천받기 시작했어요. 방 안에만 있어야 하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제약되어 있었기에 책 읽기에 최적화된 시간들이었죠.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끼시다가 직접 써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거예요?

학교가 문이과 캠퍼스가 나뉘어 있어 교류가 쉽지 않은데, 집이 서울에 있어 인문 캠퍼스를 들락날락 거리는 편이었어요. 그러다 소설에 한창 빠졌을 무렵 국문과에 소설 창작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수업을 신청하고 보니 매 학기 열리는 수업이 아니더라고요. 이것도 타이밍이 잘 맞았던 거죠. 소설 창작 수업을 듣게 되면서 이를 통해 학회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냥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고, 혼자 습작하던 것들을 넘어서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학회에 들어오고 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니 마음이 편했어요. 사실 그전까지는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일정 선 이상 친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비슷한 취향을 가졌음에도 다양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지내며 여러 생각과 시각을 알게 되었죠. 저는 그전까지는 아버지께서 비유하시길 '자'같은 사람이었거든요.


-도구 '자' 말씀이신 거죠? 어떤 의미인가요?

학회에 들어오기 전에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계산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말씀을 빌리자면 자를 대고 안 맞으면 보지도 않는 사람이었어요. '동석이 너는 마음속에 자가 많은 것 같다. 기준이나 생각과 안 맞으면 바로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 자를 유연하게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문학이에요.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상황들이 늘어났고, 학회 친구들을 만나며 다양한 가치관을 접했죠.


하지만 저는 자를 아예 없앨 수는 없다고 봐요. 자는 나의 기준이나 생각을 표상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예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신 좀 유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생각한 건 '줄자'예요. 줄자는 유연해서 어떤 물건이어도 다 잴 수 있어요. 30센티 자로는 구의 지름을 잴 수 없지만, 줄자로는 되잖아요. 


과거에는 '플라스틱 자'였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고, 형태도 구부릴 수 있는 '줄자'가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겠죠. 목표는 그 줄자의 길이를 늘이는 것이에요. 줄자가 될 수 있도록 유연한 시각을 기르는 연습, 즉 스트레칭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 스트레칭의 일환 중 하나가 '오늘의 싫음'연재겠네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연습하고 고민해야 할 생각인 것 같아요. 이번에는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일상적인 고민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운 좋게도 원하는 직종의 원하는 회사에 들어왔어요. 연수와 기술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아직 전문가가 되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 몇 년 간 다큐나 사회를 보면서 에너지 빈부격차를 해결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거든요. 막상 회사에 들어오니 그 일을 해내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대한 꿈이지만, 그래도 회사원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나갈지 생각하고 있어요.


또 일상적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회사는 지금까지 지냈던 생활권과는 다른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선택하면 됐었는데, 회사에서는 부서 배치를 받다 보니 싫든 좋든 랜덤으로 사람들과 묶이니까요. 일정기간 이상은 그곳에서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또 어울림을 토대로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단체에 일원이 되면서 만일 기존의 잘못된 시스템을 부당한 경우가 있을 때, 말하며 고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도요.


-마지막으로 삶을 살아가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임원 면접 때 받았던 질문이네요. 그때는 성실과 도덕성이라 답했었어요. 그런데 도덕성은 타인에게서 주입된 삶의 태도 같기도 해요.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걸 매우 싫어하셔서 어렸을 때 거짓말을 하면 크게 혼나곤 했어요. 그때 학습된 게 지금 틀로 잡혀서 저를 구속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글을 쓸 때 다른 이들이 저에게 ‘스스로 억압하는 게 많아 보인다’고 말해주기도 해요. 도덕성을 강압적으로 배워서 그런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탈 없이 그냥 무난하게만 지내온 것 같아요. 다른 이들보다 자유롭게 지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서 삶이 조금은 재미가 없어진 것 같아요. 


하지만 성실 같은 경우는 제가 그나마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인 것 같아요. 무언가를 시작하면 그래도 어떤 결과물이 나올 때까진 하는 편이거든요. 소설 쓰기가 그랬고, 독일어도 그랬고. 독일어를 배우면서 지은 좌우명도 langsam aber fleiβig(느리지만 꾸준하게)이에요. 또, 제 성격상 설정하고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거든요.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단계별로 밟아 나가는 것이 '성실'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느리고 꾸준한 태도들이 쌓여서 저를 이룬다고 생각하고요. 




'싫음'이라는 건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것도 저를 이루는 중요한 특징이고요. 
저는 무언가를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싫어할 수도 있죠.
 '나를 파괴할 권리'처럼 '무언가를 싫어할 권리'도 있다고 봐요. 






인터뷰이 : 오동석

브런치 : https://brunch.co.kr/@ods115 

오늘의 싫음 시리즈 : https://brunch.co.kr/magazine/2daysh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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