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거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과 블라인드를 열고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며 날씨를 확인하고, 밤새 마당에 별일이 없었는지 살핀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물을 마시고, 커피물을 올린다. 물이 끓을 동안 음악을 틀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는다. 반 잔 정도 컵에 따라 한모금 마신 후에 씻고, 회사에 갈 준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선다. 밤새 채소가 얼마나 자랐는지 살피고 눈에 보이는 잡초를 슬슬 뽑고, 주말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운다. 요즘 나의 아침 일상이다.
이곳으로 이사온 뒤, 아침이 더욱 빨라졌다. 아침에 해야 할 일도 많아졌고, 하고 싶은 일도 더 많아졌다. 아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자고 싶은 마음을 이긴다.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이직한 후, 새로운 일에 가끔 스트레스를 받긴 해도 아침볕에 눈을 뜨고, 푸른 잔디를 보면 오늘 하루를 보낼 힘이 난다.
한 달 전즈음, 장날에 로메인 모종 12개를 2천원에 사왔다. 그 중에 2개는 장렬히 전사(?)하고, 10개가 살아남았는데 이미 두어번을 쟁반 가득 수확해서 먹었다. 쌈채소로도 좋고, 샐러드 채소로도 좋다. 앞으로 날이 따뜻해지면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니! 그뿐만이 아니다. 토마토도 조금씩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고, 완두콩은 콩깍지가 생겼다. 고수와 바질이 더 많이 자라면 페스토를 만들 거고, 루꼴라도 샐러드 채소로 바로 따먹을 예정이다. 양배추와 가지도 심었는데 잘 자랄지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봐야지. 블루베리 나무도 세 그루나 심었다. 두 그루는 아직 어린 나무여서 블루베리가 듬성듬성 열릴 것 같지만, 한 그루는 꽤 큰 나무를 데려와서인지 꽃이 잔뜩 피었다 졌고, 그 자리에 열매가 통통하게 오르고 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는데 나만 바라보고 사는 삶은 변화도, 성장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매일 아침 마당에 나서 어제보다 조금 더 자라는 식물들을 보면 나 역시 그만큼 더 나이 들고, 성장했겠거니 믿어버린다. 식물 자라는 거에 나를 비추는 게 조금 부끄럽지만 뭐 어떤가. 내가 보고 느끼면 그만이지! 그 식물들이 잘 자라는지 매일 들여다보며 살피고, 돌보는 것에서 이미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한뼘 자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택에 벌레가 많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잔뜩 기대(?)했는데,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정말 다양하고 많은 벌레들이 출몰한다. 아직 본격 여름이 되기 전이니 이제 시작일 텐데 벌써부터 겁이 난다. 그래도 벌레들 입장에서 보면 내내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기들 땅인마냥 살았는데 갑자기 쳐들어온 인간이 공간을 점령해버렸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이제 우리집이니까 주인 행세는 좀 하고 싶다.
집 안에는 고양이들이 함께 살아서 다른 약처리는 하지 않고, 집 주변으로만 간간히 약을 뿌린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 아래 벌레 사체가 후두둑하다. 미안하지만 두눈 감고 송풍기로 사체를 날려버린다.
마당에 꽃을 심었더니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순간 처마 밑에 말벌이 집을 짓고 있는 걸 목격했다. 다행히 집짓기 초반에 발견해서 말벌을 쫓아내고 집을 뽀사버렸다. 미안했지만 집이 더 커지기 전에 부수는 게 낫지 않은가! 지금까지 3개의 작은 말벌집을 없앴다.
거미는 또 얼마나 부지런한지! 반나절이면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린다. 나는 지금까지 거미집은 사람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생기는 건줄 알았다. 아니다. 거미는 정말 부지런하고 빠르다. 손길이 잘 닿아도 조금만 한눈을 팔면 바로 집을 짓는다. 그래도 거미가 이런 저런 벌레를 잡아줘서 가끔은 못본척 그냥 두기도 한다. 하지만 몇 번 그만뒀더니 이제 새끼가 출몰한다. 거미 새끼는 아주아주 작고 빨간 색인데(거미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ㅎㅎ) 색이 너무 예쁘고, 선명하다. 그리고 너무 약해서 작은 충격에도 으깨(?)지는데 그 색이 또 정말 빨갛다. (나도 이런 거 알고 싶지 않았다...)
개미는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다. 텃밭에 딸기 모종을 가져다 심었는데, 모든 모종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딸기 주변에 터를 잡기 시작하더니 온동네 개미를 다 불러 모은 모양이다. 어느날 문득 보니 딸기 모종이 흙에 파묻혀 있다. 개미들이 흙을 물어다 딸기 모종 근처에 집을 지은 것.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개미집을 다 부수고 물을 흠뻑 뿌렸는데, 하루 이틀 지나니 다시 집이 생긴다. 토양소독제, 붕산+카스테라 신공 등등 개미 퇴치를 위한 이러저러한 방법을 써봤지만 회복탄력성이 어마어마하다. 개미를 이기려던 마음을 접고 딸기는 개미에게 넘기기로 했다. 딸기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지키려는 전략이지.
주택을 살아본 적도 없고, 텃밭은 커녕 화분 하나 제대로 들여본 적이 없다. 그저 맑은 공기와 확 틔인 풍경이 좋아 산에 다녔고, 캠핑을 다녔다. 자연이 좋다면서 집에서는 자연과 먼 삶을 사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늘과 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터전을 옮긴 것뿐이다. 그런데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가끔 오르던 산이나 캠핑장에서 보고 느끼던 것과 다르다. 보통 날이 좋을 때만 놀러갔으니. 하지만 우리 일상은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거세게 불고 비가 몰아치는 날도 있다. 어느 날엔 벌레마저 예뻐 보이지만 어느 날엔 지긋지긋하기도 하니. 산만 볼 때는 벌레가 없다가도 주의 깊게 땅을 보면 수많은 벌레에 질리기도 한다.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이 이렇게 부지런하고 열심인지도 몰랐다. 때에 맞춰 짝짓기를 하고, 먹이를 모으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삶의 기운 속에서 살아간다.
귀촌했다고 삶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을 챙겨 먹고, 주말을 기다린다. 삶의 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이 기운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나' 중심으로 돌아갔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니까. 그렇게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맞이하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의 환희와 기쁨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다.
귀촌을 결심하고 정신없이 보낸 5개월이 지나, 집을 고치고 이사까지 했다. 이제 당분간은 이 집에서 충분히 햇볕을 받고,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맞으며 마당을 가꾸고 텃밭을 가꾸려고 한다. 1년을 살며 사계절 동안 낯선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보는 것이 올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