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리아는 단이의 아기 냄새가 그리웠다. 부드럽고 따뜻한 볼살 촉감도, 자신을 빤히 보던 까만 구슬 같은 눈동자도 자꾸 생각났다.
로아도 태어났으면 단이처럼, 아니 단이보다 더 예뻤겠지?
리아는 못 잊을까 봐 평생 안 보기로 결심했던 로아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긴 고민 끝에 리아는 옛날에 동아리 후배가 썼다던 앱을 다운로드했다.
어차피 앱으로 만든 가상 얼굴이잖아. 실제로 그 얼굴이 아닐 확률이 높았으니까. 집착하지 말기로 하고 그냥 보자.
리아는 클라우드에서 찾은 웨딩 화보 사진을 후배가 썼다던 앱에 넣었다. 화면에 뜬 아기를 보고 리아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여태껏 본 그 어떤 아기보다 예쁜 아기가 화면에 떴다. 뽀얀 피부에 눈이 초롱초롱했고 야무지게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아기는 리아의 아기 때 얼굴을 많이 닮아 있었다. 화면 속 아기 볼을 만지며 리아는 또 울었다. 안고 싶지만, 안을 수 없는 아기였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리아의 마음에 아기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리아는 한번 둘러나 보자는 생각으로, 진 클리닉을 검색했다. ‘대한민국 최상위 1%의 진’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원 퍼센트 진’이 눈에 들어왔다. 홈페이지의 ‘정자 기증자’ 탭을 클릭하자, 아기 때 사진과 일부 스펙이 모자이크 처리된 수십 명의 프로필이 펼쳐졌다.
와······ 스펙 장난 아니네.
학벌과 직업뿐 아니라 외모와 IQ까지 뛰어난 남자들이 가득했다. 이런 남자들이 왜 정자를 기증하지. 의심하던 리아는 ‘비혼주의’, ‘딩크족’ 등의 기증 사유를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필을 읽을수록 스펙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졌다.
학벌은 최소 국내 의대 아니면 외국 대학이면 좋겠다. 키는 175 이상만······ 어?
화면 중앙에 갑자기 큰 팝업창이 떴다. 제시되는 10개의 샘플 진 중 마음에 드는 3개의 진을 고르면, AI가 선호 진 타입을 빠르게 진단해준다고 했다. 리아는 신중히 3개의 진을 골랐다.
진 02 : 23세 / 키 181㎝ / 몸무게 73kg / 호감형 외모 / 직업 의대생 / 서울 명문 의대 재학 중(학과 대표) /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진 06 : 27세 / 키 187㎝ / 몸무게 70kg / 이국적 외모 / 직업 패션 디자이너 / 프랑스 유명 패션스쿨 졸업 / 자기관리 철저. 비건주의자
진 07 : 29세 / 키 176㎝ / 몸무게 68kg / 서글서글한 외모 / 직업 CEO / 미국 아이비리그 MBA 졸업. 아버지 국내 최고 식품업계 사장
‘스마트하고 적극적인 성향을 지닌 기증자의 진 타입 선호’라는 진단 결과가 떴다. 결과 아래엔 ‘진의 가격과 구체적인 매매 절차는 매니저와의 1:1 대면 상담을 통해서만 안내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뛰어난 진 스펙을 보자 리아는 이왕 낳을 아기면 좋은 면면을 가진 남자의 우수한 진을 가진 아기를 낳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격과 절차가 궁금해진 리아는 상담을 예약했다. 가장 빠른 상담 시간은 3주 뒤 토요일 14~15시였다. 오래 대기해야 하는 건 불만스러웠지만, ‘심도 있는 상담을 진행해 하루 상담 건수가 적습니다. 대기가 길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란 설명에 신뢰가 갔다.
3주 뒤. 원 퍼센트 진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대리석 바닥 위에 금색 테두리를 두른 화이트 톤의 안내 데스크가 놓여 있었고, 이국적인 디자인의 화분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직원을 따라 상담실 3으로 이동했다. 검정 투피스 정장을 갖춰 입고 아이보리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한 여성이 웃으며 리아를 맞이했다.
리아 씨? 반가워. 앉아요.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은근히 사람을 제압하는 말투였다. 그녀는 자신을 매니저—예전엔 ‘브로커’라 불렸는데 어감이 좀 그렇잖아요?— ‘엘리’라고 소개했다. 엘리는 상담신청서를 먼저 작성해달라고 했다. 이름, 생년월일, 직업, 소득 수준을 적고 결혼 여부엔 ‘이혼’, 임신 경험엔 ‘유’와 ‘유산’ 두 군데에 체크했다. ‘상담 내용은 가족, 친구, 지인 등 누구에게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며, 어길 시 최소 5천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합니다’라는 서약에 서명도 했다.
신청서를 넘겨받은 엘리는 체크 항목만 봐도 인생사를 다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아 씨, 삶이란 게 참 내 맘 같지 않죠? 나도 어려움이 많았어요. 암튼 이렇게 온 거 정말 잘한 일이라고 등 두들겨 주고 싶네.
