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 전화 공포증
통화를 끊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었고, 해야 할 일은 있었지만 일의 양이 버겁지 않았다. 후배에게 뭔가를 물어도 볼 겸 전화를 걸었다. 일 얘기부터, 사람 얘기, 주식 얘기, 심지어는 오늘 본방사수를 해야 하는 드라마 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떠든 것 같진 않았으나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할 수 없어서 '다시 전화할게'라는 말과 함께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통화 시간이 무려 2시간 24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서로 헛웃음을 지으며 통화를 마쳤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문득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가수 산다라박이 자신이 지닌 공포증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콜포비아, 즉 전화 공포증에 대한 고백이었다. 콜포비아란, 벨 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전화를 할 때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중언부언을 하게 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콜포비아를 겪는 사람들의 경우 문자나 메일로는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막상 통화를 하게 되면 부담감과 공포심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된다고 한다.
통화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일을 하다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가 오면, 나 역시 발을 동동 거리며 전화를 선뜻 받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부재중 통화를 만든 뒤, 짧은 시간 안에 내가 해야 할 말과 상대를 설득시킬 멘트를 가볍게 메모해놓고 "죄송해요, 제가 잠깐 폰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등과 같은 변명과 함께 통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통화하는 내내 상대의 말과 나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이 대화를 이어가는데 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일 관련 통화를 할 때면 무조건 종이와 펜을 지참하는 편이다.
친한 작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썸을 타는 남자가 퇴근길에 자꾸 전화를 하는데 제발 카톡을 했으면 좋겠다고, 본인은 전화 공포증이 있는데 이 사람이 자꾸 전화를 걸어오니 호감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고. 그리고 친한 선배는 음식 주문을 할 때 어플 없이 전화로 주문을 하는 게 너무 떨린다고 했다. 차라리 안 먹고 말지, 전화로 주문하는 건 너무 두렵다고. 두 사례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통화가 귀찮거나 피곤한 수준이 아니라 그들은 진심으로 공포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썸을 타는 남자, 그리고 음식점 사장님은 두려워하거나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는 상대이지 않은가? 만약 썸남이 싫은데 자꾸 엉겨 붙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내 친구도 호감이 있었는데? 그냥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통화일 텐데, 또는 사귀는 사이처럼 오늘 하루 일과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 정도일 텐데 왜 잦은 통화가 호감도를 떨어뜨리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음식점 사장님은 그냥 주문을 받는 것뿐일 텐데 그게 왜 선배에게는 공포였을까? 물론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이 느끼는 공포가 있을 수 있기에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으므로, 나 역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저 나는 궁금했다. 내 친구와 선배, 그리고 산다라박이 느끼는 전화 공포증이라는 것이 내가 일을 할 때 아주 가끔씩 느끼는 부담감과 같은 것인지.
어쩌면 나는 우연히 생긴 통화 중 메모 습관으로 콜포비아를 이겨낸 걸지도 모른다. 콜포비아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미리 할 말을 써보는 것이라고 하던데, 내가 그리하고 있으니. 쓸데없다고 느낀 습관이 하나의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은 아닐지.
2시간 24분이나 통화를 하는 일이 나에게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물론 친한 사람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1시간씩 통화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오랜만에 연락이 온 지인과 통화를 하다 보면 지난 이야기를 다 들춰내느라 긴 시간 통화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당신이 좋고,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건 것뿐인데, 당신은 내가 건 전화벨 소리에 공포심을 느끼진 않았을지. 나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걱정이 앞서진 않았을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통화 가능해요?'라는 문자를 먼저 보내는 것이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