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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1부

정자은행에 관한 흑빛 상상

by 인플리

구입한 정자가 배우 유혁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자마자, 리아의 온 신경이 공포로 뒤엉켰다. 그 정자와 자기 난자로 만든 배아를 자궁에 이식한 지 9일째였다.


그럼 누구 정자야.


최악의 정자 기증자가 떠올랐다. 유혁 주연의 영화 속 노숙자. 정자 브로커 엘리가 가장 쉽고, 싸게 정자를 얻어냈을 법한 남자였다.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다 발견한 생선 뼈를 보물처럼 들어 올려, 남은 살점을 구석구석 혀로 핥던 남자. 그런 남자의 정자를 받은 건 아닐까. 매스꺼웠다. 리아는 이른 태교 차 듣던 슈베르트의 「송어」를 껐다.


다 로아를 못 지킨 벌인가.


10년 전 유산한 딸을 둘러싼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웹툰 회사 취업을 준비하던 어느 날, 리아는 자취방 화장실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손에 들고 망연자실했다. 선명한 두 줄. 임신이었다. 대학 영화 연합동아리에서 만난 선배 기우와 연애한 지 약 2년째였다. 결혼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애가 먼저 생길 줄이야. 기우는 우는 리아를 다독였다.


어차피 가질 애였잖아. 남들보다 좀 빠른 것뿐이야.


긴 상의 끝에 결혼과 출산을 결심하자, 양가에선 배가 부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리라고 성화였다. 결혼식은 2달 뒤, 졸업식 주 주말에 올렸다. 둘의 결혼은 ‘속도위반’ 외 다른 의미로도 화제였다. 동아리 곳곳에서 이뤄진 비공식 외모 투표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해 온 둘이었기 때문이다. 한 후배는 ‘미리 보는 2세’ 앱으로 둘의 2세 얼굴을 만들어 동아리 지인들에게 비밀리에 뿌렸다. 남녀의 사진을 업로드하면 각 얼굴의 특징을 합성해 가상의 자녀 얼굴을 만들어주는 앱이었다. 모바일 청첩장의 화보 사진이 재료로 쓰였다고 했다. 리아의 커다란 눈과 뽀얀 피부, 기우의 오뚝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을 닮았다는 아이 사진은 ‘축복받은 유전자’라 불리며 여러 채팅방에 뿌려졌다.


주책들이야 진짜.


리아는 사진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부모까지 나서서 아이 얼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건 꺼림칙했다. 아이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예쁘고 잘생기면 더 사랑해주고, 아니면 덜 사랑할 것도 아니잖아. 기우는 동아리 친구가 갑자기 눈앞에 사진을 들이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이 얼굴을 봤다며 리아에게 말했다.


근데 그렇게 예쁜 애 처음 봤어. 우리 애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니까?


기우는 그 이후로 리아의 배를 흐뭇하게 보곤 했다. 리아는 그런 반응이 싫진 않았다.


어려울 것은 예상했지만, 임신 9주 차로 시작한 신혼생활은 둘에게 생각보다 더 순탄치 않았다. 기우는 호르몬 변화로 감정 기복이 심해진 리아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리아는 회사 스트레스 때문이라곤 하지만, 자신에게 말도 잘 걸지 않는 기우를 딴사람처럼 느꼈다. 입덧이 심해져 예민해진 리아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직장생활의 고충까지 짊어지느라 술이 는 기우는 자주 부딪혔다. 신혼엔 서서히 금이 갔다. 둘 사이의 대화는 누가 더 힘든지를 겨루는 대회가 되곤 했다.


술 좀 그만 마셔.

힘들어서 그래. 니가 회사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임신은 뭐 쉬워?

뭐라고?

나도 술이라도 마실 수 있음 좋겠어. 스트레스 좀 풀게.


리아는 임신 19주 차엔 갑작스러운 자궁수축으로 입원까지 했다. 하필 기우가 지방 출장으로 집을 비운 때였다. 리아는 기우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기우에겐 입원을 숨겼다. 자궁수축억제제 투여, 태동 검사, 식사를 쳇바퀴 돌 듯 혼자 2박 3일간 반복하는 동안 우울감이 깊어졌다. 누워서 쉬다가 한때 입사를 준비했던 웹툰 회사의 신입 사원 인터뷰 기사를 본 순간엔 더 어두운 구멍으로 처박히는 기분을 느꼈다.


남들은 다 잘 해내는데 난 왜······


리아는 참다 참다 퇴원하는 날 아침, 기우에게 입원 사실을 털어놓았다. 저녁에 온다던 기우는 오후 2시쯤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리아는 기우를 보자 눈물이 터졌다. 기우는 우는 리아를 안고 말했다.


아이고, 얼마나 예쁜 딸이 나오려고 엄마를 이렇게 괴롭히나.


