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리는 날에 할 일

012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은 가까이 있다"

by 오태현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은 가까이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살라










첫눈 내리는 날에는 무얼 해야 할까? 나는 꼭 야채호빵과 병에 든 따끈한 두유를 먹는다. 물론 청승맞게 혼자 먹는 건 아니다. 아내랑 초등학생인 남매랑 함께 먹는다. 올해도 첫눈 내리는 저녁엔 갓 쪄낸 뜨거운 호빵 두 개와 병에 든 따끈한 두유 두 병을 네 식구가 사이좋게 반반씩 나눠 먹었다. 이런 소박한 이벤트는 15년 전 첫눈 오는 날 시작됐다.


나는 아내와 아직 연애 중이었다. 8월에 연애를 시작해 첫겨울을 맞았다. 11월 말 어느 저녁 느닷없이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만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냥 첫눈이 내리니 만나자고 하기에는 아직 쑥스러운 때였다. 그래서 만들어낸 이유가 야채호빵과 두유였다. 내가 살던 곳과 아내의 집 사이에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11월이 되면 가게 사장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이 든 찜기와 병에 담긴 두유가 들어 있는 온장고를 가게 밖에 내놓았다. 나는 즉흥적으로 따뜻한 호빵과 두유를 생각해냈다. 그러고는 원래 첫눈 오는 날에는 그걸 먹어야 하는 거라고 우겼다. 결국 아내는 나에게 속았는지 속아주었는지 가게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야채호빵과 두유를 먹었다. 웬만하면 뜨거운 음식은 호호 불어가며 먹으면 맛있다. 그런데 호빵과 두유는 전혀 맞는 음식이 아니었다. 아주 생소했다. 아내는 내게 "이게 무슨 맛이냐?"고 물었고 우리는 한 참 깔깔대고 웃었다. 그 이후로 우리에게는 그게 이벤트가 되었다. 매해 첫눈이 내리면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야채호빵이랑 두유?"하고 말했고, 이제는 아이들까지 함께 하는 가족 이벤트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첫눈 내리는 날이면 함께 모여 야채호빵과 병에 든 따끈한 두유를 나눠먹는다.











어떤 물건이나 일의 가치를 매기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물질적인 가치다. 쉽게 말해 '얼마짜리인가?' 하는 것이다. 비싸면 더 가치가 있고 저렴하면 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보통 우리가 가치를 매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두 번째는 수고의 가치다. 그 물건이나 일을 위해 사람이 얼마나 수고를 했는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보다 장인이 직접 손으로 만든 물건이 더 가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관계의 가치다. 그것이 얼마인지, 혹은 그것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초월하는 가치다. 그 물건을 누가 준 것인지, 그 일을 누가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말이다. 엄청난 수고가 들어 있지 않아도, 비싼 가격이 아니라도 좋은 그런 거다. 금박 은박 수놓은 비싼 초대장은 일정을 확인하고 금세 폐지함에 버려진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그려준 유치한 그림편지는 오래도록 책상에 붙어 있다. 혹시나 잊을까 사진으로 찍어두기도 하고 SNS에 게시해 남들에게 자랑하기도 한다.


첫아이를 낳고 옷을 버려야 할 때가 있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니 누워 있을 때 입던 옷들을 버려야 했다. 오래 입어 낡은 내 옷가지들과 아이의 옷 몇 벌을 버리기 위해 집을 나와 재활용 의류함 앞에 섰다. 비싸게 주고 산 내 옷들은 다 버렸는데, 인터넷에서 헐값에 샀던 아이의 옷은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곤 그걸 다시 들고 들어왔다. 아내가 "왜 다시 가지고 들어와요?"하고 묻는 말에 그만 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보, 우리 아들 냄새가 옷에서 나. 도저히 못 버리겠어." 정말 그랬다. 아이의 냄새가 가득 밴 옷을 버리려니 마치 아이를 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빙긋 웃으며 다시 들고 들어온 옷가지들을 받아 들었다. 그 후로 한참을 보관했다가 아이의 냄새가 다 빠진 다음에야 배냇저고리 두어 장을 빼고 내다 버릴 수 있었다.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에 후회할 것은 돈을 적게 번 것도, 어떤 꿈을 이루지 못했음도 아닐 것이다. 내 직업의 특성상 정말 많은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늘 아쉬움은 가족이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도 그러셨다. 마지막 들은 말씀이 아들을 향한 걱정이었고,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결국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그러니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난 목사지만, 가족을 내팽개쳐 두고 교회 일만 하는 사람들은 크게 잘못됐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가족을 만드셨다. 학교도, 직장도, 나라도, 교회도 아닌 가족을 말이다. 하나님도 가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단적인 증거다. 가정을 먼저 만드신 하나님은 결코 가족을 홀대하며 교회에 매달리는 사람을 잘한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종교만이 아니다. 일도 그렇다. 심지어 세상을 뒤집을 큰 일이라도 가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엄청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지 못한다 해도, 한 걸음씩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오히려 위대한 일을 한다면서 세상을 망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은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첫눈 오는 날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주라! 소박하지만 사랑이 담긴 작은 이벤트가 있다면 더 좋겠다. 그게 우리가 꿈꾸는 어떤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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