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

자기가 부끄러운 줄은 알까?

by 박하


사람은 나약하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불을 지펴야 살 수 있다. 할머니는 뜨겁다 뜨겁다 하면서 나를 안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보였다. 세상에 추위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이른 아침 송골매와 등교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교무실에서 이면지와 어제자 신문을 들고오는 것. 민병태의 책상 서랍에 있는 담뱃갑 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담배를 같이 빌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라이터를 빌리는 일은 들키지 않았다. 송골매는 직접 불을 붙이는 걸 질리지도 않고 신기해했기 때문에 난 직접 해보라며 가르치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위험하다고 불 붙이는걸 안 시키거든.

불의 위험에 대해 말하려면 오히려 내가 더 경계당해야 했겠지만, 할머니는 불을 때는 것에 대해 딱히 큰 제재가 따르진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훈육이 더 많았다.

-어디 가 소박맞을 짓만 하지 말어라.

할머니는 놀러나가는 내게 항상 경고했다. 난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그저 내 세상이 진짜 세상 중 빈약하게 알고 있는 일부분일 거라고. 소박이 올바른 표현은 아니었어도 그런 걸 지적하며 내 지식을 할머니 앞에 뽐내려는 심보가 있진 않았다. 그냥 박대받지 말아야겠거니, 유연하게 이해하며 ‘네!’ 대답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여튼 누군가에게 당하는 것만이 삶의 바탕이라면 서글퍼져서 무시당하지 않기로 하는 게 일종의 목표가 됐다. 그럼 나는 불을 능숙하게 피울 줄 아는 하나의 기술을 가진 셈이야. 송골매가 날 우러러 보는 일도 하나쯤 있으니 좋았다.


촌지 때문에 송골매가 얻어터진 이후로는 매번 훔치지도 않던 라이터를 훔쳤다. 소심한 복수였다. 민병태는 자기가 어디 놓고 왔겠거니 생각하다, 우리가 여덟개 쯤 훔쳐냈을 때 담배를 서랍에 두길 관뒀다. 자기가 교실에 오기 전까지 항상 연통에 불이 붙어 있었는데 왜 우리가 어떻게 쉬이 불을 피웠을거라고 생각한걸까. 당연한 것은 의심하지 않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거다. 우스운 인간.

우리 집에 다녀갔으니 알았겠지만 민병태는 나에게서 흰 봉투가 올 걸 기대하진 않은 듯 했다. 대신 연통에 채워넣을 갈탄을 가져오는 일을 꼭 내게만 시켰다. 그건 할머니에게 ‘소박맞고’ 빈 손으로 돌아간 민병태의 복수였다. 철 양동이를 들고 학교 뒤쪽 갈탄창고로 가면 소사는 삽으로 푹푹 떠서 양동이를 채워줬다. 고학년 형들은 번쩍번쩍 들었는데 나는 자꾸만 바지에 양동이가 쓸려서 밝은 옷도 새카맣게 됐다. 그래서 까만 바지만 입을 수 밖에 없었다.

하여간 우린 쓰레기통에서 탈만한 것들도 골라 모아 연통에 함께 넣고 불을 붙였다. 전날 덜 쪼개져서 타지 않은 갈탄이 있으면 불이 오래갔다. 모든 학생이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갈탄을 받으러 창고에 갔다. 내가 들지 못하지만 고학년 형들이 쉽사리 들만큼 퍼 주는 하루 분량의 갈탄을 받기 위해서.

매 수업시간마다 책상을 번갈아가며 옮겼는데 공평하게 온기를 쬐려고 그랬다. 그리고 해당 수업시간마다 불에 가장 가까운 학생이 중간중간 불을 살폈다. 이것도 요령이 있는 일이라, 한 번에 너무 빨리 때면 마지막 수업에 떨어야하고 아슬아슬하게 맞춰 온기를 유지해야만 하는 고도의 작업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었다.

소사가 퍼 주는 갈탄은 너끈히 두 삽이면 양동이가 찼다. 나는 거대한 창고에 가득 든 새카만 돌덩이들을 바라봤다. 이 창고만 있으면 할머니는 뜨겁다 뜨겁다 하면서도 나를 안고 자기를 멈출 수 있을까. 내게 온기를 뺏는 걸 멈출까, 뜨겁다 뜨겁다 하는 잠꼬대를 먼저 멈출까. 집에 온기를 만들면.

