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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빈 Apr 07. 2024

동그라미 비슷한 것을 그려보겠다고

2023년 4월의 비전데이

프리랜서 번역가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무서운 말이 있다. ‘마감’. 두 번째로 긴장하게 하는 말이 있다. ‘마감 주간’. 마감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가장 마감을 우선시해야 하는 주간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마감 속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4월에는 낯선 일에 위기가 찾아왔다.     


마감과 낯선 일을 동시에 소화해 보겠다고? 어지간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낯선 무언가를 할 시간 자체가 없다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쳐 있고, 쉬고만 싶고, 에너지가 부족하다. 그래도 4월의 나는 매주 꼬박꼬박 소소하지만 낯선 무언가를 적립하려 애썼다.      


새로운 신발도 사러 가고, 컴퓨터가 고장나서 컴퓨터를 바꾸기도 하고, 참여하고 있는 모임에서 매일의 독서와 모닝페이지를 인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4월에 가장 기억에 남는 ‘소소하지만 낯선’ 경험은 일정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수요일마다 꼬박꼬박 지켰던 비전 데이다.     

 

비전데이란 무엇이고, 비전은 또 무엇일까? 먼저 비전이란 자기계발서를 필두로 한 여러 책에서 권하는, 물어보는 과제에 대해 노트에 답을 해 보는 활동을 이름한 말이다.     

 

비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 활동이 나의 앞으로 나아갈 바와 평소 돌아보지 못했던 내면에 집중하려는 노력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비전이 있나요? 그 비전은 무엇인가요? 내게는 이 질문에 대답하게 해 주는, 이 질문을 곱씹어보게 하는 일련의 과제가 비전인 셈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쩐지 애매하니 실제로 비전에서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덧 세 권째가 되어가는 비전 노트에 담긴 과제 혹은 질문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1년 후 미래일기

* 이상적인 하루에 대해 써 보자. 누가 포함되어 있는가? 나는 뭘 하며 어디로 가는가? 주어진 하루를 당신이 가장 바라는 대로 상상해보자.

* 진정 행복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삶에서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진정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 시간과 돈을 어떻게 쓰는가? 시간과 돈이 흘러가는 방향에 만족하는가?     


예전에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적는 시간을 틈틈이, 기분 내킬 때마다 했다. 할 때마다 충전되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별로 자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꼬박꼬박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삶의 방향성을 점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하는 날, 그러니까 합창단 연습을 하러 나오는 날, 1시간이라도 일찍 나와서 카페에서 비전 노트를 채우면 좋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침 합창단 연습을 하는 음악당 바로 건너편에 평소 자주 가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커피 한 잔과 노트 한 권, 가끔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곁들였다.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차곡차곡 대답을 채워가는 시간이 나의 내면 깊은 곳과 연결되는 시간이라고 느꼈다.     


비전데이와 합창단 연습의 수요일은 주로 집, 집 근처 카페와 도서관, 모니터 앞에서만 작업하는 나에게 여유와 활기를 채워주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이 작업 능률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사를 오게 되면서 합창단 연습이 있는 죽전과 멀어지고, 간신히 연습 시간에 맞추어 가느라 비전 데이를 놓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비전 데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집에서 가끔 저녁 식사를 하고 비전 속 질문과 답을 채워가는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비전데이까지는 못 하고 있다.     


1년쯤 전인데도 죽전의 카페에서 비전 노트를 쓰고 합창연습을 하던 기억이 어느새 썩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열심히 살고 있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정신없이 떠밀려가며 살아지고 있는 건 아닌가도 싶다.      


그나마 (가끔 놓치더라도) 낯선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그 궤적을 연재의 형식을 빌어 꼬박꼬박 글로 남겨두려 한다. 비전데이를 못 지키고 있는 게 아쉬운 한편으로, 현재를 아등바등 나를 살아가는 나를 응원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기는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어떤 생에서든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나의 기준에서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렸다고 해도 그 생이 과연 행복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모난 채로, 어그러진 채로, 부딪히는 채로, 비틀거리는 채로 어떻게든 굴러가려는 사람. 굴러보려는 사람. 어딘가 일그러진 채로 어딘가 엉성한 채로도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2023년과 2024년의 비전 노트. 커피가 있고, 음악이 있고, 비전노트가 있다면 'Life is GOOD' 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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