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일 : 아빠는 언덕

카카오 TV <찐경규>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by 몽상가 J

<찐경규>라는 프로그램은 카카오 TV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예능 대부 이경규가 방송이 아닌 디지털에서 선보이는 첫 예능으로 시작부터 화제가 됐던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가 최근 회차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경규가 딸 예림이와 함께 술을 마시며 '아빠 이경규'의 모습을 보여주어 찡했다는 소감을 전해 일부러 찾아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색하다며 빨리 취해야겠다고 연거푸 술잔을 비워냈다. 여기서부터 아주 현실감이 느껴졌다. 나도 아빠랑 단둘이 술을 마셔본 적은 없는데, 괜히 단둘이 있으면 어색해질 것 같긴 하다. 결국 두 사람은 PD가 챙겨준 토크 장치를 이용해 대화를 이어 나갔다. 토론을 펼치기도 하고, 부녀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을 보기도 했다. 예림이는 9개의 문항을 맞혔고, 이경규는 절반도 맞히지 못했다. 시험 항목 중 가장 웃겼던 건 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이경규가 '샐러드'라고 썼는데, 예림이는 다이어트 때문에 억지로 먹은 거라며 어떻게 그걸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쓸 수 있냐고 역정을 냈다. 어쩌면 우리 아빠도 내가 다이어트 식단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경규는 딸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 중 '아빠를 무조건 이해해.'라는 문자를 받고 감동받았다는 말을 했다. 타인이 아닌 내 자식이 부모가 하는 일에 무조건적인 이해를 해준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게 또 있을까. 나는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던가.


나도 아빠가 보내준 문자 중 기억에 남는 문자가 있다. 20살, 대학생활의 첫여름 방학을 맞이했을 때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새로 사귄 대학 친구들과 떠난 여행이었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딸의 첫 여행이 아빠에게는 꽤나 의미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그 당시 보낼 수 있는 문자 메시지의 글자 수를 꽉꽉 채워서 경험과 여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왔다. 당시에는 알겠다고 시니컬하게 답을 했었지만, 몇 년이 지난 뒤 우연히 예전 휴대폰을 보다가 발견한 그 문자는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찐경규> 내용 중, 나를 가장 찡하게 했던 한 마디는 마지막 멘트였다. 질문은 "취기를 빌어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은?"이었다.


아빠는 언덕이야. 비빌 수 있는 언덕이야. 그러니까 마음껏 비비라고. 소떼나 양 떼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 살아가는 거야.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너의 비빌 언덕은 아빠다. 아빠는 너의 비빌 언덕이라고 생각하라고.


정말 예상하지 못한 한 마디였다. 아빠는 딸에게 비빌 언덕이라니. 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다 돌아오든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그저 내어주는 언덕이 되겠다는 건지 그 마음을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지만 우리 아빠도 나에게 그런 마음이겠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괜히 마음이 찡해져서 고개를 두어 번 세차게 흔들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그런 마음인 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나도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걸까.


예림이가 "결혼해서도 계속 비벼도 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이경규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웃으며 아빠라는 언덕에 비비라고 했다. 예림이는 참 든든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아빠가 귀가하면 나도 질문을 해봐야겠다.


"아빠, 아빠한테 나는 어떤 존재야? 아니, 아빠는 나한테 어떤 존재가 되어주고 싶어?"


아무래도 나는, 나이를 먹어도 아빠에게 철부지 딸로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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