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통 나에게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일을 마무리 짓는 것, 재밌는 아이디어를 내고 잘 쓴 대본으로 방송을 만들 때 사용된다. 일적인 관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갖자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에게 책임감은 일보다는 사람 또는 동물에게 사용되는 단어였다.
그는 결혼을 급히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혼이라는 것은 가족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누군가를 부양하고 책임지는 것과 연결된다고 말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홀로 경제적 책임을 짊어지고 그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순간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 역시 단순한 피로감과 싫증, 무력감 등으로 일을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족 때문이다. 나 혼자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인생이 달린 문제라는 생각에 책임감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감을 이야기했다. 동물 중 강아지를 가장 좋아하지만 그저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키우다가 책임질 수 없는 순간이 왔다고 타인에게 입양을 보내거나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에 또 한 번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정말 무서워했다. 학교를 가는 길목에서 항상 나를 보고 짖던 큰 개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후에도 강아지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큰 개였고, 나를 물 것 같았다. 심할 때는 등교 거부를 하거나 엄마에게 학교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었다. 20대 중반까지도 강아지를 보면 피해 다니다가, 유기견 관련 프로그램을 하면서 강아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던 강아지를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내가 데려온 적이 있는데, 강아지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을 병원에서 탈출시켜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촬영장만 가면 나만 졸졸 쫓아다녀서 결국 퇴장을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으로 강아지도 감정이 있는 동물이라는 걸 알았고, 그 이후 강아지에 대한 애정이 급격하게 솟아올랐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학대받는 동물이나 유기견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감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은 모두가 느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감을 가져라.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꽤 좋아한다. 사람, 반려동물, 그리고 일, 모든 순간순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상황보다 과한 책임감을 부여받았다면 최대한 빠르게 판단해서 떨쳐내야 한다. 여기서 떨쳐내라는 것이 책임을 전가하라거나 도망치라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주 내내 정신없이 일만 한 나에게 오늘 하루는 휴식을 허락하고 싶었지만, 지금 노트북을 켠 것도 해주기로 했던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썼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건 기분 탓인가? 이 책임을 함께 나누어질 사람은 없는 것인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보는 건 어떨까? 헛소리 그만하고 찬물로 세수나 하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