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충분해요.
일하는 가게 중앙에 놓인 탁자엔 자율적으로 떠다 마시는 물병과 티슈가 놓여 있었다. 먹고 마시고 하는 손님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다 먹은 자리를 치우러 갈 때면 늘 쓰지 않은 물티슈나 낭비된 휴지가 있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멀쩡한 것들은 앞치마 주머니에 챙겨두었다. 탁자에는 늘 여분이 충분했지만 손님들은 늘 군침을 흘리듯 놓인 것을 바라보다 듬뿍듬뿍 집어갔다. 어디에 쓰길래 저렇게 많이 필요할까. 도로 채워 놓을 비품이 박스에서 나올 때 그것들은 딱 붙어있다가도 잘게 쪼개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들어갔다. 때로는 가방이나 주머니로 챙겨지기도 하면 그들은 먼 여행을 떠나고 마는 것이다.
하루는 가족이 왔다. 그들은 종종 오는 단골로 안면이 있어 다정하게 대하려 신경을 썼는데, 마침 아이가 티슈를 찾았다. 부모가 아이에게 작은 심부름을 시킨 모양이었다. 아이는 타인을 상대하는 일에 썩 능숙하지 못한 수줍음이 있었다. 위치를 알려주니 곧장 가서는 아주 정성스레 개수를 헤아렸다. 그리곤 정확히 네 장을 집었다. 그 모습이 기특하여 말했다.
괜찮아, 더 가져가도 돼.
그러자 아이가 미간에 주름을 만드는 게 아닌가. 우리 가족은 넷이라 네 장이면 된다고. 더 가져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니 그것대로 할 말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것이 아님에도 나는 내심 씀씀이를 비쳐 으스대고 싶었나 보다. 생색은 남의 것으로 하는 일이라던데, 무심결에 뱉은 허락의 말은 꼴이 사나웠다. 네 장이면 가족 모두가 입을 닦기에 충분하며, 테이블을 청소할 것도 아닌 데다 부족하면 더 가지러 오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이나 ‘그렇지만’으로 시작하는 억지를 부릴 수 없을 만큼 아이의 이유는 합당했다. 그래서 더 비빌 말이 없다.
사실 필요한 개수보다 훨씬 많이 가져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쓸지도 몰라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희박한 확률에 대한 우려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채 쓰임의 차례를 놓친 새 것들을 도로 챙기며 언짢아하던 내가 왜 아이의 우려를 부추기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지를 빼고 작동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을까봐 헉, 소리를 내었다.
눈동자로만 쓸어보아도 아기의 피부는 빈 틈 없이 보드라웠다. 그런 이마를 찌푸리게 만드는 어른이라니. 마음이 붉어져서 얼굴마저 그런가 하고 거울을 살펴야 했다. 그 짧은 오후가 나한텐 한가득이었다. 그다음은 엉망이었다. 가르침이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음이 쏠려 있고 마는 것이다. 저 아이에게 나는 얼마나 이상한 어른이었을지, 어쩌면 삶은 생각의 흐름이 '이상한 것'에서 '당연한 것'으로 닳아 흐르는 것이라 말해도 좋겠다. 비록 삶에 대해 이미 다양하고 보다 훌륭한 정의가 내려져 있을지라도. 아이는 응답 없는 나를 두고 목적을 마친 용사처럼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러나 목적을 잃은 사람의 모습을 대면한 건 처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어릴 적부터 바라건대 난 잠깐 머물던 영광을 쓸어 모아 왕년이란 말을 뱉으며 직성 풀리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나이를 이용해 억지를 부리거나, 이기려 들거나 하는 류의. 그런 사람은 내 아버지를 비롯해서 잊힐만하면 내 세상에 등장하는 히어로였다. 스스로 나쁜 점을 드러내고 반복 학습하여 가르쳐주니 히어로가 아니고 또 뭔가.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티슈를 집히는 대로 들지 않게 연습하고 있다. 조심스레 나누어 쓸 만큼을 생각해보곤 하는 잠깐의 머뭇거림이 행동 완료를 위한 몇 초의 단축보다 소중하게 됐다.
그러므로 티슈를 한 움큼씩 집어가는 어른이 아이에게 삶을 모른다고, 너의 신념은 종종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충고를 던지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비참한 패배 선언이 아닌가. ‘아, 나는 이미 세상에 지고 말았단다.' 그런 구부정한 마음은 몹쓸 것이기에 종종 벌어지는 이런 일에 가까스로 매달려 정신을 닦는 것에 애쓴다. 그러다 닦는 천마저 낡고 헐어 더러워지면 더없이 쓸쓸해지고 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