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양양과 진천
프리랜서인 나는 작년 5월에도 뭐, 마감 속에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두 번이나 여행을 가기에 이른다. 한 번은 가족 여행이고, 다른 한 번은 합창단 엠티였다.
양양 솔비치는 워낙 좋았던 말을 들었던 터라 기대가 되어 마감을 앞두고서도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마감 때여도 다른 지역에 가서 신선한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오히려 효율이 좋아진다는 것을 몇 차례 확인한 후였다.
솔비치의 가장 큰 장점은 방에서 바다가 고스란히 보이는 뷰였다. 서핑으로 유명한 곳이여서 그런지 서핑을 하는 사람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서핑은커녕 바다 바로 앞까지는 가보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바다를 마주보며 일하는 기분이 제법 그럴 듯 했다.
문장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밀려오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파도멍의 망중한에 빠졌다. 당시의 나는 양양 여행의 가장 좋은 순간으로 이 파도멍의 시간을 꼽기도 했다.
두 번째로 속초 시장 나들이었다. 시장에 가자마자 막걸리 술빵을 파는 데로 달려가다시피했다. 지난 여행에서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빵을 세 개나 사 들고 희희낙락.
당연한 순서로 만석 닭강정을 사고, 오징어순대도 샀다. 아, 나 다이어트 하기로 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여행 와서는 먹는 게 남는 거잖아? 꼬랑치라는 회를 먹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 꼬랑치라니.
사실 양양, 속초에 간 자체는 낯설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 가족이 가장 자주 가는 여행지가 이기 때문이다. 솔비치에 갔다는 것, 바다를 마주하고 2박 3일을 보냈다는 것이 낯선 점일 터.
나름 소소하게 숙소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했다. 밤바다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보았는데 그들을 보며 좀 설렜고, 언젠가 나도 밤바다와 맥주를 즐겨보았다는 바람도 품어보았다.
두 번째 여행인 합창단 알토 파트 엠티는 원래 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카리스마 넘치시는 파트장님의 ‘막내도 분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톡이 눈에 박혀 또 따라나서고 말았다. 마감철 나의 여행은 주로 따라나서기 모드로구나.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곳(진천 휴양림) 으로 가다니 진정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진정이고 뭐고 엠티 가기 전날부터 영 마음이 불편했다. 낯선 사람들과 우르르 전혀 낯선 데로 엠티를 가다니...... 내가 즐기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진천으로 가는 차안에서부터 나는 슬슬 들뜨기 시작했다. 내 앞에는 나중에 알고보니 세상 인싸인 분이 앉으셨다. 60대의 나이에 ‘여행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면모를 자랑하시는 분.
이번에도 피레네 산맥 근처에서 두 달 동안 야영을 하시려다 인솔자의 갑작스런 질환으로 귀국하게 되셨다고 했는데 인솔자 분의 안위와는 별개로 나는 피레네 두달 야영이라는 말이 반짝반짝하게 들렸다.
정년 퇴임 후 여행과 합창에 올인하는 삶. 요즘 유행인 한달살기는 벌써 2017년부터 시작해서 매년 1월에는 베트남, 터키 등등에서 한달 살기를 하고 계신다고. 뭐야. 멋지잖아. 합창단 분들에게서 나의 5, 6, 70대를 어떻게 꾸려나갈지도 엿본 느낌이다.
휴양림이란 곳은 처음 와 봤는데 방 구하기가 치열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절로 편안하고 상쾌해지는 느낌. 엠티에 진심인 분들 덕분에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자기소개 타임도 있고, 스트레칭과 댄스인지, 율동인지도 이어졌다
요리전문가? 라는 이번 엠티 주최자 분의 예사롭지 않은 고기굽기 시간이 찾아오고, 소프라노이신 단장님이 보내주신 약과를 우적우적 씹는 와중에 어째서인지 나는 와인 담당이 되어 네 병의 와인을 따고 있었다. 와인 담당이라는 말이 무색치 않게 홀짝홀짝 와인을 들이키기도.
마감을 앞두면, 특히 마감 이주전이 되면 나는 초 비상 모드에 들어가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고 외출이나 운동 등 대부분의 활동을 삼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6월 초가 마감인데 5월 말에 두 번이나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면서도 또 제 시간에 마감을 했다. 마감 속에서도 여러 활동을 하고 여행까지 다녀온 것이 지난 5월 최대의 낯선 일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어느새 30번째 책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나도 마감을 하는 데 썩 익숙해졌다고 할 만도 하다. 마감과 더불어 십 수년을 살아가면서 내가 새삼 느낀 것은 마감과 동시에 삶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이 끝나면 해야지, 일하느라 못해, 라는 핑계를 달고 살면 그냥 내 삶은 일에 파묻혀 지나가버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일은 당연히 중요하고 마감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내게는 일 말고도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삶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 그런 삶은 오직 일만을 일순위만으로 해서는 지켜낼 수 없다.
그러니 일을 더 열심히 해야지, 무슨 여행을 다니고 있는 거야, 라는 등의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여행에 가서도 일과 씨름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여행은 부담과 걱정 속에 허둥대더라도 일과 삶을 함께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고 내게 새삼 ‘잘했어, 수고했어’ 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