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은행에 관한 흑빛 상상
위에 안 보여요?
상담실 윗벽에 각종 협약서와 인증서가 담긴 액자가 주르륵 걸려 있었다.
여기 유명 대학병원 불임클리닉이랑도 협약 맺고 거의 VIP 상대로 사업하는 데야. 이런 데서 사기 치면 철컹철컹 시간 문제지.
엘리는 양쪽 손목을 모으며 수갑을 찬 채 어딘가 끌려가는 시늉을 했다. 마음 한쪽이 여전히 찜찜했지만, 리아는 유혁 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유혁 진은 얼마예요?
이천.
네에?
다른 진도 비싼 건 천 중반쯤 해.
그래도 너무 비싼데요?
탑 클래스 연예인 진이잖아. 이 정도면 헐값이지.
엘리는 다시 태블릿을 켜며 말했다.
리아 씨가 수입이 좀 되니까 권해본 거야. 부담되면 여기서 골라도 좋아요.
엘리는 리아가 홈페이지에서 골랐던 진들과 비슷한 스펙의 진 여러 개를 화면에 띄워주었다. 가격은 900만 원에서 1천만 원 초반대였다. 리아는 그 중엔 20대 중반의 명문대 치대생 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프로필에 키 185cm, 몸무게 77kg, 술은 즐기지 않고 흡연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며, 유전 질병에 대한 가족력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아기 때 사진을 보니 하얀 피부와 큰 눈이 돋보였다.
그래, 그 진도 어디 빠지진 않지.
엘리가 얄궂게 덧붙였다.
외모는 유혁이 독보적이지만.
흠. 이 치대생 진은 얼마에요?
천백.
엘리는 생각에 잠긴 리아에게 제안했다.
근데 만약 리아 씨가 한다고 하면, 유혁 진은 내가 가격 좀 더 빼 드릴 순 있어.
얼마까지요?
엘리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내가 우리 회사 우수 매니저거든? 내 재량으로 특별히 15% 추가 디씨를 해줄 수 있어. 매달 선착순 다섯 명만 해주는 건데 지금 딱 한 자리 남았어. 그거 적용하면 천칠백. 임신 전까진 일단 계약금 10%만 내면 돼.
엘리는 곧 다음 상담 시간이라며 자리를 정리했다.
고민해보고, 다음 주 2차 상담 때까지만 진 정해서 알려줘요. 내가 특별히 유혁 진은 그때까진 딴사람 안 주고 킵해줄게.
리아는 원래 유혁 진을 절대 선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유혁 진은 할인가도 소형 SUV 한 대 가격과 맞먹었다. 치대생의 진보다 무려 육백오십오만 원이나 더 비쌌다.
그런데 리아의 머리는 아무리 ‘명문대 치대생’을 향해도, 마음은 ‘유혁’에 눌러앉아 있었다. 이성적인 예산 계획은 유혁의 눈웃음 앞에서 무력해졌다. 한동안 소비를 좀 줄이면 괜찮지 않을까. 엘리 재량으로 삼백만 원이나 특별 할인받을 기회도 놓치기 아까웠다.
2차 상담 전날까지도 리아는 혼자 진 고민에 끙끙댔다. 기밀 유지 서약 때문에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때 채희, 연지와 함께 있던 그룹채팅방의 알림이 울렸다.
연지야, 넌 태교 음악 뭐 들었어?
갑자기 태교 음악은 왜?
울 언니도 임신 성공!
꺅!! 완전 축하해!
고마워. 언니가 너한테 태교 음악 추천 좀 받아달래서.
흠 난 숭어 많이 들었는데, 클래식이면 다 무난해.
채희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답했다.
야, 숭어가 아니라 송어라는데?
채희가 ‘음악 교과서에도 제목이 잘못 적혀있는 가곡’이란 제목의 블로그 글을 공유했다. 글을 쓴 사람은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작곡가 슈베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는 바다가 없는데, 숭어는 바닷물고기이고, 송어는 민물고기이므로 슈베르트가 영감을 받은 물고기는 송어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추가 근거로 원곡 노래 가사도 적혀 있었다.