모자란 갈탄을 가져오는 건 쉬는 시간에 해야하는 일이었다. 중구난방으로 다녀올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민병태는 연통에 땔 갈탄이 떨어지면 ‘무기, 다녀오자.’ 짧게 한 마디 한 뒤 책을 계속 읽었다. 난 모르는 척 했지만 교실에서 민병태의 의중을 모르는 아이들은 없었을거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라.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난 합당한 명분을 지닌 상태로 수업을 벗어나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수업시간엔 갈탄 창고가 잠겨있었고 그럼 난 유유자적 소사를 찾아다녔다. 소사는 숨바꼭질을 하듯 어디에나 있었다. 놀이터, 운동장, 화단, 식당, 자재창고, 화장실까지. 매번 들고 있는 도구가 달라서 재미있었다. 소사를 찾아내어 ‘선생님이 갈탄 더 받아오래요.’말하면 무얼 하고 있었던 간에 하던 일을 멈추고 함께 창고까지 갔다.

소사가 문득, 송골매는 이제 괜찮느냐고 물었다. 나는 재잘재잘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잘도 이야기 했다. 이상하게 소사는 비밀을 말하고 다닐 것 같지가 않다는 믿음이 있었다. 가정방문에 대한 일, 돌봐주겠다는 약속, 할머니의 대답. 그리고 송골매가 가져온 돈을 일부 빼돌린 이야기까지 전부 했다. 말하고 나서 아뿔싸, 이렇게까지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는데 싶었지만 그것도 금방 잊었다.

-그래서, 만 원이 생겼어요. 큰 돈이에요. 할머니한테 줄까도 생각했는데 어디서 났냐고 혼날 것 같기도 해서…. 다른 애들은 선생님한테 돈을 다 낸 것 같은데 제 이름으로 내 볼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딱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갈탄을 받으러 가라는 게 제가 돈을 내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요.

목적이 뚜렷한 말투였다. 소사는 가만히 내 변명을 들어줬다. 여지껏 송골매와 일으킨 사건사고를 떠올리면 소사만큼은 이 학교에서 든든한 아군이었다. 장난을 치다 잘못을 벌여도 선생님한테 우리의 일을 이르는 일이 없었다. 그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고 하며 뚝딱 수리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소사를 믿었기 때문에 일련의 사건을 고백했다기보다는, 내가 그동안 저지른 확실한 잘못 이외에 생긴 이 사건이 잘못인지 아닌지 말해줄 어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적어도 내게 그럴만한 어른이 남아있진 않았기에 송골매와 꾸린 비밀이 떳떳할 수 있는 일인가만 듣고 싶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가 친 잘못들이 잘못이라는 걸 알았어도 유야무야 넘어가길 빌곤 했는데 돈에 관해서만큼은 사람들의 대우가 확연히 달라보였다. 그놈의 돈이 뭔지, 속에서 마구잡이로 들끓도록 괴롭히는건지.

민병태에게만큼은 통쾌한 복수인데 그 과정에서 송골매가 얻어맞았고 송골매 어머니는 3만원을 덜 보낸 셈이며 나는 결과로 만 원을 얻었으니까. 이건 이익인지 아닌지. 도리에 맞는 일이었는지 아닌지. 온전히 나의 힘만으로 받은만큼 돌려줄 수 있었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거다. 근데 자꾸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잘했다.’, ‘네가 옳다.’ 같은 확답을 바랬던 것 같다. 아직 돈은 그대로 있고 한 푼도 쓰지 않았으니까 언제든 되돌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소사가 돈을 돌려주고 오라면, 나는 기꺼이 돌려줄거다. 민병태에게만 빼고. 이건 그에게 갈 돈이 아니다.

-원래 그 돈이 가야 할 자리가 어디라고 생각하는거냐?

-선생님한테는 아닌 것 같아요.

-맞다. 선생님이 받을 돈이 아니야. 받아낸 돈이지.

소사의 말은 말장난 같은 구석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생각해봐라.

-생각이 너무 많아서 결정하지 못할 거 같아요.

소사는 내 손에 들린 양동이를 받아 갈탄을 채워넣었다.

-아니면 생각이 모자랐던 건 아닐까?

갈탄 창고에 가득하게 놓인 까만 돌덩이들을 보면, 불이 붙지 않았는데도 따뜻했다. 계절이 바뀌면 갈탄은 쓸모없어지니까 이건 날이 따뜻해질때까지 버틸 양이다. 소사는 갈탄을 추가로 받으러 갈 때마다 양동이를 가득 채워주진 않았다. 날씨를 가늠하는 것도 소사의 몫이라면 낭비해선 안되기 때문에. 소사는 뭐든지 척척 잘 하는 사람이었다.

