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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 2부

작가의 영감에 관한 흑빛 상상

by 인플리

2. <인어공주>의 이웃 나라 공주의 티타임


‘거품 공포증’. 인어공주가 내게 남긴 트라우마의 이름이야.

인어공주는 자기를 버리고 나랑 결혼한 왕자를 칼로 찔러 인어로 돌아가는 대신, 바다에 몸을 던져 거품이 되는 쪽을 택했어. 자기를 희생해 지킨 숭고한 사랑은 존경 받을만 해. 그런데 난, 그녀를 마냥 존경할 수만은 없었어. 남겨진 이야기 속 세계에서 난 사랑을 가로챈 희대의 악녀로 평생 비난받으며 살 뻔했거든. 작가랑 티타임 때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그나마 괜찮아졌지.


내가 인어공주를 처음 만난 건 왕자네 가문과의 대면식 떄였어. 서신으로 결혼을 합의한 양가 왕국 사람들이 서로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지. 보통 여기서 혼사도 본격적으로 오가. 왕자의 왕국은 일찍이 우리 왕국을 혼인동맹국으로 점찍었다고 들었어. 왕자의 16살 생일파티 때 배가 난파되면서 왕자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고가 있었는데―인어공주가 왕자를 구한 게 바로 이때였지― 우리 왕국은 조선기술이 탄탄했거든. 왕자가 사고로 친한 친구와 아끼는 신하까지 몇 명 잃은 충격에 한동안 실어증을 앓자 왕자의 부모는 뛰어난 조선기술을 가진 나라를 수소문하다 우리 왕국에 혼인 동맹을 요청해 왔어. 우리 왕국에도 좋은 동맹이었지. 왕자의 왕국에는 우리에게 부족한 최신 농경 기술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난 평생 같이 살 남편 얼굴이 일찍 궁금해졌어. 몰래 시녀를 보내서 남편 초상화를 구하기도 했지. 떨리는 마음으로 펼쳤는데, 밤이 녹아든 것 같이 깊고 새카만 눈동자, 오뚝한 코, 둥근 입매,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이 눈에 들어왔어. 어딘가 유약해 보였지만 영토를 피비린내로 진동시킬 전쟁광도, 후궁 문제로 골치를 썩일 상도 아닌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지. 난 왕자에게 마음을 빼앗겼어. 왕자의 초상화를 역사책 안에 끼워두고 틈날 때마다 꺼내 봤지.


대면식 날 실제로 본 왕자의 얼굴은 초상화보다 훌륭했어. 초상화가 닳도록 봐서 그런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았어. 익숙한 걸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 그런데 날 처음 본 왕자의 첫 마디가 의아했어. 놀라면서 찬찬히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대뜸 이러는 거야.


오, 맞죠? 바다에 빠진 절 구해주신 분!

네? 전 왕자님 오늘 처음 뵙는데요?


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적이 없어. 수영도 못하는데? 막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왕자의 뒤에서 왕자의 아버지가 갑자기 나오면서 말씀하셨어.


멀끔한 얼굴은 처음 보는 게 맞을 테요 공주. 영특하신 건 알지만 구해줄 때 보셨던, 물미역과 모래 범벅인 못생긴 왕자 얼굴은 굳이 기억해내지 마시오!


그 말에 왕자 측 사람들은 가족이든 신하든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어. 단 한 사람만 빼고. 바로 너희들이 아는 그 인어공주. 머리색과 피부색이 나랑 비슷한 그녀는 얼떨떨해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니까 시선을 얼른 거두더라고. 그때 주방장이 환영 음식이 식겠다며 사람들을 연회장으로 서둘러 들이는 바람에, 난 이게 다 무슨 영문인지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지.


아무튼 난 연회장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어. 연회 테이블은 정 가운데 신랑과 신부를 중심으로 직계 가족이 양옆으로 앉게 되어 있어. 왼쪽 끝부터 우리 부모님, 내 여동생, 나, 이렇게 앉았지. 그런데 왕자 측은 왕자 바로 옆에 인어공주가 앉고, 그 옆에 왕자의 부모님이 앉더라고. 난 인어공주가 왕자의 여동생인가, 싶었는데 예비 시부모님과 머리카락 색부터 얼굴까지 하나도 닮은 게 없어서 의아했어. 사실 왕자가 외동이란 것도 시녀를 통해 들었고 말이야. 이상했지만 우리 왕국에서 상대 왕국의 가족관계를 잘못 파악한 걸 수도 있고, 혼사 자리에서 가족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누구냐고 묻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어. 내 여동생은 눈치를 보다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더라.


언니, 왕자님 여동생 언니 많이 닮았다.


인어공주와 내가 왕자를 기준으로 찍어낸 데칼코마니 같더라나. 기분이 묘했어.


왕자는 연회 내내 참 자상하더라. 인어공주가 팔을 뻗기 먼 곳에 있는 빵을 접시에 덜어주기도 하고, 스테이크를 대신 썰어주기도 했어. 둘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난 화장실에서 왕자의 어머님을 마주쳤을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돌려서 여쭤보았지.


왕자님이 동생이신 어린 공주님을 참 살뜰히 챙기시던데요?


어머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어.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더라. 난 어머님을 따라 아무도 없는 복도 끝으로 갔고 어머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어.


공주,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요, 그 소녀는 왕자의 여동생이 아니라 심리치료사랍니다.


어머님에 따르면 왕자가 실어증을 앓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인어공주가 나타났고, 그 이후 왕자의 말이 조금씩 트였다는 거야. 왕자가 해안가 쪽으로 자신을 들고 옮겨 준 여자와 인어공주가 닮았다고 좋아하기도 했대. 어머님은 말씀하셨어.


