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일 : 서운하다
솔직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정을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이다. 친한 사이일수록 싫은 소리 하는 게 힘들어서 해야 할 말이 있어도 다음으로 미루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감정을 모두 오픈하는 사람은 삼귀는(썸타는) 사람 또는 사귀는 사람이다. 썸을 타는 관계에서는 그나마 밀당도 하고, 감정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데 사귀기 시작하면 모든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사귈 때마다 느끼는 건 어느 정도 감정을 숨기는 것이 관계를 지속하는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변해가고 있다.
내가 표현하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서운하다' '화났다'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다. 나는 주로 화를 내기보다는 서운함 감정을 자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주말에 데이트를 하기로 해놓고 급한 일이 생겨서 주말 약속을 취소한다든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연락이 뜸하던지, 말투에서 시큰둥함이 느껴질 때, 데이트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등 서운함이 극에 달하면 상대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 당신의 이런 행동들 때문에 나는 너무 서운하다고.
서운하다는 감정을 표출했을 때 미안하다고 달래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훈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을 예쁘게 했으면 좋겠다, '때문에'라는 말처럼 무언가를 탓하는 말투를 고쳤으면 좋겠다 등. 내가 지금 서운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부수적인 부분에 대해 훈계를 하다니. 이 사람 뭐지,라고 생각하지만 하지 말라는 건 웬만하면 하지 않는 편이라 입을 삐죽이며 그런 부분은 고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난 후 내가 서운하다고 한 이유에 대해 분석하려고 한다, 아주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그런데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데 이성적으로 해석하려 들면 그것만큼 당황스러운 게 없다. 그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지만, 헤어지고 난 후에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너 잘났다! 아주 백 분 토론에 나가지 그러냐! 재수 똥이다!'
두 번째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와 같은 애정 가득한 감정이다. 사실 이런 말은 백번 천 번이고 듣고 싶고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맛있는 음식도 백 개를 먹으면 물리듯이 좋은 감정 표현도 계속 들려주면 감사한 줄 모르고 흘려듣게 된다. 아니 흘려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상해하는 경우들이 있다. 어릴 때는 그러거나 말거나 '좋아한다', '보고 싶다'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했는데 이제는 말을 아낀다.
태생이 밀당을 못하는 성격인데 어쩌다 보니 밀당을 하게 됐다. 사랑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밀당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던 과거의 나와는 달리, 밀당을 해보니 사람 마음이 간사하게 끌려오더라. 잘해주기만 하면 안일하게 여기던 감정들이 밀당을 하니 안달 나서 스스로 달려온다. 연애를 할 때 하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가 밀당이었는데 이 사실을 터득한 후로는 어쩔 수 없이 밀당을 하게 된다.
어제 굉장히 서운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삼귀는 사이에서는 특히나 감정 표출에 조심해야 하기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한편으로는 일부러 상대가 나에게 그러는 건가 싶을 정도의 태도였는데, 그 순간 하수처럼 모든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을 할 때도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서도 이렇게 머리를 써야 한다니... 너무 피곤한 일이다.
"OO아! 너 때문에 나 어제 엄청 서운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나 완전 삐졌어!"
대나무 숲은 아니지만, 브런치 숲에서 나 홀로 소리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