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순간
70대쯤 되어 보이는 노신사와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교보문고에서 책 한 권을 들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라 아이들 책이라도 사줄까 들렸던 나는 아이들 동선을 눈으로 따라가느라 이래저래 바빴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 어색하지만 어딘가 닮은 노신사와 남자를 보게 되었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이거나 아버지와 아들쯤 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장하다, 노신사가 남자에게 짧지만 굵게 말했다. 남자는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버지와 아들 관계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문제는 나였다. 그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 선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그것은 부러움이었다. 유독 인정 욕구가 강한 나는, 어릴 때부터 칭찬 듣기를 좋아했다. 칭찬을 들으면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워하지만 사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특히 부모에게 받는 칭찬은 남다르다. 나는 늘 부모님의 칭찬에 메말랐다. 부모님은 칭찬을 많이 해줬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인정욕구가 강한 나는 늘 부족했다. 더 많이, 더 크게 칭찬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더 많이 더 크게 칭찬해줄 여력이 없었고 그 분들 또한 그렇게 자라오지 못한 듯 했다. 마흔이 넘어서야 그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것은 칭찬과 연결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칭찬 받을 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 부모 중에 자녀에게 칭찬을 많이 하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아는 세계관에서만 그렇다. 분명 칭찬 많이 받고 자란 자녀들도 많을 테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일이다.
장하다는 말을 한 70대 노신사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칭찬을 많이 하며 키워 온 사람일까. 아니면 나이를 많이 먹어 아들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더 관대해지고 유연해진 것일까. 어찌되었든, 장하다는 칭찬을 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자존감이 한 단계 더 올라갔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칭찬을 들을 때, 자신이 행복하고 좋은 상태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의 이유로까지 느껴진다.
나에게도 아들이 있다. 16살인 아들은 제 방에서 무엇인가를 하다가 종종 안방으로 찾아온다. 그때마다 늘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나는, 다소 예민하게 반응한다. 엄마인 내게 아들이 할 말 있는 표정으로 오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로 배가 고프다거나 공부가 잘 안 된다는 말이 대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냥요'라고 말한다. 나는 아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안다.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말 못할 답답함과 어려움이 있다는 뜻일 게다. 혹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마감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타이밍, 인간관계에 타이밍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타이밍이 잘 맞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삶이 주는 과제를 해내느라 바쁜 부모는 대화가 필요한 자녀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여력이 없다. 그럼 자녀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오해를 한다. 내가 부모에게 칭찬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나는 아들과 대화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먼 훗날 엄마와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다고 기억할 수도 있다. 프리랜서라 대부분을 집에서 일해 온 나였는데도 말이다. 나를 통해 인간은 기억을 왜곡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문득 겁이 났다. 그 날, 수학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온 아들을 보며 특유의 장난스런 말투로 한 마디 던졌다. 장하다, 우리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