반짝이는 개울 속으로 기쁜 마음에 재빨리 낚싯대를 던졌다네.
변덕스러운 송어 한 마리가 마치 화살처럼 피했다네.
숭어와 송어의 비교 사진을 보니 제목으로 송어가 맞다는 게 더 납득되었다. 숭어는 납작 눌린 듯한 얼굴에 비죽 내민 입술은 흉하고 두꺼웠다. 송어는 늘씬한 유선형 몸통에 뺨에서 몸통 가운데로 영롱한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리아는 글을 더 내려 보다가 선택을 계시하는 듯한 문장을 만났다.
송어랑 숭어는 종자가 아예 다르죠.
리아에게 ‘ㅗ’와 ‘ㅜ’의 차이는 평생 좁혀지지 않는 태생의 차이이자, 생 전체의 차이로 읽혔다. 송어에겐 숭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매력이 있듯이, 유혁한테도 명문대 치대생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특출함이 있잖아. 아이를 세계적인 셀럽으로 만들어 줄지 모를 천부적인 끼와 예술적 재능을 천칠백만 원에 얻을 수 있다는 건 인생에서 다시 만나기 힘든 행운이 아닐까. 리아는 어차피 정자를 가려서 임신할 수 있게 된 이상, 최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낳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째가 아빠를 많이 닮는다는 건 연지의 첫아들 단이를 통해서도 증명되었으니, 정자는 중요했다. 리아는 시험삼아 ‘미리 보는 2세’ 앱에 자신과 유혁의 얼굴을 넣어보았다. 기저귀 광고에 나올 법한 예쁜 아이가 화면에 떴다. 유혁의 눈웃음과 리아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쏙 빼닮은, 너무 예쁜 아이였다.
리아가 들떠 있는데 채팅방 알람이 또 울렸다. 연지가 채팅방에 단이의 첫 뒤집기 영상을 올린 것이었다. 리아는 영상을 확대해서 보다가 생각했다.
근데 단이는 눈이 좀 작네.
전에는 세상 귀엽게만 보이던 단이 얼굴에서 단점들이 하나 둘 보였다. 단이는 얼굴도 좀 넙데데한 것 같았다. 리아는 자신과 유혁의 가상 2세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며 흐뭇해했다.
유혁 진으로 할게요.
2차 상담일, 리아의 결심을 들은 엘리는 후회 없는 선택을 한 거라며 리아를 격려했다. 리아는 바로 계약금 백칠십만 원을 입금했다. 잔금 천오백삼십만 원은 출산한 뒤 3일 내로 입금하기로 했다. 아빠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으며, 이를 어길 시 최소 50억 원을 배상한다는 추가 계약 내용에도 서명했다.
채취한 난자와 정자를 배양접시에서 수정시킵니다.
집에 돌아와 엘리가 공유해 준 시험관아기 시술 안내 동영상을 보던 리아는 기분이 묘했다. 과학 교과서 톤의 2D 그래픽으로, 일말의 로맨틱함도 없는 임신 과정이 나열되고 있었다. 체외수정 파트에서는 침대 위에서 달아오른 채 서로를 바라보는 남녀 대신, 샬레 위에서 난자 주위를 헤엄치는 표정 없는 정자 무리가 보였다. 리아는 눈을 감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무드 등 불빛이 은은히 퍼진 침실,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유혁, 조심스러웠다가 점점 격정적으로 변하는 키스, 침대 밑에 하나둘 떨어지는 옷, 가빠지는 숨, 삽입, 방안에 울리는 신음소리, 절정······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성우 나레이션이 들렸다.
이제 선별된 수정란을 관을 통해 자궁 안에 이식합니다.
건조한 나레이션은 달콤한 상상에 빠진 리아의 머리채를 단숨에 잡아채 현실에 내동댕이쳤다.
