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영감에 관한 흑빛 상상
3. <라푼젤>의 라푼젤 아버지의 티타임
갓 태어난 라푼젤을 마녀에게 빼앗긴 후, 나와 아내는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아. 라푼젤은 이후 탑에 갇힌 채 무려 18년 간이나 마녀를 엄마로 알고 자라다가, 왕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탑을 빠져나게 되지.
근데 생각해 봐. 어느 부모가 빼앗긴 딸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아무것도 안 했겠니. 아무리 마녀가 무서워도 말이야. 지금부터 이야기에선 생략된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우리는 라푼젤을 빼앗긴 다음 날, 바로 마녀의 집으로 향했어. 죽기살기로 싸워서 딸을 되찾으려고. 그런데 집은 텅 비어있었지. 마녀는 짐을 싸서 라푼젤과 떠난 뒤였어. 라푼젤(Rapunzel, 마타리상추를 가리키는 독일어)만 정원에 무성했지. 아내는 집에 돌아온 후 자책에 하루하루 시들어갔어.
여보, 다 내 잘못이야. 하필 마녀가 기르던 라푼젤을 먹고 싶어해서 당신이 라푼젤을 도둑질하게 만들었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딸까지 잃었으니… 불쌍한 라푼젤, 못난 엄마를 원망하렴.
아냐, 나 때문이야. 진작 당신과 딸을 데리고 먼 곳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우리는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지냈어. 딸의 안부를 묻는 이웃들에겐 딸을 유산했다고 거짓말을 했지. 마녀와 얽혀 있다는 것을 알면 이웃들이 우리를 쫓아낼까 봐 무서웠어. 실종된 라푼젤을 찾는 노력도 몸조리에 좋은 약초를 구하는 노력처럼 위장했어.
우리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진 차마 말로 표현이 안 돼. 먹을거리를 사러 읍내를 돌아다니다가 여자아이를 보면 우리 딸도 이제 저만큼 컸겠지, 상상하느라 눈을 떼지 못하곤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딸이 왠지 어딘가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예감만은 강했어. 처음으로 핏덩이를 품에 안았던 온기를 매일 떠올리면서, 언제가 마녀로부터 딸을 구출할 날이 올 거라고 버텼어.
그리고, 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단 걸 알게 되었지. 무려 실종 10년 후, 라푼젤을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집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을 걷고 있는데, 숲에서 여자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리더라고.
바람은 얼마나 신이 날까
숲처럼 자유로운 놀이터가 있어서
노랫소리를 따라가 보니 벌판에 20m쯤 되는 탑이 우뚝 서 있었어. 탑 아래엔 가시덤불이 수북했지. 더 다가가려다 맞은편에서 누가 튀어나와서 숨었지. 한 여자가 망토를 휘날리면서 나왔어. 세상에. 난 한눈에 그 여자가 라푼젤을 빼앗아 간 마녀인 걸 알아챘어. 그렇다면 노래를 부르는 소녀는? 딸이구나! 충격과 반가움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눈물샘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눈물도 터져 나왔지. 마녀는 곧 주문을 외웠어.
라푼젤, 라푼젤, 머리를 내려다오!
네, 엄마.
엄마? 내 아내가 사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들어보는 게 소원인 이 말을 마녀가 듣고 있다니. 가시가 온 몸을 찔러대는 것 같은 아픔을 참고 있는데 더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어. 곧 라푼젤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긴 금발을 내려주자 마녀가 그 머리카락을 잡고 탑을 올랐어. 감히 내 딸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잡아채서 탑을 올라? 이 괴상망측한 장면만은 바꾸고 싶다고 다짐했지. 그리고 마녀가 올라가자 개사된 멜로디가 들려 오더구나.
바람은 얼마나 겁이 날까
탑처럼 안전한 놀이터가 없어서
마녀가 라푼젤의 생각까지 조종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어. 난 그 길로 바로 작가를 만나러갔어.
작가님, 저희 집에서 티타임 한 번 하시죠?
작가는 하필 마녀와 먼저 티타임이 예약되어 있다며 1주일 뒤쯤 보자고 했어. 마녀는 무슨 수작을 벌이는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어. 어차피 물어봤자 작가는 까먹은 지 오래일 거고.
드디어 1주일 뒤, 난 모닝롤 두어 개를 굽고 라푼첼 차를 달여서 작가에게 찾아갔어. 그간 라푼첼이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차를 마셔왔는데, 이 차는 불면증에도 특효약이거든. 은은한 노랑의 차빛이 예쁘다는 작가에게 수정 요청을 슬쩍 꺼내 봤단다.
작가님, 사람 머리 끄덩이를 잡고 탑을 오르는 설정은 좀 괴상하지 않나요? 마녀면 빗자루로 날아서 탑을 오르는 게 더 상식적으로 보이구요.
작가는 난색을 표하면서 답했어.
라푼젤 아버님, 죄송한데 그 부분은 고칠 생각이 없어요.
왜요?