모자라게 채워진 양동이처럼 내 생각이 모자란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소사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나는 그 돈에 대해 큰 고민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빼앗길 염려를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쓸 생각은 더더욱 없었는데, 그냥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돈은 마음을 편히 만들어줬다. 지금 이 대화는 어딘가 초점이 나간 듯 했다. 그럼 왜? 소사와 비밀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돈독한 사이가 될거라 착각했나? 하지만 소사는 어른이라서 아이들의 비법이 통하지는 않을텐데.

-너만 갈탄을 받으러 오는 게 지긋지긋하니?

-아뇨, 저는 재미있어요. 다들 수업 중인데 혼자 놀러나온 것 같아서 좋아요.

-그럼 돈은 맞다고 생각하는 곳에 쓰거라. 후회하지 않을 곳에. 돈도 마찬가지고, 일도 마찬가지고 친구도 마찬가지야. 할 수 있는 선택지 안에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삼아야 해. 그게 바로 책임을 진다는거야.

삽을 문 옆에 세워두며 소사가 말했다. 민병태도 할머니에게 책임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아저씨가 말한 책임과 민병태의 책임이 같은 책임인지는 모르겠다. 이젠 나에게도 책임이 생겼다. 후회하지 않는 것과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 내가 만 원으로 나를 책임질 수 있다면 할머니가 굳이 민병태에게 차를 내어주지 않았더라도 무안할 필요는 없겠지. 이 돈을 할머니에게 준다면 방은 따뜻해질까? 송골매에게 돌려준다면, 그건 아니다. 내가 한 일이 잘못된 것이라면 송골매도 함께 잘못한 게 되니까.

소사의 말은 매번 아리송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서 생각이 자꾸만 많아졌다. 이렇게 생각이 늘어나면 양동이에 가득 찬 갈탄만큼 넘치게 되려나. 그럼 결정을 손쉽게 하게 되려나? 난 소용없는 고민을 떨쳐버리기로하고 이 돈에 대한 책임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비로소 만 원이 내 몫이 된 것만 같아 기뻤다. 그렇게 반 쯤 찬 갈탄을 가지고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우리 반에는 늘 온기가 돌았다.


아침부터 갈탄창고 앞이 시끄러웠다. 양동이를 든 학생들이 있었고 민병태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소사가 양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민 선생님.

-아니, 이 씨가 그렇게 마음대로 퍼주면 말이야. 당신 돈으로 산 거야? 이게 다 학교재산인데! 당장 오늘부터 어떻게 할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뭘 도대체 어떻게 하자고! 애들 덜덜 떨면 무슨 수업이 되겠어?

그러니까 갈탄 창고가 다 빈거다. 민병태는 소사 앞에서 학생주임보다는 그냥 주임같이 굴었다. 상급자 역할을 톡톡히 하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학생은 때리고 주임은 주인인 것처럼. 아이들은 양동이를 들고 그 꼴을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민병태는 소사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정보를 이것저것 갖다 붙이며 갈탄이 떨어진 사실을 욕했다. ‘어디서 못 배운 사람 데려다 놨더니’, ‘오갈데 없어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소문이나 행실도 다 봐줬더니’ 같은 말이었다. 잘 들어보면 그 중 민병태가 소사의 처우에 대하여 좌우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소사가 소사 일을 하는 계기에 일조했다고 하더라도 영 쓸모없는 말들이었다. 지금 당장 민병태가 아저씨를 괴롭히는 이유는 매년 하는 일이 살짝 어긋났다는 것 뿐이었다. 곧 겨울 방학이었고 이번 학기는 끝이었다. 민병태의 담임질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학교 수업이 어쨌니 다그칠만큼 공부할 것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닌데 잘도 갖다 붙이네.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야 뭐.

생각해보면 올해는 비교적 따스한 겨울이라 온종일 연통을 덥히지 않는다 해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교무실에는 이미 라디에이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학급 모두가 양동이 반쯤은 채울 수 있었는데, 민병태가 그토록 학생을 생각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러니 아이들 앞에서 소사의 체면을 깎는 행위가 도대체 어떤 이익이 되는지 의아했다.

