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
저는 경상도 집안의 장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일단 말씀드리자면 장손, 장남이고 싶었던 적이 없고, 태어나자마자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지정된 것이죠. 그렇다고 장남으로서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거부한 적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 삶은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아래위로 누나와 동생이 있는데 저에 대한 핍박이 가장 심했습니다. 물론 부모님에 의한 핍박이었죠.
감정 배설 창구 역할과 분풀이용 샌드백 취급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나올 때까지 지속됐던 거죠.
그때 우리 집 가훈이 근면성실하자였던 걸로 아는데, 부모님은 정말 근면성실하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남성성에 저항하여 여성인권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그에 대한 반발심리로 얼떨결에 제가 희생양이 된 것도 아니에요.
어머니의 주도로 자연스레 가족 전체로부터 따돌려졌는데 그런 어머니는 오히려 가부장제에 성실히 부역하는 사람이었어요.
물론 저에게 부여된 장남, 장손이라는 상징성이 어머니에게 영향을 아예 주진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어머니도 가부장제 질서에 불만은 있었을 거라고 봐요.
그렇다고 제가 패륜을 저지르거나 큰 사고를 친 적은 없는데 말이죠.
아무튼 어머니가 가부장제 질서를 큰 틀에서는 수용하지만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아버지의 행실까지 수용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 스타일로 권위적이고 매사에도 가족에게 일방적인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는 가족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귀찮아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가부장제를 이용해 오로지 가장으로서의 권리만 취하려 했죠.
그는 자유롭고 싶어 했습니다.
가족을 떼 놓고 놀러 다닐 수 있는 자유, 외도를 할 수 있는 자유, 노름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찾아다니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들어와 빌붙었어요.
빚쟁이들까지 몰고 들어왔죠.
그런데 저희 집안에는 이런 가부장의 방탕을 견제할 수단이 없었어요.
이미 집안 분위기가 아버지의 기분을 중심으로 돌아가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한 가정 내의 힘의 중심이었고 우리 가족은 온전히 그 힘에 지배받는 상황이었죠.
당시 경상도 사회 자체가 남성주의 문화를 하나의 전통으로서 용인하고 있었기에 아버지는 그 분위기에 손쉽게 편승했던 거죠.
어쩌면 가부장제라는 유사 전체주의적 기류가 집안을 장악하고 있던 거죠.
가정을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는 그 당시 극에 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의 권위에 억눌려 어머니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마 제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봤던 것 같아요.
아버지 또한 자신이 무시하고 하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늘 제 얼굴에서 찾았던 것 같고요.
두 사람은 서로를 닮아 있는 제 얼굴을 싫어했습니다.
그게 제 불행의 시작이었죠.
자연스레 둘 사이가 안 좋아지면 제가 대신 폭언과 손찌검을 당했고, 그게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어요.
특히 저에 대한 어머니의 폭력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했습니다.
한번 맞기 시작하면 창과 방문이 굳게 닫혀진 방으로 끌려 들어가 피를 볼 때까지, 분이 풀릴 때까지 짓밟혔으니까요.
수시로 온몸에 피멍이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는 펄펄 끓인 물에서 뺀 수건을 제 멍 위에 올리고 주무른 적이 많았어요.
제가 아파할까 봐 통증을 줄이기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들킬까 봐 멍을 지우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었던 거죠.
아무튼 부모님과 저는 일반적인 자식, 부모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흔히 가족들 사이에 오가는 정겨운 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명령과 지시, 그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저를 향한 무시, 비아냥, 깎아내리기, 트집 잡아 후려치기 그게 우리 사이의 유일한 소통방식이었어요.
집안 분위기는 늘 냉랭했고 이러한 삭막한 가정환경이 제 심리 전반에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무 살 때까지는 정말로 행복하지 않았어요.
부모님과 동등한 인간관계로 마주하지 못했으니까요.
군대로 치자면 부모님이 피아 구분을 못하고 어쩌면 같은 아군인데도 불구하고 저를 궤멸해야 할 적으로 오인한 셈이니까요.
가부장제의 가장 큰 수혜자(?) 일 수도 있는 제가 어떻게 보면 가부장제로 인해 가장 큰 피해자가 된 삶입니다.
그 당시에 행복한 삶이 어떤 건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불행이 뭔지도 몰랐던 제 자신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