마녀가 날아서 탑을 들어가는 씬은 너무 진부해요. 머리카락이 이 소설의 핵심 장치라구요. 신체 일부가 탈출에 직접적으로 활용되는 이야기는 이제까지 없었잖아요? 머리카락은 라푼젤의 성공의 열쇠가 될 거에요.
작가는 단호했어. 난 티타임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지. 그 이후, 나와 아내는 라푼젤을 어떻게 구출할지 고민하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어. 탑의 모습을 최대한 꼼꼼히 그려 와서 설계도를 그렸지. 마녀가 없을 때 라푼젤을 빼내려고 말야. 고민 끝에 사다리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숲에 나무를 베러 가는데 아내가 말했어.
탈출시킨 라푼젤을 우리가 마녀한테서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라. 솔직히 난 자신 없었어. 라푼젤을 계속 지키기에 우린 역부족이었거든. 마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어.
그런 사람이 누굴지 고민하던 어느 날, 숲에서 근처에 왕자가 군사를 대동하고 지나가다 멈췄어. 왕자도 라푼젤의 노랫소리에 반한 것 같더구나. 왕자가 뭣도 모르고 탑에 다가가려 하길래 재빨리 덤불 뒤로 숨으라고 신호를 보냈지. 다행히 지나가던 마녀는 왕자를 못 보았어. 난 마녀가 탑에 올라간 후, 왕자에게 후,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왕자는 내 아픔에 깊이 공감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단다. 그리고 라푼젤에게 흠뻑 빠진 것 같았지.
난 왕자와 라푼젤 구출 작전을 논의했어. 결국 서글프게도 가장 쓰기 싫었던 방법,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잡고 탑에 오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 합의했지만. 라푼젤이 처음 탑에 오른 왕자를 보면 놀라겠지만, 왕자의 진심은 라푼젤에게 결국 통할 거라 믿었어.
난 이후 왕자의 궁에 입궁해서 왕자와 라푼젤을 만나게 하는 비밀 군사훈련을 시작했지. 먼저, 군사훈련장에 마녀의 탑 높이와 같은 20m 탑을 세웠어. 적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훈련장에 세워진 것이니 혹시 마녀가 보더라도 그게 자신의 탑을 본뜬 거라 의심하지 않을 것 같았어. 왕자는 나와 고소공포증을 이기는 능력, 밧줄을 타고 오래 오르는 지구력 훈련을 했단다. 우린 마녀가 탑을 오가는 시간도 꼼꼼히 체크했단다. 마녀는 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2시 쯤 나가서, 저녁식사 시간인 7시쯤 들어왔어. 우리가 그 사이에서 작전을 한다면 4시간 내론 끝마쳐야 안전했지.
왕자는 차츰 더 높이 올라가는 훈련을 했어. 왕자는 손에 굳은살이 박힐 만큼 훈련에 열심이었지. 그는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는 손가락 약력, 바람이 불어와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능력도 강화해나갔어. 역시 한 왕국의 왕자 답게 영민하게 기술을 익히더니 금세 20m 높이에 오르더구나.
아, 이야기에선 왕자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녀가 하는 걸 본 직후 머리카락을 잡고 탑에 오른다고 나와있지? 그런데 어느 누가, 우거진 가시덤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사람 머리카락을 잡고 20m나 오를 수 있겠니. 아무리 마녀가 잡아서 끊어지지 않는 걸 보았더라도 말야. 그 사이에 이렇게 기나긴 훈련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란다(사실 왕자가 작가랑 티타임할 때 훈련과정은 이야기에서 다 빼달라 했대. 한 번에 탑을 오른 것처럼 보여야 자기가 더 대단해 보이니까).
비록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백설공주>에서처럼 깊이 잠든 공주를 키스로 깨어나게 하는 것보단 덜 로맨틱하지만, 어쨌든 왕자는 머리카락을 성공적으로 잡고 올라. 그런데 작가는 반전 결말을 마련해 두었더구나.
보통은 왕자와 마녀가 만나면, 왕자가 마녀를 물리치면서 이야기가 끝나잖아? 그런데 라푼젤에선 마녀가 라푼젤을 추방시키고 홀연히 사라져. 마녀는 왕자에게도 시련을 주지. 탑을 오르던 왕자를 떨어뜨려 가시덤불에 눈이 찔려 고통받게 하니까. 다행히 왕자는 라푼젤이 흘린 눈물에 다시 눈을 뜨게 되고, 둘은 결국 헤피엔딩을 맞이하지만 말야.
아무튼 라푼젤과 왕자가 숲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온 집안이 눈물바다였단다. 라푼젤은 자기랑 많이 닮은 엄마를 금방 알아보았어. 라푼젤은 지금 자기랑 왕자를 꼭 닮은 아들 딸 쌍둥이를 낳아서 왕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어. 둘은 뒷모습만 보면 누가 아들이고 누가 딸인지 잘 구별이 안 돼. 라푼젤이 딸의 머리를 늘 숏컷으로 자르거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