엘리는 슬며시 웃더니 의자를 바싹 붙여 앉으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지금부터 날 매니저가 아니라 리아 씨 친언니라 생각해. 이쁜 아이 가지려면 제일 중요한 게 사실 서로 솔직한 사이가 되는 거거든. 내가 진 구입부터 임신, 출산까지, 전 과정을 확실하게 성공시키려면 리아 씨에 대해서 잘 알아야 대응을 잘 할 수 있어. 자, 체크한 내용이나 건강상태를 좀 구체적으로 말해줄래요?
리아는 엘리가 ‘꾼’ 같은 말투를 가진 것은 거슬렸지만, 한 편으론 ‘내 맘 같지 않은 삶’이란 표현이 위로가 되었다. 리아는 경계심을 완전히 풀진 않은 채로, 엘리에게 개인사와 방문 경위를 최대한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로아 이야기를 할 땐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보니 엘리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에휴, 나도 그 마음 알아. 첫애 천사 품에 보냈거든.
리아는 같은 사연이 있다는 말에 엘리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유산 경험 있어도 예쁜 아기 만나시는 분들 많으니까 걱정 말구.
엘리는 태블릿에 리아의 선호 진 진단 결과를 띄우며 말했다.
자, 이제 밝은 미래에만 집중하자구. 알았죠? 선호 진 타입은 스마트하고 적극적인 진이라고 나왔네?
네.
일단 머리는 좋아야겠고, 리더십도 있으면서······
엘리는 익살스레 덧붙였다.
잘생기기까지 하면 금상첨화죠?
바로 네, 대답하는 리아를 보고 엘리가 씨익 웃었다.
그럴 만해. 리아 씨 미모에 남자 쪽 훈훈함까지 더하면 애가 얼마나 이쁘겠어.
엘리가 검지로 얼굴 윤곽을 따라 원을 그리며 속삭였다.
사실 이 원판은 진짜 중요해. 성적은 좋은 선생님 붙이면 쑥쑥 오르지만, 얼굴은 좋은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도 한계가 있는 거 알죠?
보통 꾼이 아닌 말투로 너스레를 떠는 엘리를 보며 리아는 피식 웃었다.
어어, 저기, 예비 엄마. 웃을 일 아냐. 요즘은 성형비보다 과외비가 싸게 먹힌다니까?
현실적으로 그렇긴 하죠.
리아의 반응을 살피다, 엘리는 갑자기 태블릿 화면을 끄며 은밀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엘리는 목소리를 확 낮추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진 훈남 진이 몇 개 있어. 옛날에 대형 연예 기획사 실장으로 일할 때 연습생 애들한테 받은 거. 아이돌은 뜨기 전에 보통 연습생 생활 몇 년씩 하는 거 알죠? 그때 돈 무지막지하게 깨져. 얼굴 갈아엎고, 보컬이랑 연기 트레이닝 받느라. 부모 빽이나 스폰 없는 애들은 돈 벌려고 쇼핑몰 모델, 영화 스텝 등등 알바 엄청 뛰는데, 보기 안쓰러웠지. 근데 마침 내 친구 중에 불임클리닉 하는 애가 있었는데, 걔가 건강한 정자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숨을 푹푹 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철저하게 기밀 유지하는 조건으로 친구랑 연습생 애들 연결해줬지. 애들은 수백 벌고, 불임부부는 애 갖고. 서로 윈윈이잖아.
리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자 엘리가 말했다.
리아 씨, SNS로 요즘 애기 사진 본 적 있어?
자주 보죠.
이쁜 애기들 많지?
네.
난 그중에 그런 연습생 친구들 정자로 태어난 애들도 꽤 많을 거라고 봐.
곱씹어보니 요즘 SNS엔 유난히 모델 같이 예쁘고 잘생긴 아기가 많았다. 신생아인데 성형을 했을 린 없었다. 몰랐던 어둠의 세계가 밝혀지면서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 내가 정자 받았던 애 중에 완전 빵 뜬 애도 있어.
누군데요?
엘리가 핸드폰 사진 갤러리를 한참 과거로 넘겨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엘리 옆에 선 앳된 꽃 미모의 남성을 보고 리아는 깜짝 놀랐다.
어? 유혁이잖아요!
유혁은 리아가 고등학생 때 열렬한 팬이었던 5인조 보이그룹 ‘T.A.S’의 래퍼였다. 매력 포인트는 눈웃음. 리아는 유혁의 사진을 방 벽에 도배하고, 암표까지 사 가며 콘서트를 따라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팬심은 예전만 못했지만, 그룹 해체 직후 연기자로 전향한 유혁의 대표작은 꿰고 있었다. 유혁은 ‘아이돌 출신’ 꼬리표를 일찍 떼더니 7년간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남자신인상, 남우조연상에 이어 작년엔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해 이목을 끌었다. 최근 유혁이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았다는 기사도 떴다.
정자는 유혁 20대 초반쯤 받아둔 거야. 상태엔 이상 없어. 쭉 질소냉동으로 보관 했어서.
엘리는 T.A.S.가 소속된 연예 기획사의 실장 명함도 보여주었다. 리아는 그래도 여전히 엘리가 의심스러웠다.
근데 갖고 계신 정자가 진짜 유혁 거란 걸 어떻게 믿어요?
엘리는 능청스레 웃으며 답했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