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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 1부

작가의 영감에 관한 흑빛 상상

by 인플리

‘영감’은 그동안 작가를 신격화하는 말로 쓰여 왔다. 좋은 이야깃거리란 모름지기 특출난 작가의 머릿속에서 우연히 떠오르는 것으로 오해되게끔, 유명 작가들이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해 왔기 때문이다.


Q. 영감은 어떻게 얻으셨어요?

A. 1990년 여름, 런던행 열차를 탔는데 열차 고장으로 안에서 4시간을 대기했어요. 그때 갑자기 마법학교에 다니는 해리 포터, 헤르미온느, 3명의 캐릭터가 떠올랐죠. 정말 놀라웠어요. 이야기가 정말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니까요. - <해리 포터> 작가 조앤 롤링


이러한 인터뷰에 등단이 간절한 일부 작가 지망생들이 열차표를 끊었다거나, ‘고장 잘 나는 열차’를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했다는 증언이 들려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여, 우리 <세계조연협회>는 수 세기 동안 비밀에 부쳐져 온 ‘영감’의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아래의 한 인터뷰가 힌트가 되겠다.


Q. 영감은 어떻게 얻으셨어요?

A. 캐릭터를 만들었더니, 그 캐릭터가 스스로 말을 하더라고요. 그걸 받아 적었죠.


위 인터뷰는 충분친 않지만, 일말의 진실을 내포한다. 바로 ‘영감’은 작가에게서 일방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캐릭터가 쌍방향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진실.


특히 자기 분량에만 관심이 있는 주연과 달리, 우리 조연들은 전체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우리의 분량이 대폭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작가에게 이야기에 관해 조언한다. 한 문장의 마침표와 다음 문장의 첫 글자 사이, 이 2mm의 공간에 수백 쪽에 달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고 봐도 좋다(물론 다른 작가에게 캐스팅되어 주연으로 재탄생하는 조연도 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 마녀는 자신이 주연인 영화 <말레피센트>로 전 세계적 인기를 얻어, 현재 세계 각국의 팬 미팅을 ‘링거 투혼’으로 소화 중이다).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를 발전시킬 아이디어를 못 찾아 끙끙댈 때, 작가에게 1:1 ‘티타임’을 신청한다. 따뜻한 티로 스트레스가 좀 누그러진 작가가 고민을 쏟아내면, 우리는 그 고민을 귀 기울여 듣고, 아낌없는 조언을 전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를 탄생시켜 준 작가에 대한 고마움, 우리가 속한 이야기가 널리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작가도 우리를 도와준다. 이야기 세계에서 계속될 우리의 삶이 무탈하도록, 우리의 걱정을 듣고 이야기를 조금 바꿔 주기도 하니까.


‘티타임’은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므로, 작가들은 모든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믿는다. 현직 작가가 그 믿음으로 자부심을 갖는 건 좋지만, 작가 지망생들이 그와 같은 천재적 재능이 없단 이유로 펜을 놓을까 봐 걱정이 되어, 우리는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고맙게도 우리 협회의 명예 고문인, 수 세기 넘게 사랑받아 온 이야기의 조연 3명이 앞장서주셨다. 바로 <신데렐라>의 요정 할머니, <인어공주>의 이웃 나라 공주, <라푼젤>의 라푼젤 아버지다. 지금부터 이분들의 ‘티타임’을 ‘티타임 : 이야기를 함께 우리는 시간’이란 제목 하에 차례대로 공개한다.

- <세계조연협회>



[티타임 : 이야기를 함께 우리는 시간]


1. <신데렐라>의 요정 할머니의 티타임


너네 ‘신데렐라의 발에서 유리구두가 벗겨졌다’는 문장 알지? 사실, 유리구두는 신데렐라가 일부러 벗고 온 거야. 내 ‘유리구두 작전’에 따라서.

이 작전을 제안한 건 어느 새벽이었어. 작가 양반이 이야기가 안 풀린다고 새벽까지 끙끙대고 있었지. 안쓰러워서 바람 좀 쐬라고 작가를 불러냈어.


작가 양반, 티타임 할라우?


난 작가를 큰 버드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데려갔어. 버드나무 잎이 볕을 적당히 가려 주었지. 테이블에 세팅된 아몬드 파운드 케이크, 무화과 스콘, 마카롱으로 가득 찬 3단 트레이를―내가 마법으로 3초 만에 완성했단다―허겁지겁 먹고, 홍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작가가 좀 편안해하더라. 그리고 고민을 말해주었어.


신데렐라와 왕자를 어떤 계기로 다시 만나게 해야 좋을지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요.


난 제안했어.


우연한 계기가 더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예를 들면 실수 같은 거.


솔깃했는지 창백했던 작가의 뺨에 연주홍 빛 생기가 올라오더구나. 난 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어.


그 실수는 사실 치밀한 작전으로 계획된 건데, 그 실수의 기획이나 수행 과정은 독자에겐 숨겨. 마치 진짜 우연히 일어난 실수처럼 독자가 느끼게.


작가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며, 고맙다고 내 손을 덥썩 잡았지.


자, 작전은 이랬어. 우선 신데렐라가 탈 호박 마차 벽에 아래 지령을 붙여두었지.


신데렐라야,

궁전을 나올 때 할 일이 있어.

계단에 유리구두 한쪽을 벗어두되, 급히 나오다 구두가 벗겨진 것처럼 연기해.

너무 애써 연기하진 마. 풍성한 드레스가 속임수 쓰는 발을 가려 줄 테니.

왕자가 나중에 그 구두로 너를 다시 찾아낼 거야.