기우가 퇴원 수속을 하러 병원 수납창구에 간 사이, 기우가 놓고 간 핸드폰에 ‘거래처’란 이름의 전화가 왔다. 짐을 싸던 리아는 전화를 받지 않으려다가, 일찍 온 기우가 마무리 못한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어머님 수술은 잘 됐어?

······누구세요?

어? 저 기우 씨 여자친군데요, 가족분이신가요?

저 정기우 아내인데요, 뭐라구요?


리아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거래처’는 기우가 자신을 유부남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며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알고 보니 기우가 양쪽을 속였는데, 리아에겐 내연녀와의 여행을 ‘출장’으로, 내연녀에겐 리아의 입원을 ‘엄마의 응급수술’로 각각 둘러댄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메신저 앱에서 둘의 채팅방을 살펴보니 기우가 이번 ‘출장’을 치밀하게 준비해 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우는 ‘커플 호캉스 추천호텔 BEST 5’, ‘데이트하기 좋은 와인 바’, ‘커플 마사지 오일’ 등의 ‘안건’을 ‘거래처’와 수시로 논의했다. 6주 전쯤, ‘거래처’의 생일 기념으로 둘이 호텔 코스요리를 즐기는 사진을 보자 리아는 소름이 끼쳤다. 그날은 리아가 입덧 때문에 종일 귤만 먹고 버틴 날이었다.


신혼은 산산조각이 났다. 집에 돌아온 날, 기우의 애원과 리아의 고성만 집안에 가득 찼다. 리아는 아랫배를 차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는 로아에게 미안했다. 분을 못 이겨 욕을 내뱉을 때마다 후련함보다는 죄책감이 더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로아에게 귀마개를 씌워주고 싶었다.

너까지 이 지옥을 다 겪게 해서 미안해······


리아는 로아를 혼자 키우기로 다짐하고 이혼을 준비했다. 그런데 임신 21주 차의 새벽, 리아는 심한 복통을 느꼈다. 왈칵, 하혈한 후 급하게 응급실을 찼았는데 결국 일이 터졌다. 유산이었다.


너가 죽였어. 로아 너가 죽였다고!


기우는 응급실 복도에 얼빠진 채 서 있었다. 리아는 기우를 평생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한 지 약 4개월 만에 둘은 갈라섰다.


기우가 먼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리아의 짐 정리를 도우러 중학교 단짝인 채희와 연지가 찾아왔다. 둘은 결혼식 사진이 치워진 텅 빈 거실 벽을 모른 체했다. 리아가 화분처럼 큼직한 짐을 정리하는 동안 옷은 손이 야무진 채희가 정리했다. 채희는 리아가 버리려고 한쪽에 모아 둔 임부복 더미를 의류 수거함에 재빨리 넣고 왔다. 성격이 차분한 연지는 조명처럼 조심히 다뤄야 하는 소품을 정리했다. 연지는 로아의 초음파 사진이 담긴 리아의 태교 일기가 구겨지지 않도록, 화장품 상자 안에 일기를 넣은 후 이사 박스에 담았다. 짐 정리는 저녁 8시쯤 끝났다. 셋은 집 앞 술집으로 향했다. 홀가분하다는 리아를 위로하며, 셋은 술잔을 여러 번 비웠다. 채희는 새벽에 리아보다 더 많이 취해 꼬부라진 혀로 소리를 질러댔다.


나 기우 개쒜끼 처음부터 시뤄쒀! 야 이혼 추카한다!


채희는 안주로 나온 계란찜 한가운데에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듯이 나무 젓가락을 꽂았다. 그리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이혼 추우카아합뉘다. 이이호온 추후카합뉘다, 싸뢍하는 안.리.아. 이혼 추카합뉘다······


1년 뒤, 리아는 사원 10명 규모의 작은 웹툰 에이전시에 PD로 입사했다. 일단 업계에 발을 들여 경험을 쌓고, 큰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 목표였다. 리아는 관계에서 다친 마음을 일로 회복하기로 마음먹고 일에 매진했다. 꼼꼼한 피드백으로 웹툰 작가가 작품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게 돕는 것은 물론, 시장 트렌드에 맞는 마케팅 기획에도 적극 참여했다. 덕분에 담당 웹툰의 조회 수는 크게 올랐다.

수출이 결정된 한 웹툰의 해외 판권 계약서를 검토하던 날이었다. 리아는 탕비실을 지나다 열린 문틈으로 우연히 팀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리아 씨 얘기 들었지?

응. 불륜에 이혼에 유산까지. 어떻게 그렇게 복도 없냐.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그래도 불륜남 애 유산된 건 다행 아냐?


리아는 팀원들의 이중성에 치가 떨렸다. 전날 회식 자리에서 어렵게 사정을 털어놓았을 때, 요즘 세상엔 그런 일들은 흔하다며 위로하던 팀원들이었다. 리아는 휴게실로 가서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잔인한 말이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싸맸던 서러움이 터져 나오게 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니들이 로아 초음파 사진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딴 소리는 입에 담지도 못해······


리아는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어묵탕과 맥주, 소주를 샀다. 집에 돌아와 어묵탕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는데 눈물이 또 쏟아졌다. 로아가 떠난 배를 만지다가는 얼굴이 벌게지게 울었다. 술을 연거푸 들이켰고, 결국 토했다. 한참 후, 리아는 식은 어묵 국물로 속을 달래며 다짐했다.


