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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Feb 09. 2019

외래진료라는 전쟁

3시간 기다려 3분진료. 환자를 보는 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각박한 의료환경은 이미 모두가 알면서도 체념한 지 오랩니다. 이렇게 봐도 암환자 생존률은 선진국 수준이며 평균수명은 세계 최고이니 이런 박리다매식 진료는 오히려 '한국 의료의 효율성과 우수성'으로 둔갑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 3분은, 진짜 3분이 아닌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환자를 만나기 전 준비를 하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의사들은 외래 진료실 바깥에서는 일을 하지 않거나 외래 진료가 없는 날엔 출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3분만에 모든 것을 확인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솔직히 정말 좋겠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들은 보통 두달에 한번씩 CT를 찍습니다. 약이 잘 듣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직 암덩어리의 크기 변화를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애매하면 MRI나 PET-CT도 찍습니다. 물론 영상의학과 의사들이 미리 판독은 해줍니다. 그러나 영상 소견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죠. 

환자가 이제까지 호소하던 증상이 좋아지고 있는지, 혈액으로 검사하는 종양표지자 수치는 어떤지, 혹시 항암제 치료로 인한 부작용이 심하지는 않은지, 영상을 찍을 때마다 종양내과 의사들은 저울질을 해야 합니다. 계속 이 치료를 할 가치가 있는지. 이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될지. 이제까지의 경과를 떠올리며 어떤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인가를 생각합니다. 환자를 대신해 그의 질병의 여정을 반추하고 결정의 기로에 섭니다.

이 일을 3분만에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많은  종양내과의사들은  매 외래 전에 예습이라는 것을 합니다. 보통 preview 라고도 하고요. 저같은 경우는 저녁을 먹고 연구실에 올라와 다음날 3-4시간동안 봐야 할 30-60명 정도의 환자를 예습하는데, 보통 2-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어쨌든 실제로는 3분진료가 아니고 환자당 약 4분 정도의 시간을 예습에 쓰고 있는 것이니 7분 정도의 시간을 쓰고 있는 거라고 우겨볼 수도 있겠습니다.) 귀가하면 8-9시 정도가 통상적인 퇴근시간입니다. 회식이나 약속이라도 있으면 당일 새벽에 나와 번갯불에 콩구워먹듯이 1시간 정도에 걸쳐 훑어보고 진료실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겨서 예습없이 외래진료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진료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지기 때문에 대기시간이 길어진 뒷 순서 환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진료실 바깥에선 간호사들에게 큰소리를 내며 항의하는 이들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진료실에서도 이 소리가 다 들리기 때문에 마음은 급해지고 눈앞의 환자에게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이러다가 실수라도 할까 겁이 납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정확한 결정을 하고 의사소통을 하려면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들어가야 하는, 전장에 임하는 장수의 심정이 됩니다. 


적군 중엔  그냥 보병도 있고 말탄 기병도 있고 풍채가 남다른 장수도 있습니다. 일단 전투를 하려면 적의 실력을 파악을 해야 하죠. 저도 암이라는 질병의 난이도에 따라 환자들을 분류합니다. 암도 다 같은 암이 아닙니다. 이미 제거된 암. 조절은 되고 있지만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암. 나빠지고 있는 암. 

1.   상당수의 환자들은 항암치료 방침을 정해놓은 대로 진행하는 것이므로, 예습 때 이들에게 미리 할애하는 시간은 짧게는 기록을 확인하는 수 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만나도 특별히 문제가 없는 한은 진료도 수 초에 불과하게 됩니다. ‘앞 사람은 오래 있더니 나는 왜 금방 끝나냐’ 고 항의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대개는 상태가 좋지 않으니 오래 걸리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치료 중 문제는 언제든지 있는 법. 예상보다 좋지 않아 보이는 안색을 하고 오시는 분들은 또한 이것저것 묻고 가끔 (정말 가끔..) 진찰까지 하느라 5-10분이 훅 가기도 합니다. 

2.   예습을 주로 해야 하는 대상들은 치료방침을 바꿔야 하는 분들입니다. 시티를 찍어서 항암치료를 계속해야 할 지, 약을 바꿔야 할 지, 또는 항암치료를 멈추어야 할 지 결정해야 하는 (저는 주로 이런 상황을 '치료의 변곡점'이라고 부릅니다) 상황에 있는 분들은 한 환자 당 길게는 10-20분이 걸리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영상소견과 환자의 상태를 종합하여 결정하게 되는데, 명확할 때도 있지만 결정하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이럴 때는 환자를 만나서 전신 상태를 파악하고 의향을 물어보아 상의하여 결정해야겠다고 시나리오를 짜놓습니다. 이렇다면 A 방법, 저렇다면 B방법, 이렇게요. 하지만 막상 환자를 만나면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나게 되고 시나리오대로 가지 않게 될 때도 많습니다. 