왕자가 헛것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왕자는 난파 사고 때 누가 구해줘서 산 게 아니거든요. 운 좋게 파도 흐름을 잘 타서 해안가로 떠밀려 온 거예요.


왕자가 인어공주를 만난 뒤부턴 생명의 은인 찾기에 집착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인어공주의 정체가 의심스럽다셨어.


그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미모가 뛰어나면 온 왕국에 소문이 났을 텐데. 본적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요. 벙어리라 말도 못하구요.


어머님은 여러모로 수상한 여자가 왕자 옆에 있는 게 신경 쓰이겠지만, 왕자가 사고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할 때까진 이해해달라고 부탁하셨어. 왕자를 물에서 구한 적이 없는 걸 알지만, 괜히 사실을 말해서 왕자에게 충격을 주지 말라시더라. 인어공주와 왕자는 아무 사이가 아니니 심려치 말라고도 하셨어. 왕자도 처음엔 인어공주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보이다가, 대화가 안 되니 고맙고 안쓰러운 여동생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셨어. 어머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를 왕자의 신부로 들일 생각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지.


어머님과의 대화로 자초지종은 알게 되었지만, 신경이 쓰였어. 왕자가 깊이 의지하는 여자. 내가 모르는 왕자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여자.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한 여자. 생각만해도 좀 부담스럽지 않아? 난 그 여자가 싫어질 때마다 교회 말씀을 곱씹었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1서 4:20)


왕자와의 결혼 날짜를 공식적으로 정한 후, 가끔 신하들을 대동해 왕자의 왕국과 왕래를 했어. 만들어나가고 싶은 왕국과 가족에 대해 우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단다. 이야기엔 많이 생략되어 있지만, 왕자는 내가 단지 자신을 구해준 여자라 믿기 때문에 날 좋아한 건 아니었어. 나의 가치관, 지식에도 큰 호감을 표했다고. 나랑 결혼하고 인어공주에게도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고 싶다고 말한 걸 보면, 왕자는 인어공주를 여자로는 생각하지 않는 듯 했어.


드디어 결혼식 당일. 인어공주가 축하공연으로 춤을 추는 무대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어. 미모가 뛰어난 데다 춤까지 잘 춘 인어공주에게 호감을 표현 남자들이 가까이에서 인어공주를 보며 환호했단다. 그런데 난 그 춤을 추는 모습이 기쁘기보단 어딘가 처연하다고 느꼈어. 그리고 내 직감이 맞았단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

첫날밤, 왕자 옆에서 잠들어 있던 난 뒤척이다 우연히 깼어. 그리고, 그때 분명히 봤지. 인어공주가 내게 칼날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근데 내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인어공주가 한 걸음 내딛은 나무바닥에서 크게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왕자가 일어났어. 인어공주는 문을 후다닥 뛰쳐나갔어. 곧 풍덩, 소리와 꺅! 하는 비명이 들렸지. 사람들이 웅성댔어. 그다음은 이야기에 쓰인 그대로야.


이후 인어 왕국에서 파견된 특사를 통해 인어공주의 사연이 알려졌지. 내 결혼이 인어공주가 거품이 되는 간접적 계기였단 것도. 왕자를 사랑한 인어공주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대가로 300년이라는 수명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었는데, 왕자가 나랑 결혼하는 바람에 사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 이후 나에게 악마 프레임을 씌우는 사람들이 생겨났지. 사랑을 가로챈 마녀라면서.


난 억울했어. 인어공주가 정말 날 찌를 작정이었는지 아닌진 모르지만, 나도 위협을 받았다고.


난 땅콩이 박힌 초콜릿 구 두어 개랑 따뜻한 얼그레이 차를 가지고 마지막 장면을 쓰고 있는 작가에게 티타임을 신청했어.


작가님, 머리 쉴 겸 티타임 어때요?


작가는 초콜릿을 먹자 당 덕분에 기분이 좀 좋아진 듯 했어. 난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물어보았지.


작가님, 지금 이야기 좋은데 한 문장만 넣어주시면 안 돼요? 그럼 이 소설의 주제인 사랑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인어공주가 절 향해 칼을 겨누었단 건 평생 비밀로 할께요.


뭐라구요? 칼을 겨눠요?


묵묵히 긴 사정을 들은 작가는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었어.


알겠어요. 물론 인어공주는 당신을 차마 찌르지 못할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이긴 합니다만, 당신이 위협을 느꼈단 것도 사실이죠. 앞으로 왕국에서 계속 살아갈 당신의 입장도 생각해야겠군요. 당신이 인어공주를 싫어했다고 오해받지 않도록 ‘왕자가 신부와 함께 인어공주를 찾아다니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는 문장을 써 드리죠.


시간이 좀 지난 후, 다행히 나에게 악마 프레임을 씌웠던 왕국 사람들도 다행히 내게 마음을 열었어. 내가 왕자와 함께 열심히 국정을 논의해서 왕국이 더 살기 좋아졌거든. 국정을 함께 논할 동반자로 내가 제격이란 평가가 커졌지.


삶은 안정되었지만, 난 아직도 거품을 편한 마음으로 보지 못해. 거품은 어디에나 있어. 왕자와 가끔 빨간 잉어들을 보러 산책 나가는 호숫가 수면에도, 시녀들이 목욕을 도와주는 욕조 속에도, 불면증을 이기려고 한 모금 마신 우유 컵 속에도. 난 그때마다 인어공주가 떠올라. 부글거리는 거품 알 하나하나가, 나를 바라보는 인어공주의 눈동자 같아.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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