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온 종달새 편지 / '누구를 품는 다는 것'
어르신은 새벽마다 약수터를 오르십니다.
번잡한 주말을 제외하고 호젓한 평일 어둑어둑한 시간에 집을 나서 천천히 한발한발 경사면을 오르곤 하는데
윗동 아파트옆을 지날 때마다 나무 밑에 내다놓은 화분이 늘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셨지요.
"그래~ 너희들도 쓸모가 없어지니 이리 버려지는 것이더냐?"
다음날은
"아니지! 너희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려는 주인들의 배려겠지. 자연의 온기로..."
그 다음날은
"그래~ 너희들이 거룩하게 꽃들과 나무, 생명을 품어왔듯이
햇살과 바람, 그리고 비가 너희들을 품어 다시 살릴 것이다."
엄동설한 한겨울
아파트 단지 옆 음달에 화분들이 매서운 바람에 처량한 모습으로 대화를 합니다.
먼저 제일 커다란 화분
"모두들 춥지요? 아~ 그립다. 따뜻했던 거실이..."
"........."
모두들 너무 추워 말 대답할 기운도 없었지요.
"제기랄~ 나는 원래 주인댁 사장님 사무실 개소식에 선물로 보내진 행운목 화분인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이곳 아파트로 오게 되었지요.
꽃은 안피지만 기다란 초록 잎사귀로, 그리고 그 이름으로 인기가 많았는데 다들 그렇겠지만
환기도 제대로 안되고 늘 건조한데다 물도 제 때 안주니 시들시들하게 되었지요.
잎이 떨어지고 볼 품 없어지니 이렇게 찬밥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저는 주인댁이 이곳으로 이사오며 받은 축하 고무나무 화분이었어요.
싱그러운 넓고 두터운 잎사귀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오랜세월 분갈이 없이 좁은 공간에서 부족한 영양분으로 살아 시들해져 윤기없어지니 이렇게 버려졌지요."
커다란 화분 옆의 사각진 화분이 말했습니다.
"저는 주인 어르신 정년 퇴임때 선물로 주어진 소나무 분재였지요.
20여년 주인의 정성어린 돌봄으로 멋스런 푸르름을 자랑하며 기품있는 삶을 살아왔는데,
어르신 돌아가시고 부터 홀로 계신 안주인께서 나름 남편 생각하며 정성을 다했지만
저도 주인 잃은 슬픔에 기력이 쇠잔하여 시름시름 앓게 되었고,
더욱이 안주인께서 치매로 요양병원으로 가시는 바람에 이렇게 바깥에 나앉게 되었지요.
그래도 한시절 기품있는 소나무를 품어온 것에 감사합니다."
덩그러니 말라 비틀어진 소나무 줄기만 품은 둥근 화분이 말했습니다.
"저는 자식 장가보내는 부모님이 예쁘게 알콩달콩 잘 살라며 수십년을 길러오던 군자란을 신혼집에 주셨지요.
봄마다 소담스럽게 꽃을 피우고 커다란 잎사귀로 사시사철 초록의 싱싱함을 자랑했는데,
시부모님의 귀한 선물이라고 새댁이 애지중지하며 너무 자주 물을 주고 이곳저곳으로 자꾸 옮기다 보니,
군자란이 스트레스에 수분이 과다하여 뿌리가 썩는 바람에 이렇게 나앉게 되었지요."
볼이 깊은 둥근 화분이 말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바깥에 버려진 화분들은 서로 의지하며 사계절을 보내게 되었지요.
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봄바람이 새싹들을 일깨웠지만
품은 생명을 잃어버린 화분들은 마음이 안타까웠지요.
새롭게 생명을 앉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주변에 새싹들이 올라와 봄꽃을 피워낼 때는 환호하며 함께 기뻐해주었지요.
여름
생명의 푸르른 활기로 울울창창해지는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보며
이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무섭게 몰아치던 폭풍우로 커다란 나무들이 휘청일 때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그 폭풍우를 견뎌내고 더욱 건실하게 커가는 생명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지요.
그리고 맞이한 폭염은 또 모두를 지치게 하고 삶의 의지를 흔들리게 했지만
잘들 이겨내어 감사했습니다.
가을
풍요의 계절
힘겨움 이겨내고 나름대로 결실을 맺어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지요.
더욱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겨울
아름다운 단풍을 미련없이 떨구는 모습에서 '구도자'같은 생각이 들어 존경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맞이한 혹독한 계절
굿굿하게 이겨내고 있어 자랑스러웠습니다.
새해가 머지 않은 어느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침나절에 아가씨들이 나타나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더니 우리 화분들을 챙겨가는 것이었지요.
"이거 가져가면 아빠가 좋아하시겠다. 언니!"
"너무 크기 않을까?"
다시
아파트 거실에 입성
너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느껴져 감동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한겨울에 꽃을 피운 '호접란'들이 거실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어 장관이었지요.
"아빠! 화분 많이 가져왔어요."
"잘했구나! 그래 그 화분들이 맞다. 약수터가는길에 새벽마다 만나던 녀석들..."
맞습니다.
그 약수터 오르시던 그 어르신
딸들과 꽃시장에서 호접란을 많이도 사오셨고
새해 선물로 화분에 정성껏 심어서 친지들께 선물하신다고...
행운목이 심겨졌었던 제일 큰 화분에는
흰색, 노랑색, 붉은색 호접란 세촉이 심겨졌고
고무나무가 심겨졌었던 사각진 화분에는
흰색, 연두색, 붉은색 호접란이
군자란이 심겨졌었던 화분에는
붉은 호접란 세촉이
소나무 분재가 심겨졌었던 화분에는
흰색, 연두색 두촉이 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화분들을 화장실 욕조로 가져가 시원하게 샤워를 해주셨지요.
얼마나 시원하던지, 그 꽃향기와 함께...
하룻밤을 어르신댁에서 지내고 다음날 친지들에게 전달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날밤
"모두들 꿈을 이루었지요?"
커다란 화분이 말을 하자
"그러게요. 이 아름다운 꽃들을 품어 함께 한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새해에 누구에게 선물로 전달된다니, 그 받는 분들의 미소가 떠오르네요."
"힘든 세월속에서 꿈을 잃지 않아서 이렇게 '누군가를 품는' 소망을 이루게 되었나 봅니다."
다음날
아가씨들 손에 들려
큰 행운목 화분은 큰외삼촌댁에
사각화분은 시집간 둘째 시댁에
군자란 화분은 홀로 계시는 할머니댁에 새해 선물로 전해졌지요.
그리고
소나무 화분은 어르신댁 식탁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