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일 : 고마운 사람
힘든 마음을 들어준 이를 떠올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 세 탕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마음이 복잡했던 건 사실이지만 우울하다거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까지는 아니었는데, 상대는 내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는지 전화를 걸어왔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혹시 요즘 힘든 일 있냐는 질문에 별로 큰일은 아닌데 자잘한 고민들이 많다는 말로 물꼬를 텄다.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괜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따뜻하게 고민을 물어오니 나도 모르게 감정의 벽이 허물어져 요즘 나의 고민을 다 털어놓고 말았다. 사연 있는 사람처럼 지하철 한쪽에 서서 조금씩 훌쩍거리며.
얼마 전, 선배 언니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남자를 만나야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토론을 시작했다. 나는 최근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힘든 일, 고민거리 등을 위로해 주는 역할을 도맡아 하는 편이다. 강한 사람인 척,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인 척하는 게 주특기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꾸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저녁이 되기도 전에 배터리가 나가는 경우가 잦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 진짜 내 사람의 일이 아니면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지만, 모 작가는 나에게 전생에 비둘기였냐며 뭘 그렇게 도와주고, 연결해 주느라 정신이 없냐고 했다. 그렇게 하루를 정신없이 살다가 집에 돌아와 온전한 내 시간을 보낼 때쯤이면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남자 친구에게 칭얼대고, 아무 말 없이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곤 한다. 만약 결혼을 했는데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남편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준다면 그것만 한 위로가 없을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모두 다 듣고 '고생 많았네.'라는 한마디와 토닥임이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이지만, 또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 않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혹시나 약점이 되지 않을까, 나를 얕잡아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징징거리는 모습이 추해 보이지는 않을지 와 같은 쓸데없는 걱정까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힘들고 외로워도 참고 견뎌야 하는 걸까? 17살이나 27살이나 37살이나... 67살이나 고민은 있고, 아프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다 똑같은 연약한 사람인데...
TV 강연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겉으로 센 척을 한다고. 거의 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정확한 표현에 물개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행복한 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한 번은 그 사람에게 위로의 제스처를 건네보길 바란다. 아마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 주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견고할 것 같은 마음의 벽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는 걸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는 작고 소소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되는 밤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