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물었다. 그대 눈을 반짝이게 하는 그대 안의 별을 발견했나요?
8년 전,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고 구본형 선생님의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과 함께 시작되었다.
타인의 삶으로부터 나는 뛰어내렸다.
내가 되기 위해 나는 혁명이 필요했다.
_구본형
'확실한 죽음'에서 달아나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삶'을 선택하겠다고 퇴사했던 나는 어떻게 되었나? 감사하게도 신체적인 죽음도 면했고 영혼도 살아있다. 소명을 찾고자 시작한 여정이었으나, 내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고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데 몰입했다.
그리고 8년 후 도서관을 거닐다가 우연히 책 한 권을 집어 들었고 그 책에서 또다시 구본형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내게 물었다.
'소명을 뜻하는 영어 'vocation'의 어원은 'voice(목소리)'라고 합니다. 즉, 소명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닌 '들어야 할 부름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목소리의 발신지는 우리 내부임에도 좀처럼 듣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너무 오래 내 안의 존재를 잊고 살아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구본형, 홍승완. (2023. 을유문화사). <마음편지>.
그는 내게 넌지시 이야기해 주었다. '내 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과 '소명을 찾는 일'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정확히 같은 말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지난 8년을 돌아보니 나는 내 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
구본형 선생님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지난 여정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3년 전에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8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매일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오늘로 314일 동안 블로그에 매일 글을 썼다. 100일만 써보자고 시작한 일인데 매일 글을 써도 글샘이 마르지 않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는 브런치 작가 신청으로 이어졌다. 3주 동안 브런치에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연재하며 8년 간의 여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로 했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을 두 차례 한셈이다.
지난 8년 간 나를 돌아보는 여행을 했고, 8년의 여정을 글로 정리하며 다시 한번 여행했다.
가장 위대한 여행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여행이 아니라
단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_덴마크 사람들처럼 / 말레네 뤼달
지난날을 떠올리니 눈물겹다. 내가 되기 위한 혁명에 동참하고자 용기 냈던 8년 전의 나도, 고난과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고 거듭 나를 일으켜 포기하지 않은 것도 대견하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한 발자국씩 더듬어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두려웠고 삶의 어둠을 맛보았다. 어디에도 '이 길이 네 길이다.'하고 명료한 힌트를 주는 이가 없었다.
오직 내 발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대범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성향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이었다. 어둠이 짙은 날도 있었고 따사로운 빛이 내리쬐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일희일비할 수 없었다. 마음껏 기뻐할 수도 슬픔에 파묻혀서 좌절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눈물도 웃음도 훔쳐내고 다시 나아가야 했다.
뿌연 길을 헤치며 계속 걸어왔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희미한 소명의 길은 미궁과 같으나
어두운 내면을 통과하지 않고는 내가 없으니
두려우리라 생각한 곳에서 나를 발견하고
죽으리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살게 되리라.
_구본형 / 마음편지
그저 살아있는 것 자체로도 행운이다. 나는 운 좋게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펄떡거리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삶에는 정해진 목적이 없습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삶 자체입니다. 여행의 목적이 목적지에 닿는 게 아니라 여행 자체인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화려한 결과만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감나무를 키운 이의 마음이지 감나무의 마음은 아닙니다. 좋은 삶 그 자체가 훌륭한 결실입니다.'
_구본형, 홍승완. (2023. 을유문화사). <마음편지>.
물론 '왜 나는 남들처럼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이번 생은 망한 걸까.‘ 회의감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지나온 과정에 감사하다. 지난 삶을 지우고는 지금의 나도 없다.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면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저마다 만족하는 기준이 다르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다르다. 매일 숨 쉬고 걷고 웃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의 하루하루가 만족스럽다. 나의 삶은 분명 좋은 삶이다. 그의 말대로 내가 누리고 있는 좋은 삶 자체가 이미 '훌륭한 결실'이다.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나와 지지고 볶고 세상과 투닥거리는 시간이 겹겹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나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너 어떻게 살고 싶은데? 어떤 삶을 원하는데? 너한테 중요한 가치가 뭔데? 왜 그걸 원하는데?‘
마음이 동하는 일은 직접 경험해 보도록 나를 격려했다.