왕자랑 데이트할 때 너의 유리구두를 잘 기억시킬 멘트도 애드립으로 좀 날려주렴.

이 유리구두 작전은 모두에게 비밀이란다.

이 쪽지도 30분 뒤에 사라질 거야.

- 너를 왕비로 만들어 줄 요정 할머니가


신데렐라는 영민했어. 궁전에 도착하기 전까지 호박 마차 안에서 유리구두 벗는 연습을 계속 했다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우선 왼발로만 서는 연습을 했죠. 그다음 오른발을 땅 위로 한 뼘 정도 들고, 오른발 발목을 앞뒤로 살살 흔들어서 구두를 발에서 살며시 빼는 동작을 반복 연습했어요. 발목을 너무 세게 흔들었다가 날아간 구두가 어디 부딪혀 깨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신데렐라는 치밀하기도 보통이 아니야. 마차 유리창을 거울삼아서 계단 위에 남겨진 구두 한쪽을 보고 놀라는 표정까지 연습했대. 왕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자기 표정을 봐야 구두가 실수로 벗겨졌다고 확신할 것 같았다나.


신데렐라가 왕자에게 자기 유리구두를 기억시키기 위해 친 애드립도 훌륭했어. 왕자랑 분수대에 앉아서 쉴 때, 발을 드레스 밖으로 빼면서 이렇게 말했대.


이렇게 달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유리구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에요.


왕자가 예쁘지만 발이 아프지 않냐고 걱정했는데, 이렇게 답했대.


아뇨. 제 발에 꼭 맞게 특수 제작된 거라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자기 발볼이 넓고, 발등이 높아서 자기 외엔 아무도 이 구두를 편하게 신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 거야. 왕자는 이 이야기를 기억해서 나중에 신데렐라를 찾으러 구두와 함께 신하들을 보낼 때 이렇게 조언했대.


구두를 신었을 때 발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꼭 맞는 여성이 구두의 주인이오.


어떤 독자는 신데렐라를 외모로 찾으면 빠를 것을, 왜 애꿎은 구두로 찾게 했냐고 항의하기도 했는데, 생김새가 퍼지는 건 위험했어. 신데렐라의 계모와 언니가 혹시나 왕자가 찾는 대상이 신데렐라인 걸 눈치채고 신데렐라를 지하 창고에 가둘 수도 있잖니.


아무튼 유리구두 작전 덕에 작가는 이후 이야기를 쭉쭉 써 내려갔지. 그런데 출간일이 다가오던 어느 햇살 좋은 봄날, 작가가 한숨을 푹푹 쉬더라. 마법에서 중대한 오류를 발견했다고. 또 야위어가는 게 안쓰러워서 불러냈지. 이번엔 다즐링 티를 우려주었어. 작가는 한 모금 마시더니 말하더라.


요정님, 큰일 났어요, 12시를 알리는 종이 12번 울리면 마법이 다 풀려야 하잖아요?

네. 마차는 호박으로, 말은 생쥐로, 마부는 도마뱀으로 변하죠. 신데렐라의 화려한 드레스나 메이크업, 헤어도 원래대로 수수해지고요.

그럼 유리구두도 물걸레질할 때 신던, 해진 슬리퍼로 변해야 맞지 않을까요?


아차. 나도 전혀 생각 못 한 포인트였어. 우리는 이 논리적 결함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다가, 유리구두만 마법의 효력이 계속된다는 설정을 넣기로 했어(독자들이 마법을 하나하나 따지는 팍팍한 사람들이 아닐 거라 믿어서, 이 설정은 굳이 이야기에 구구절절 쓰진 않기로 했단다). 난 신데렐라를 마법으로 변신시킨 다음, 이렇게 귀띔했어.


말했다시피, 종이 12번 울리면 마법이 다 풀릴 거란다. ‘유리구두만 빼고.’ 유리구두만 마법이 오래 가게 세팅되어 있거든. 네가 신던 것과 비슷한 신발은 마차 의자 아래 두었으니, 돌아갈 때 갈아 신으렴.


역시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독자들은 왕자의 신하가 구두로 신데렐라를 찾아낼 수 있을지에만 집중하고, 왜 유리구두만 마법이 풀리지 않은 거냐고 따지진 않더라.


대신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유리구두를 안 깨 먹고 춤추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은 좀 받았다고 해. 무도회장에 다른 여자들보다 신데렐라를 좀 늦게 보내서 춤을 덜 추게 한 거라고 답했다고 하네(작가가 이런 디테일까지 다 고려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


아무튼 유리구두 작전이 성공해서 뿌듯해. 원래 실수로 놓고 가는 걸 클러치백이나 레이스 장갑으로 해볼까도 고민했었어. 근데 무도회에서 백이나 장갑을 놓고 가는 실수는 너무 흔하더라고. 좀 더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찾은 물건이 구두였어. 좀처럼 놓고 가기 쉽지 않은 물건이니까. 아, 이 구두, 원래는 가죽구두였단다. 내가 작가한테 프랑스어 vair(가죽)이 verre(유리)랑 비슷하니, 가죽구두를 유리구두로 오역한 척하라 했어. 가죽은 늘어나니까, 혹시나 여러 여자가 신느라 늘어난 가죽에 신데렐라의 못된 언니 발이 꼭 맞으면 큰일이잖아?


자, 내 티타임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우연한 실수로 운명적인 사건을 만들되, 독자에겐 숨겨라’가 작가 지망생인 여러분을 위한 내 조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지. 이 조언을 잘 따르면 너도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오래 사랑받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럼 이만.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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