드디어 착상 날이 다가왔다. 난자를 채취하고, 자궁내막을 두껍게 해주는 약을 먹으며 착상 적기를 기다린 지 1달쯤 후, 리아는 연차를 내고 원 퍼센트 진에서 연계해 준 산부인과로 향했다. 금요일 오후 2시였다. 착상이 잘 돼야 할 텐데. 리아는 초조했다. 곧 안내받은 대기실에 누워 착상을 돕는 수액을 맞았다. 긴장감이 온몸에 퍼져 진정되지 않았다. 40분 뒤, 시술실에서 배아 2개를 이식했다. 초음파모니터로 이식되는 배아가 보였고, 곧 자궁 안에 하얀 점 2개가 생겨났다.
유혁 정자가 내 몸에 들어올 줄이야.
의사는 시술이 잘 되었다고 했다.
착상이 잘 됐는지는 한 10일째쯤, 임신테스트기로 확인하실 수 있어요. 빠르면 9일 째에도 결과 뜨구요. 꼭 절대안정 취하세요.
리아는 주말 내내 집에 누워 있었다. 의사가 작은 충격에도 배아가 자궁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모든 동작의 속도를 줄이며 조심했다. 핸드폰으로 유혁에 관한 각종 기사와 영상을 훑으며 시간을 보냈다. 데뷔 전, 5년간의 긴 연습생 생활이 암흑기였다는 유혁의 인터뷰도 발견했다. 당시 유혁은 21살이었다. 엘리와 거래를 했을 거라 추측되는 시기였다.
리아는 아이의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유혁처럼 아티스트가 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줘야지. 리아는 한국, 미국, 유럽, 동남아 등에서 온 수만 명의 팬에게 둘러싸여 공연하는 아이 모습을 그려보았다. 마음이 벅찼다. 김칫국이었지만, 상상은 ‘스타의 어머니를 만나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하는 장면까지 흘러갔다. 리아는 육아 비결을 덤덤하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가 한 일은 아이를 믿어준 것 뿐이에요.
아이의 ‘급’에 맞게, 생활환경도 업그레이드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할까. ‘송어는 1급수의 물에만 생활한다’라는, 블로그 글 속 문장도 문득 떠올랐다.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아이를 키워야 재능이 더 훌륭하게 발현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예체능 선생님을 모실 수 있게 돈도 더 열심히 벌어야지. 리아는 의욕이 샘솟았다. 진 클리닉 이용자가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쯤엔 진 클리닉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자연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미래엔 ‘아빠 없이 자란 아이’에 대한 편견도 좀 줄어 들겠지.
리아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진 클리닉에서 우수한 정자 기증자의 유전자 가격이 치솟고 있다는 기사도 여럿 있었다.
휴, 유혁 진 일찍 사길 잘했네.
리아는 안도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지낸 지 9일째인 일요일, 점심쯤 눈을 뜬 리아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전날 밤 꿈이 태몽인 것 같았다. 강에서 친구들과 물고기 잡기 시합을 하는데, 리아의 어망에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들어왔다. 리아가 양손으로 움켜쥐자 미끌미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물고기는 세차게 팔딱였다. 물이 사방으로 튀는 바람에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뺨에 붉은 동그라미가 있지 않았나?
리아는 인터넷에서 물고기 사진을 훑다가 그 물고기가 송어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쪽이 기분이 좋았다. 배에선 아직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착상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리아는 슈베르트의「송어」를 틀고 누워서 음가를 흥얼거렸다. 라 레레, 파파, 레에, 라라, 라아, 라 미레도시 라······ 메모 앱을 켰다. 제목에 ‘태몽’이라 적고 꿈 내용을 적다 궁금증이 생겼다.
유혁 태몽은 뭐였을까?
리아는 검색창에 ‘유혁 태몽’을 입력하려 했다. 그런데 ‘ㅌ’을 치기도 전에, 아찔한 연관검색어를 발견했다.