정말 신날 때는 치료 후 종양이 줄어든 것을 확인할 때입니다. 그냥 하던 치료를 하면 되는 것이므로 결정도 어렵지 않죠. 크기를 얼마나 줄었는지 재어보며 희열을 느끼는 것은 왠지 보람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취미생활같은 변태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환자가 좀더 기뻐할 지, 조금은 생색을 내도 될 지, 힘든 투병의 과정 속에 한 떨기 피어난 희망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상상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종양이 줄었다 하여 완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러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수많은 가시밭길 여정 중 몇 개 안되는 휴게소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며 찬물도 동시에 끼얹어야 하는 임무 또한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3.   2.의 환자 중 질병이 진행한 환자를 미리 파악하여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예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치료 중에 암덩어리가 커졌거나, 또는 치료를 마친 후 경과관찰 중 재발한 이를 눈앞에 두고 ‘나도 지금 이걸 알아 놀랐다’며 토끼눈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미리 장착하고 침착하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환자는 나를 믿고 따라올 것입니다. 갑자기 터져나올 지 모를 환자의 슬픔과 분노에도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날의 외래 진료는 병이 나빠진 환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얼마나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지가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화가 나시겠지만, 오늘 좋지 않은 환자가 많았구나,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던 이들이 많았구나, 라고 한번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4.   종양내과 진료실에서 대기하는 분들 중 가장 안색이 좋은 분들은 치료를 종료하고 경과관찰중인 환자들입니다. 보통 환자가 아니라 ‘암 생존자’ ‘암 경험자’라고 칭합니다. 3-6개월마다 검사를 하고 결과를 확인하러 옵니다. 물론 검사결과는 예습시간에 다 확인합니다. 가끔은 재발이라는 황망한 소식을 맞닥뜨리게 되어 3번으로 분류되는 불운을 겪게 되기도 하나, 대부분은 검사결과가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다음 약속을 잡고 귀가하는, 거의 30초 이내의 초 스피드 진료의 대상이 됩니다. 

이분들은 당장 항암치료를 하고 있지는 않으니 전신상태는 상대적으로 낫기는 합니다. 그러나 치료가 남긴 장기적인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경험이 적었을 때는 이런 분들이 쏟아놓는 증상들이 매우 하찮게 여겨질 때가 많았습니다. 어쨌든 암으로부터는 자유로운 분들이니까요. 그리고 그 후유증이라는 것들은 힘들기는 해도 당장 위험하지는 않은 것들이라, 항암치료를 현재 받고 있는, 또는 암이 진행하고 있는 이들의 고통에 비하면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분들이 이런저런 (제가 보기엔 중요해 보이지 않는) 질문을 하며 시간을 끌기 시작하면 조바심이 나고 어떻게 내보내야 하나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인 입장에서는 어떤 증상과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보통 3-6개월만에 만나기 때문에 그동안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쌓이고 쌓였을 것입니다. 병이 재발하지 않나 불안할 텐데 먼 길을 와서 ‘괜찮아요’ 한마디로 그 불안이 다 가라앉지도 않을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이들의 치료 후유증, 불안, 암 외의 동반질환 관리까지 통합적으로 하는 암 생존자 관리 프로그램이 있고 주로 의사가 아닌 nursing professional (굳이 번역하자면 전문간호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이 관리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대형병원에서의 30초 진료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암 경험자에 대해 지역사회에 기반한 구조화되고 환자중심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5.   가장 힘든 (본인도 힘들고 저도 힘든) 분들은 더 이상 항암치료를 할 수 없어 증상완화치료를 하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보통 진통제를 조절하거나 변비, 복통, 불면 등의 증상에 대해 처방을 하기도 하며, 간혹 방사선치료나 신경블록같은 다른 치료를 하기 위해 타과로 의뢰드리기도 합니다. 저는 이 시기가 그들에게 가장 위태롭고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분들은 길게는 10-15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경험이 적을 때는 이들을 ‘별로 해줄 것도 없는데 시간을 잡아먹는’ 다고 여겼고 진료시간이 지연될까 초조한 마음을 얼굴에 다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을 완화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지요. 제가 완화치료를 적절하게 해드릴 수 있는 의사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저는 마치 공장과도 같은 대형병원의 항암치료 시스템에서 그래도 최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1,2,3에 해당하는 환자들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 역시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수 개월, 수 년간 항암치료를 하면서 저와 쌓은 관계를 어떻게 완화의료전문가에 대한 믿음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최근 수 년간의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참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이라 여겨왔는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렇게 복잡할 수가 없네요. 전장에 나가는 장수같은 심정으로 진료실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미리 파악하고 들어가도 의무기록에 띄워진 번호가 아니라 살아있는 환자를 만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암이라는 질병은 모니터에 띄워진 영상 화면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낯빛, 표정, 갖가지 증상으로 다양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 앞에 다가섭니다. 

그나마도 예습이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모니터를 보며 준비하는 시간 만큼이라도 환자 본인과 마주하여 상담하고 진찰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어떨까요. 백전백승은 아니더라도 승률은 조금 더 올라갈 지도 모릅니다. 미리 파악한 것과 적(물론 환자가 아니라 질병이라고 해야겠죠)의 모습이 달라서 허둥대는 일은 좀 줄어들 테니까요. 적어도 내가 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순 있을 테니까요. 아니, 무엇보다 환자 스스로가 수많은 외래 건수 중 하나로 ‘처리되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사를 만났다’고 여길 수 있는 시간이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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