‘일단 해봐. 아님 말고. 아닌지도 해봐야 알지. 밑져야 본전이야.‘
나의 스승은 이 세상에 없지만 삶이 나를 가르쳐주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잘 살고 싶어 진다. 글을 쓰며 매일 내 인생에 질문을 던진다. '나 지금 진실하게 살고 있나?' 어떤 좋은 문장, 기발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기보다, 내 삶을 글로 진솔하게 옮겼을 때 가치 있는 글이길 바란다.
글이 먼저냐, 삶이 먼저냐 묻는다면 나에게는 삶이 먼저다. 삶 없이는 쓸 글도 없다. 잘 쓰고 싶고, 그렇기에 쓰기에 앞서 잘 살고 싶다. 글쓰기는 나의 삶을 좋은 삶으로 이끈다. 나의 삶에서 훌륭한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는 더할 나위 없는 도구이다.
글쓰기는 내 마음속 이야기(voice)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꿈이 없을지라도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여정에서 글쓰기는 든든한 스승이 되어줄 것이다.
'삶이란 온몸으로 사는 것이구나. 좋은 작가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쓰는 글이 진실이구나. 그러므로 진실에 진실한 글은 심장을 뜨겁게 하고 손발을 진동하게 하고 낯을 붉히게 하고 누었던 몸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구나. 그리하여 다시 살게 하는구나.'
_구본형, 홍승완. (2023. 을유문화사). <마음편지>.
앞으로도 내 마음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날 것의 세상을 몸소 경험하며 생생하게 살고 싶다. 불확실함을 끌어안고 가능성의 세계로 발을 내딛고 싶다. 온몸으로 겪은 삶을 '쓰지 않을 수 없어 쓸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숨기려 해도 삶이 흘러넘쳐 글에 묻어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기가 끝인가.' 생각하는 곳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 걷다 보니 나는 어느새 글을 쓰고 있었다. 글쓰기가 나의 소명이라 확신에 차서 말할 수는 없다. 나의 소명은 지난 화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과 평안을 전하는 삶'을 살고자 함에 가깝다. 사랑과 평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사랑과 평안을 전할 도구가 필요하다. 나는 글쓰기를 도구로 사용하기로 선택했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늘 방황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글을 쓰며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하나의 본질이 있었다. 강의를 할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글을 쓸 때도, 나의 시선은 사람을 향했고 늘 사랑을 품고 있었다. 나에게 불필요한 것, 본질 아닌 것을 벗겨내고 벗겨내니 결국 남은 건 사랑뿐이었다.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사랑이기에.
'낙엽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나무의 지혜이듯이,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음은 모든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입니다. 개인의 혁명은 자신의 껍데기를 죽임으로써 가장 자기다워짐을 지향합니다. 자기가 아닌 것을 다 버림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 변화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불가항력적이고 무기력한 소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발견하려는 열정이며, 그걸 발판 삼아 새로이 거듭나지 위한 끊임없는 모색입니다.'
_구본형, 홍승완. (2023. 을유문화사). <마음편지>.
더 이상 나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에필로그를 쓰며 계속 반복되는 '8'이라는 숫자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본다. 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소명을 찾겠다며 8년을 헤맨 끝에 솔직한 마음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여전히 생생하기에 앞으로도 모험하며 살아가리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모험이 되리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한 기쁨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탐험하리라. 반짝이는 눈으로 매일을 환영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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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의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는 두려움 대신 사랑으로, 나의 삶을 살고 싶다.
<에필로그 of 에필로그>
첫 번째 브런치 북 <나를 찾아줘>는 자기 계발서도 아니요, 에세이도 아니요, 독백에 가까운 글이 되었습니다.
8년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의미가 깊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저 덤덤하게 지나온 길을 관망하며 쓰고 싶었습니다.
조금 허무한 결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완벽하게 정해진 길이 있다면 우리가 이토록 불안해하고 방황할 이유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방황의 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나를 찾고자 하는 용기를 냈으니까요.
8년의 방황 끝에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여정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 결과가 안 보일지라도,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느껴져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중이고 여정 위에서 저마다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9월 중순에는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자유롭고 평안하기를,
당신의 삶을 사랑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