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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Jul 11. 2019

의사와 과로의 바다

‘노인과 병원의 바다’라는 칼럼을 읽었다. 병원이라는 낯선 바다에서 갈 길을 잃고 ‘아픈게 죄’라며 한숨을 내쉬는 칼럼 속의 노신사는 아마도 글쓴이의 아버님일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칼럼의 어조는 꽤 점잖다. 서글픔을 드러내는 담담한 문체로 씌어졌다. 청와대 청원이 진행중인 주치의제도에서 대안을 구해보기도 하고, ‘의술과 인술은 공존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차마 의사의 뺨을 때리거나 종아리를 걷어차지는 않았다’는 조선일보 간장부장님의 일갈에 비해서는 감정을 자제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2920788?fbclid=IwAR1cngUVKTU4zQ8okv6hxkpf13B3a8-9y7pVgVxsPG5G2UZjkFr68VRhWH4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29/2014052904628.html

병원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하나의 병록번호로 다뤄지는 소외의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법한 것임과 동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다. 환자와 보호자로서 병원을 찾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늘 유심히 봐오곤 한다. 그래서인지 기자들이 쓰는 병원의 경험에 대해서도 늘 먼저 눈길이 간다.

그러나 한편으론 좀 의아하기도 하다. 중앙일간지 중견 간부쯤 되면 홍보팀이 먼저 움직인다. 높은 사회적 기대를 적은 비용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의료계에게 언론은 천적이자 갑님이다. 언론인이 환자이거나 보호자인 경우에는 홍보팀에서 담당의사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XX 일보  OO 부장님 어머님이십니다. 잘 좀 부탁드릴께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푸대접을 받았으니 일반 환자들은 어떻게 느끼겠느냐는 반박도 가능하다.


의사들의 의사소통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CT 사진을 보여주며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기까지 의사의 머릿속에는 사실 환자가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까를 생각할 여지는, 솔직히 말하건데 나의 경우를 되돌아보아도 많지 않다. 다만 이런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는 가득할 것이다.

환자의 나이, 성별, 흡연력, 환경, 가족력, 직업, 과거 병력을 고려할 때 이것이 악성종양, 즉 암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는 진료 전에 CT를 미리 보고 영상판독결과를 확인했을 것이다.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영상의학과 의사에게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조직검사를 하는 것은 다소의 위험이 따른다. 더군다나 노인은 한번 만에 하나 합병증을 겪으면 회복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검사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부위인가. 검사의 위험에 비해 그것으로 얻는 정보가 가치있는 것인가.

만약 악성으로 나온다면 그 다음은 어떤 검사를 할 것인가.

그 이후에는 어떤 치료가 가장 적합할 것인가.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 상의 깜빡이는 커서가 노인 환자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지는, 의사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을 것이다.

 

노인은 병원이라는 바다에서 헤메지만, 의사는 수많은 정보와 가능성과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헤메인다. 그 바다가 환자마다 하나씩 펼쳐져 있으니 의사에겐 과로의 바다일 지도 모르겠다. 그 속을 노인의 손을 잡고 가장 최선의 길을 인도해 주어야 한다. 정신차리고 있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다. 노인이 아닌 다른 엉뚱한 환자를 데리고 가는 최악의 사고도 드물지만 일어난다. 정확하고도 합리적인 길을 찾아 헤메이며 그는 앞만 보았을 지도 모른다. 막상 그 길에서 맞닥뜨리는 온갖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환자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환자의 경험이 곧 의료의 질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제아무리 최첨단 의료기술로 무장한다고 해도 환자의 괴로움을 덜 수 없다면, 환자를 불안하고 슬프게 만든다면 그것은 의료가 본질적인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볼 수 없다.

환자경험평가결과를 의료수가에도 반영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좀더 친절하자, 설명을 잘해주자, 회진을 제 때 돌아라, 환자를 칭찬하고 격려해라, 이런 내용을 담은 공지메일을 계속 받고 있다. 의사들은 진료실에서의 커뮤니케이션 패턴에 대한 모니터링과 카운셀링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 가장 중요한 환자 수를 줄여주려는 노력은 병원도 정부도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의 진료량은 유지하면서 더 환자를 만족시키라는 채찍질이다. 

어제는 3시간동안 40명 정도를 봤다. 한 사람당 5분이 안된다. 3분보단 길어서 다행인가. 같은 시간에 50명 100명 보는 의사들도 부지기수인 우리병원에서는 비교적 양호한 수치다. 그럼에도 소위 '사고 안 치고' 진료를 보기에도 사실 빠듯한 시간이다. 환자의 중요한 증상을 놓칠까봐 걱정되지만, 무엇이 중요한 줄은 모를 수밖에 없는 환자가 핵심보다 변죽을 울리는 말만 반복하게 되면 어쩔수 없이 말을 끊고 만다. 엉뚱한 약을, 또는 엉뚱한 용량을 입력하는 사고는 잠시만 정신줄을 놓아도 일어난다. 물론 간호사, 약사가 이중삼중으로 체크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멍이 나면 큰일이다. 외래진료는 매일의 일이라 어쩌면 관성으로 흘러가지만, 사실상은 매일매일이 외줄타기다. 그 와중에 친절하기란. 의술이 인술이 되기란. 인성을 보고 의사를 뽑아야 한다, 의사도 인문학을 공부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는 말은 사실 그 옳음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고인재들이 몰리는 의과대학에서 배출된 의사들이 이렇게밖에 못하냐는 말에는, 뭐든지 참고 견뎌오며 꾸역꾸역 하는 데는 이골이 난 '최고인재'여야만 이런 과로의 외줄타기를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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