유혁 사칭 정자 매매 파문
리아는 너무 놀라 핸드폰을 코 위로 떨어뜨렸다. 얼얼한 콧등을 문지르며 살펴보니 연예 전문 매체 ‘올어바웃셀럽’에서 오전에 낸 특종이 떴다. 유혁이 연습생 시절 불법으로 정자를 매매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기사였다. 약 1시간 전부터 반박 기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유명 아티스트의 유전자를 연예 기획사 실장 등을 사칭해 매매해 온 사기꾼 일당을 경찰이 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종이 뜬 후, 진 클리닉에서 비슷한 매매를 제안 받았다는 여성들의 제보가 이어지며 특종이 오보였단 게 밝혀졌다고 했다. 유혁 소속사도 입장문을 냈다.
저희 소속사는 별도 책정된 신인개발비로 쭉 아티스트를 육성해왔습니다. 연습생에겐 합숙 및 트레이닝 비용을 일체 지원하므로, 유혁이 연습생 시절 돈을 벌기 위해 거액의 정자 매매를 해야 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끼 많은 친구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저희 소속사는 앞으로도 아티스트 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배우 유혁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를 삼가시길 바라며, 명예훼손 발생 시 모든 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강력히 대응할 것입니다.
유혁의 SNS에도 유혁이 직접 작성한 입장문이 떠 있었다.
저는 결코 정자 거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악성 루머 작성 및 배포 행위엔 어떠한 선처나 합의 없이 강경하게 대응하겠습니다.
리아가 「송어」를 꺼 적막해진 침실. 엘리도, 원 퍼센트 진도, 산부인과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리아는 공포감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숨도 제대로 안 쉬어졌다. 신원 불명의 정자가 자궁부터 시작해 온몸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리아는 배아를 토해내고 싶었다. 아니면 자궁 속에 숟가락이라도 집어넣어 배아를 긁어내고 싶었다. 심호흡하다가, 리아는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빠르면 9일째에도 착상 결과 뜬다고 했지?
리아는 임신테스트기를 황급히 꺼내, 소변을 보았다. 테스트기를 욕조 위에 두고 결과를 기다리는 5분간, 혈관 하나하나가 옥죄어왔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머릿속은 쑥대밭이었다.
두 줄 나오면 어떡하지······ 낙태해야 하나? 어디서? 어떻게? 근데 애는 무슨 죄야······ 불쌍해······ 근데 그렇다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를 어떻게 낳아······ 근데 낙태하면 몸은 괜찮을까? 휴유증 때문에 다음에 애 못 가지게 되면 어떡하지?
‘스타의 어머니’는커녕, 제보 프로그램 속 ‘피해자 여성’으로 처지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 꿈속 물고기가 숭어였나 봐.
길한 태몽은 악몽으로 전락했다. 5분 뒤, 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임신테스트기의 검사표시창을 확인했다.
제발······
선명한 세로 한 줄이 먼저 떴다.
제발 그쳐······ 제발······
그리고 더는 줄이 뜨지 않았다. 리아는 긴장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다음날 또 테스트를 해봐야 결과가 확실해질 것이었지만, 착상이 안 된 것 같았다.
잠을 설친 리아는 다음날 새벽, 첫 소변으로 또 테스트했다. 마찬가지로 한 줄이었다.
살았다······
리아는 일단 몸을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엘리 이 미친 년······ 정신 좀 들면 경찰에 신고하고, 계약금 환수 방법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두고 봐.
리아는 빨리 허기를 달랠 음식을 찾기 위해 부엌 찬장을 열었다. 컵라면을 꺼내려는데 옆에 있는 즉석 미역국밥이 눈에 들어왔다. 집밥만큼 맛과 영양이 깊진 않더라도, 몸조리를 위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는 조리한 미역국밥에 반찬 두어 개를 곁들여 상을 차렸다. 국물 위에 뜬 참기름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리아는 신원 불명 정자를 가졌던 배아의 명복을 빌며, 국물을 한 숟갈 떠서 후 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