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기만 해도 든든한 히든카드가 생겼다
하반기에 우연하게 프리랜싱을 시작하면서, 작년 11월부터 이어 온 갭이어는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갭이어 파트 1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그동안 블로그와 일기장에 써 온 <나의 갭이어 일기>를 모아 10~11월쯤 에세이레터를 발송해 보려고 한다. 마침 11월이 퇴사 1주년이니 겸사겸사 좋은 타이밍이라고 혼자 의미 부여 중.
컴컴한 무기력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왜 갭이어를 시작했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을 잘 남기고 싶다. 미래에 또 다른 갭이어를 가질지도 모를 나를 위해.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위해.
- 2023년 8월 31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스무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셨나요?
오늘은 <나의 갭이어 일기>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기도 해요. 그래서 오늘 편지는 작년 여름에 썼던 마지막 갭이어 일기로 열어 보았습니다. '갭이어 파트 1'이 끝났음을 선언하면서 지금의 에세이레터를 써 보겠다고 이야기한 날이었죠.
왜 그냥 갭이어가 아니고 갭이어 파트 1인지, 파트 2 파트 3도 있는 건지 궁금하실 것 같아요.
22년 가을부터 23년 여름까지를 '갭이어 파트 1'로 이름 붙인 이유는 이게 제 인생의 마지막 갭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파트 2도, 파트 3도 있을 수 있다고 열어두고 싶었어요. 언젠가 몸과 마음의 건강이 다시 나빠질 수도 있고, 제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고, 일과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첫 갭이어를 결심할 때는 '정말 쉬어도 될까?' 의심하고 자책하고 고민하느라 참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니 너무 그럴 필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갭이어를 통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았거든요.
갭이어를 통해 얻은 것
번아웃으로부터 회복했다.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뜨개질, 요리, 여행)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끝까지 비우고 나면 저절로 채워진다는 걸 알게 됐다.
갭이어를 통해 잃은 것
첫째도 돈, 둘째도 돈.
하지만 돈 외에는 잃은 게 없다!
갭이어 이후 바뀐 것
일하는 환경이 바뀌었다. (직장인에서 프리랜서로)
남들의 기준보다는 나만의 기준으로 생각하게 됐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됐다. 그릇 작은 나도 나! 완벽주의 심한 나도 나!
갭이어 이후에도 바뀌지 않은 것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수년째 여전하다는 걸 발견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기존의 인생관이 더 뚜렷해졌다.
갭이어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얻은 건 물론이고, 갭이어 이후의 일과 삶이 더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갭이어를 보내면서 제 가치관에 확신이 생기기도 했고요.
실제로 갭이어를 종료하고 퇴사 1주년이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쓰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딱 퇴사 1주년이다. 고작 어제처럼 느껴지다가도 한편으로는 놀랍도록 아득한 시간. 1년을 돌아보면 퇴사 전 내가 바랐던 시간을 충분히 보낸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찡하다. 괴로워하던 작년의 내게 무엇을 걱정하든 결국은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게 마법처럼 술술 풀리거나 아주 잘 되지는 않아도, 나름의 굴곡 안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을 거라고.
- 2023년 11월 3일 일기에서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까지 쓴 모든 편지들이 제가 8개월 동안의 갭이어를 통해 얻은 '작은 깨달음'이었던 셈이에요.
기나긴 인생에서 몇 달 혹은 몇 년을 잠깐 나에게 투자해서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까지 재조정할 수 있는 게 갭이어라면 저는 가성비가 되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앞으로 다시 쉼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나를 너무 괴롭히지 말고 적절한 방책으로서 갭이어를 다시 선택하고 싶습니다.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한, 중요한 순간에 얼마든지 꺼내들 수 있는 나만의 히든카드 같은 존재인 거죠!
인생 첫 갭이어 이야기를 에세이레터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언젠가 갭이어 파트 2를 가질지도 모르는 미래의 나를 위해. 그리고 제가 그랬던 것처럼 갭이어의 문턱 혹은 한중간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요.
지난 13화에 이런 문장을 쓴 적 있어요.
"원하는 만큼 충분히 쉬어가되 홀로 고립되지는 않도록. 부유하는 감각이 아닌 자유로이 유영하는 감각으로 이 시간을 지나갈 수 있도록."
<나의 갭이어 일기>를 쓰는 내내 저는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갭이어를 선택할 거라면 그 과정이 너무 힘들지 않기를 바랐어요. 갭이어를 보내고 있다면 혼자 고립되거나 망망대해에서 부유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이 시간을 활용하기를 바랐고요.
구독자님께서 지금까지 스무 장의 편지를 읽는 동안 이런 마음이 잘 느껴졌다면 저는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계절이 돌아오듯 곧 다시 만나길 바라며,
그럼 이만 줄일게요.
편안한 밤 보내시고 늘 건강하세요.
감사한 마음을 담아,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 갭이어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이 바뀌었나요?
구독자님의 갭이어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아직 끝을 맺기 전이라면 무엇을 얻고 무엇이 바뀌었으면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만으로도 갭이어는 내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예요.
지금까지 20편의 편지를 읽고 난 소감이나, 제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에 남겨주세요. 혹은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셔도 좋아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리며, 저는 언젠가 다시 편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