두고 봐. 너네보단 잘 되고 만다.


리아는 일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독기를 품고 일에 매달렸다. 3년 차 땐 담당 웹툰이 플랫폼 최고의 흥행 성적을 냈고, 연말에 VIP 사원상도 받았다. 칭찬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리아를 흉보았던 팀원 중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리아를 추켜세웠다. 순전히 성과를 잘 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불륜, 이혼, 유산을 겪고 나서도 이렇게 성과를 낸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이란 걸 알았지만, 리아는 이제 알았냐며 능청스럽게 칭찬을 받아주었다.


리아는 4년 차 땐 스카웃 제의를 통해 대형 웹툰 회사에 이직했다. 성과를 인정받아 3년 후엔 팀장으로 승진도 했다.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겠다는 제의도 종종 받았지만 리아는 거절했다. 연애도, 재혼도 생각이 없었다. 또 남자 때문에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비혼을 선언한 채희와 함께 연지의 결혼식에 갔을 때도, 리아는 연지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연지가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지 말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랐다.


2년 뒤, 리아는 채희와 함께 아들을 낳은 연지네 집에 찾아갔다. 채희와 같이 고른 아기 옷 선물을 들고 벨을 눌렀다. 곧 현관문이 열렸는데, 아기를 안은 연지가 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기는 남편을 쏙 빼닮아 있었다. 채희가 킬킬거렸다.


넌 어떻게 니 남편을 낳았냐?

첫애가 원래 아빠 많이 닮잖아.


리아는 연지 품에 안긴 단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웹툰 캐릭터 뺨치는 4등신, 앙증맞은 입술, 완두콩 5형제처럼 붙어있는 발가락······ 어쩜 이렇게 까무러치게 귀여울까.


리아는 단이 앞에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까꿍, 하며 단이를 보는 장난을 쳤다. 단이가 반달 모양으로 눈을 감으며 까르륵, 웃었다. 지난 1주일을 통째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연지가 엄마한테도 잘 안 보여주는 웃음이라며 리아가 아이를 볼 줄 안다며 칭찬했다. 채희가 자기도 해보겠다고 나섰다. 리아와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가 단이를 보았는데, 단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셋은 동시에 웃었다. 리아는 문득, 초음파로만 봤던 로아 얼굴을 떠올렸다.


로아도 진짜 예뻤을텐데.


연지가 리아의 얼굴에 스친 슬픔을 눈치챈 듯 조심스레 말했다.


근데 애기 낳기까지 진짜 쉽지 않더라. 우린 임신 시험관 6차 때 겨우 성공했어.


채희가 놀란 눈을 했다.


그거 한 번만 해도 힘들잖아. 우리 언니도 얼마 전에 해서 알거든.

응. 6차는 진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했어. 매일 과배란 주사 두 번 맞는데, 맞고 나면 배 빵빵해지고 욱신거리고······ 완전 죽을 맛.


리아가 연지 등을 토닥였다.


고생 많았겠네.

응. 그래도 우린 난자나 정자에 문제는 없어서 다행이었지. 내 친구는 이상 난자라 진 클리닉까지 갔거든.

진 클리닉?


리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응. 진은 유전자 ‘gene’에서 따온 건데, 난자나 정자 매매하고 임신도 도와주는 데래.


채희가 물었다.


그거 정자은행 같은 거야?

응.

그거 우리나라에선 불법 아냐?


아, 3년 전에 합법화됐어. 원래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서 불법으로 알음알음 정자나 난자 구하는 불임부부는 많았거든? 보통 브로커 끼고 기증자랑 거래하는데, 비싼 정자는 몇천만 원 한대나.


채희가 입을 쩍 벌렸다.


드럽게 비싸네.

그래서 사기꾼들이 돈 냄새 맡고 몰렸대. 불임부부한테 자식이 절실한 걸 악용해서 몇 천씩 뜯고······ 불법이라 보상 못 받는 피해자들이 너무 늘어나니까 정부가 진 매매를 정식으로 허용하고 제도로 만든 거 같아.


채희가 비꼬았다.


정부가 진짜 피해자 위한답시고 제도화했겠어? 출산율 높이는 데 도움 되니까 제도로 정착시킨 거지.


리아는 진 클리닉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거 불임부부만 이용할 수 있어?

아니. 나이, 소득 같은 기준만 충족되면 미혼모나 동성 부부한테도 열려 있댔어. 잠깐, 얘 배고픈가 봐.


갑자기 칭얼대는 단이를 보고 연지가 부엌으로 젖병을 가지러 갔다. 리아의 머릿속에 진 클리닉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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