-저 근처 나무라도 좀 쪼개 놓겠습니다. 수업에 누를 끼치지 않을테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에이… 쯧. 어쨌든 우리는 갈탄 더 사올 예산이 따로 없으니까 이 씨가 알아서 해. 교장 선생님한테는 그대로 보고드릴거니까. 그렇게 알고. 뭘 봐 이 자식들아. 얼른 들어가!

아이들에게도 체면이 있다. 사실 정말 체면을 중시하는 건 아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사소한 면면으로도 눈치를 보는데 급급하니까. 내가 본 소사가 아이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을 때, 그게 민병태의 체면을 지키려는 어른의 세계인 걸 이해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소사는 민병태의 비난을 걱정이라 발음했다. ‘돈이 없어서 그래’ 난 할머니의 말이 자꾸만 맴맴 가슴에 맺혔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말을 대입하면 대충 들어맞는 게 억울했다. 그런걸까? 그게 세상에서 진리로 통용되는걸까? 아닐거다. 정말로 돈이 없어서 그런거라면, 민병태가 학생을 정말 위하고 있다면, 이제 학교에 돈이 없는데 어쩌냐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맞다. 그런데 민병태는 소사의 망신을 택했다. 그게 편한거다.

소사는 폭격이나 다름없던 민병태의 비난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지게를 메고 묵묵히 뒷산에 올라서는 뚝딱뚝딱 나무를 했다. 굵은 것들도 더러 있었지만 보통 내 팔뚝보다 얇은 나무들을 팼다. 적당한 길이로 다듬어 어느 정도를 만들기를 며칠, 이제 방학까지 충분해 보이는데도 소사는 나무를 하고 다녔다.

-민병태 진짜 미친놈 아니야?

송골매의 과격한 반응은 일리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수업 중간에 내가 빠져나간 것만 해도 수십번은 될텐데, 자기가 춥다고 받아오랄 때는 언제고 그 책임은 소사한테 물리는걸까. 책임. 그래, 소사가 말했던 바로 책임이라는거다. 나 때문에 소사는 곤란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창고가 가득해보인다고 착각해서 모자라진 게 아닌지. 우리 반은 겨우내 늘 추운줄도 모르고 따뜻했다. 추운 걸 가장 잘 아는 내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면 정말 따스한 겨울을 났던거다. 그래서 책임에 관한 한, 소사의 체면과 맞바꿨던 갈탄을 생각하게 된다. 도망칠 방법이 없던 건 아니다. 민병태에게 책임을 돌리면 간편해진다. 면피 하려는 악당을 제압하는 나. 멋지다.

-거기서 따졌으면 민 선생님이 얼마나 곤란해졌겠니.

민병태의 소행을 알리자는 나를 말린 건 소사였다. 송골매와 짤막한 나뭇가지라도 함께 주워 소사를 돕던 차였다. 나중에 송골매는 나에게 ‘민병태는 미친놈이지만 소사 아저씨는 멍청이야.’라고 할 정도로. 그건 착해 빠진 사람의 처사로만 볼 수가 없는 말이었다. 어른들은 왜 이기는 거에 소심해지죠? 저번에는 코피가 나면 이기는 거라더니. 이건 그냥 어디서나 지고 다니는거잖아. 그렇다고 세상이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소사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무슨 입장? 사람들은 내게 늘 입장바꿔 생각해보라고 했다. 어린아이의 입장 따위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내 입장은 이건데.

정직과 선이 이기는 세계가 얼마나 흔하냐면 내가 본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증명이 아니라 학습이었다니 도통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악당을 만들어 선에 대해 가르치는거죠? 어떻게든 이기는 결과가 생기면 게을러지니까? 어른들은 죄다 멍청이였다.


교장은 민병태에게 갈탄이 비었다고 화를 내거나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민병태의 말처럼 자신이 곤란해질 일은 없었는데 괜히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만만한 소사를 붙들고 괴롭히면 이렇게 뒤탈없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니까. 추위는 모두한테 공평하니까 민병태가 소란을 일으킨 뒤로 어느 학급이 많이 썼느니, 덜 썼느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된 것도 그런 결과였다.

