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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erzdx Oct 30. 2020

치유의 바람 (2)

이사일기(2010-2020) - 4. 불광동 (2012.02)

   제주도에 가야만 했다. 내가 처한 문제들을 해결해줄 치유의 바람이 필요했다. 그 바람은 제주에서만 부는 걸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치유되어 돌아왔다. 이가 흔들리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고


   육지의 어떤 빚쟁이가 마라도까지 도망쳐온 뒤 ‘여기까지 오면 빚을 갚아도 좋고 마라도 좋다’고 말했다는 농담. 알고 있다면 왠지 옛날사람이라는 말을 들을법한 이야기. 나는 예전에 어머니께 들어보았다. 가파도와 마라도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니 바로 “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고~” 하셨던 기억이.


   그렇게만 알고 있던 가파도. 누군가 꼭 청보리밭을 걸어보라 일러주었던 가파도. 드디어 간다. 인터넷 사진을 본 게 전부이지만 나의 복잡한 마음과 상태를 어루만져주기에는 최적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슬포항에서 가파도 가는 배 시각을 알아두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나는 배 타는 것에 약간의 공포감을 갖고 있지만 15분이면 도착한다는 정보에 안심하고 배에 올랐다. 갑판에 나가서 밖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자리에 얌전하게 앉아서 15분을 보냈다. 약속대로 15분 여 만에 배는 가파도에 도착했다!


사진 출처 : joyfultour.tistory.com/1470


   예전에 ‘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고’를 처음 들었을 때는 ‘가파도’를 경사가 가파르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파도에 오니, ‘와~’ 지평선과 수평선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이해될 정도로 위로 솟은 것이 하나도 없다. 배 선착장에서 보리밭으로 가는 길목 정도에 아주 약간의 오르막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로 평평한 땅.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좁지만 이런 풍경을 맞이한다는 것이 참 특별한 일이었다. 두 번 정도 섬 전체를 돌아보고, 점심으로 보말칼국수를 사먹었다. 사람들이 사 먹어보라는 그것, 아주 맛있는 곳을 가지 않는 이상 제주도의 음식은 다 비슷한 느낌.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파도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시간을 좀 더 가진 뒤 육지로 아니 본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오늘의 숙소인 쫄깃센타 근처의 협재와 애월에 머무르려 북쪽으로.


   모슬포항에서 조금 걷다가 버스를 타고 협재로 이동했다. 쫄깃센타에 짐을 풀고 나와서 이리저리 걸었다. 듣던대로 참 멋진 바다. 노래가 몇 곡은 만들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기타가 없어 아쉬웠다. 하,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멜로디여. 

   협재 해녀의집에서 해물라면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왔다. 핫한 게스트하우스 답게 3월 비수기인데도 사람이 정말 많았다. 모든 방이 거의 다 꽉 찬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자연스럽게 모여서 이야기하며 어울리기도 했다.


   나는 나서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그냥 소리 없이 한 쪽에서 페이퍼 잡지나 꺼내서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다가, 주방 한 번 구경하다가, 괜히 밖에 한 번 나가서 동네를 좀 걷다가, 말 붙여볼 사람 없을까 한 번 스윽 쳐다보다가, 그냥 잤다.


   몸이 피곤해 코를 골 것을 걱정했는데 누군가 선수를 쳤다. 그 리듬에 맞춰 잠에 들지 못한 나는 거실로 나와 페이퍼 2005년 12월호를 꺼내 읽다가, 방으로 들어와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구원승 보다는 세이브


   꿈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구원승보다 세이브가 더 어렵고 중요한 이유에 대해 역설하고 있었다. 내가 제주도 여행을 온 이유, 강정마을에서 목격한 장면들, 그리고 모두 언젠가는 어딘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 삶에서도 구원승보다는 세이브를 올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구의 마음 하나 다치지 않고 온전히 지켜질 수 있는 상태가 필요하다.



   여행이 끝나가려 하니 여행하는 동안 지속되던 마음상태도 끝나가는 것을 느낀다. 모든 여정을 끝내고 제주공항에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각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막 제주도로 들어오는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발을 들여놓은 저 사람이 그다지 부럽지 않다.


   나는 이번 여행의 목표를 모두 달성했기 때문에. 그 후 1년 넘는 시간동안 이 흔들리는 꿈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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