자신이 말해놓고서 염치도 없이 민병태는 땔감을 더 받아오라고 했다. 양동이에는 갈탄 대신 쪼개진 나무가 있었는데 갈탄보다 좋은 점은 얼기설기 채워 양을 부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사가 힘들까봐 난 매번 그렇게 했다. 햇살만으로 충분한 온기가 돌았기 때문에 큰 필요는 없었는데 소사를 괴롭히려는 듯 민병태는 창을 죄다 열고 연통에 열을 나게 만들었다. 냉기가 쏟아졌다. 다시 겨울이 짙어져서 민병태가 비슷한 행동을 벌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소사의 말대로 모른 척 민병태의 체면을 세워줘야만 하는건가. ‘학교를 관리하는’ 배역을 소화시키기 위해? 한낱 연극이라면 끝나고 수고했다며 서로를 격려하겠지. 소사의 등을 두드리는 학생주임 민병태. 잠시 조아려주면 모든 게 문제없이 끝날 거라고 소사가 말했던 것처럼. 더구나 내가 그 세계를 어그러트리는 사람이라고, 약속한 대본을 망치는 거라고 모두 내게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다. 주인공이 아닌 내가 연극을 무난하게 흐르도록 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돌아오는 겨울에 뱉어야 할 대사는 정해져 있다.

‘선생님, 소사 아저씨를 못 찾겠어요.’

민병태는 살짝 더 추울테고, 나보고 당장 나가 찾아오라고 하지도 않을테고, 소사는 여기저기서 숱한 과제를 마치느라 분주할테니까. 그리고 힘에 거스르지 않는 무난한 연극이 지루하게 이어질거다. 내가 머리를 최대한 쓰며 얻은 최선의 선택은 말이다.

굳이 민병태 뿐만 아니라 소사에 대한 선생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손을 깨끗이 씻으세요’, ‘복도에서 뛰지 마세요’, ‘환기를 자주 시키세요’ 아이들이 지켜야 할 문구들과 똑같은 취급이었다. 자기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얕잡아 봤다. 그래서 소사만큼 능수능란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결코 그렇지 않을텐데. 왜냐하면 나는 고등교육을 이수한 선생이니까. 가르치는 일을 잘하면 그것만 하시죠. 소사는 절대 그렇게 따져묻지 않는다. ‘아이들을 때리지 마세요’,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소사를 괴롭히지 마세요’ 만일 선생도 지켜야 할 문구가 만들어졌어야 한다면 응당 그래야 할 문구들. 그러나 이 문구들은 아무도 지키지 않을거다. 우리 역시도 학생에게 하달된 뻔하디 뻔한 문구들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선생님, 이거 할머니가 가져다 드리래요. 말씀하셨던 거라고.

종업식 하루 전, 민병태에게 만 원을 담은 봉투를 줬다. 민병태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멈칫하더니 봉투를 받아들고는 열지도 않은 채 자리에 돌아와 앉는 나를 바라봤다. 기대도 않았던 일을 마주쳐 고장난 것만 같았다.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다른 친구들이 떠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송골매, 나 이 돈은 민병태한테 줄거야.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 전에는 송골매에게 먼저 허락받는 게 순서라고 느꼈다. 그래서 먼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송골매의 돈까지 다시 걷을 생각은 없었고, 이 돈을 주는 의미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나서 녀석은 수긍했다.

-자기가 부끄러운 줄은 알까?

-알았으면 시작도 안했을거야.

그래서 민병태가 금액에 대해 언짢았는지 아닌지, 나를 다시 불러다 분노를 쏟지 않을지 걱정을 잠시 했으나 별 탈 없이 종업식은 끝났다. 내년이면 담임은 바뀔 것이고 다른 학생에게 또 비슷한 일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송골매는 진작 과자를 사 먹고 노는 것에 돈을 다 썼다고 했다. 내심 부끄러웠는지 학용품과 책도 샀다고 말했다. 만화책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떠올려보면 난 충분한 값을 지불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던 소사. 알고 있는 사실이 겪어야 할 이유로 충분치 않다는 게 내 입장이었다. 할머니의 체면치레를 한 값, 민병태에게 죄책감을 지운 값, 그리고 내 스스로를 책임지며 치른 값. 민병태가 부디 빚진 무언가를 알아채기를 바랐다. 내가 만 원 한 장에 내내 휘둘렸던 마음처럼.


새 학기. 창가 쪽으로 라디에이터가 모두 자리잡았다. 겨울방학동안 이루어진 공사였다고 한다. 교실마다 있던 연통이 사라진 것처럼 소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가 금세 잊고 말았다. 학교에는 그 해 겨울에도 갈탄 예산이 잡혀 있었다. 이후로 소사가 동이 난 갈탄에 대해 질책받을 일도 영영 없었다. 내가 열심히 고민한 나의 배역과 대사도 쓸모가 없어졌다. 창고에는 미리 채워둔 갈탄이 가득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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