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에게
나에게 남편보다 더 든든한 힘이 되어 준 딸
18살 나이에 한 살 아래인 남자와 혼인을 한 내가 20살 나이에 너를 낳았다. 너는 어릴 때부터 제법 공부를 잘했지. 너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100여 리 떨어진 전주에 있는 성심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지.
1921년 일제강점기시대에 태어난 나는 국민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못 배웠다고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그때부터 나는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을 때, 할머니와 고모들, 그리고 네 아버지도 모두 반대를 했다.
특히 아버지는 '아들 딸 모두 국민학교만 졸업을 시키고 아들들은 머슴살이를 보내고, 딸들은 식모살이를 보내라'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고향 오수의 중심에는 약국이 하나 있었지. 5일마다 장날이면 약국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약을 사려고 길게 줄을 섰단다. 나는 평소에 그것을 눈여겨보았다가 장날이 아닌 한가한 날에 약국을 찾아갔더구나. 그리고 약사에게 물어보았지.
"내 딸이 고등학교 3학년인데, 약사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약사는 "일단 약대를 진학해서 졸업을 해야 하고 약사 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야 한다'라고 대답을 하더구나.
그 후 내가 너에게 대학교에 진학하라고 했을 때, 너는 대학교 진학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지.
"엄마, 우리 집이 부자도 아니고 동생들도 저렇게 많은데 내가 어떻게 대학교를 가요. 고등학교만 졸업을 해도 나는 감사해요."
"아니다, 너희 아버지는 아들 딸 국민학교만 졸업을 시키고 머슴살이, 식모살이를 보내라고 하는데,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죽으면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래서 네가 대학교에 갔으면 좋겠다. 내가 죽으면 내 대신 동생들을 엄마처럼 보살피고 공부도 시키라고 너를 대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엄마, 그러면 내가 사범대학교 수학과에 진학을 할게요. 대학교 졸업을 하면 수학선생님이 될 수 있잖아요."
"아니다, 약대에 진학을 해서 약사가 되거라. 우리 고장에 장날만 되면 사람들이 약을 사려고 약국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더라. 약국을 하면 돈을 많이 벌겠더라."
그렇게 너는 전라북도 대학교에 약대가 없어서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에 서험을 치르게 되었지. 네가 조선대학교 약학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나는 너에게 물었다.
"어떠냐? 시험은 잘 봤냐?"하고 묻는 나에게 너는 자신 있게 "잘 봤다."라고 대답을 했지.
그 시절에는 합격증이 우편으로 배달되어 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합격증이 오지 않아서 너에게 "시험을 잘 봤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떨어졌나 보다"라고 의심을 했고, 너는 최선을 다해서 시험도 잘 치렀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 보니 내심 억울했던가 보더구나. 문득 너의 생각에 어쩌면 아버지가 합격증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고,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나도 너의 의심에 공감을 했지.
우체국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지가 근무하는 농협이 위치하고 있었던 탓에 어쩌면 우체부가 집으로 합격증을 배달하는 대신에 농협의 아버지에게 전달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던 거지.
그때 우리 집은 적산가옥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농협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사택으로 제공되었다가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가 구입을 한 집이었지. 지붕이나 외양은 한옥이었지만, 집안 내부 구조는 한옥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인 한옥은 변소가 외부에 있어서 본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면 우리 집 변소는 내부 복도와 연결되어 있어서 신발을 신지 않고 변소를 갈 수 있었지.
나와 너는 아버지가 변소에 가는 기회만을 엿보았다. 아버지가 변소에서 큰 볼 일을 볼 때 아버지의 옷을 뒤져보기로 합의를 헸지. 이윽고 아버지가 변소에서 큰 볼일을 볼 예정인지 휴지를 챙기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너와 나는 아버지의 양복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지. 아무리 뒤져도 합격증이 나오지 않아서 한순간 실망도 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의 지갑을 뒤졌는데, 세상에나 합격증이 담겼던 봉투는 없고 합격증만 아버지의 지갑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
나와 너는 그 합격증을 지갑에서 빼냈고, 서둘러서 너의 대학교 입학금을 여기저기서 빚을 내어 장만을 했지.
1960년 그때 당시 조선대학교 약학대학 입학금은 10만 원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2,500원이었으니, 무려 쌀 40 가마니 값의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서둘러서 빚을 내어 장만한 너의 대학 등록금을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에 달려가서 직접 납부를 했다.
너는 너무도 비싼 대학 등록금 때문에 어쩌면 대학교를 졸업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여러 차례 장학금을 타기도 했지. 너는 공부만 죽어라고 열심히 했더니 성적이 오르더라고, 그래도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다고 여러 차례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
나는 그때부터 너의 대학 진학과 관련하여 돈 한 푼도 주지 않는 아버지와 할머니, 고모들로부터 '어려운 형편에 딸년 대학교에 보낸다.'라고 원망을 들어야 했다.
너는 4년 동안의 대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처음에는 전주에 있는 보건소에 취직을 했지. 너는 보건소에서 첫 월급으로 9,400원을 받았지. 그때 쌀 한 가마니가 2,500원이었고, 너보다 먼저 보건소에 취직을 한 남자직원은 나이도 너보다 많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탓인지 너보다 월급이 적었다고 했다.
너는 첫 월급을 받아서 하숙비도 남겨놓지 않고, 월급봉투 그대로 나에게 건네주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네 아버지로부터 단 한 번도 월급봉투를 받지 못했는데, 딸이 나에게 준 첫 월급봉투에 너무나 보람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더구나. 지금도 내가 받은 너의 첫 월급봉투는 잊을 수 없는 벅찬 기쁨이고 감동이다.
너의 보건소 출근은 3개월 만에 끝이 났다. 애초부터 나는 네가 사범대학교에 진학하는 것보다 약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너에게 약국을 차려 주었다.
너는 1965년 24살 나이에 약국을 개업했다. 그 후로 78세 되던 2018년 10월까지 54년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 약국을 운영했구나.
너에게 차려준 약국은 고향 오수에서 50여 km 떨어진 장수군 장계면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계면에서 나름 번화한 장소의 3층짜리 건물 1층에는 너의 한일약국이, 2층에는 다방, 3층에는 당구장이 있었지. 그곳에서 너는 처녀 약사로 불렸지. 처음에는 나이 어린 동생들로 하여 처녀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었지만, 그런 오해는 금방 풀어지고 말았지.
언제인가 너의 약국이 있는 건물에 불이 나서 난리가 났던 적도 있지. 2층에 있는 다방에서 불이 나서 약국까지 불이 번졌을 때, 밖에 외출 중이었던 너는 불이 났다는 소식에 급하게 달려오느라 발목이 삐끗하는 바람에 하이힐 굽이 부러지기도 했지. 다른 것은 챙기지 못하고 외상장부와 금고만을 겨우 챙겨야 했던 긴박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뛰는구나.
전라북도에서 네가 처녀 약사로 소문이 나면서 김제, 전주 등 부잣집에서 보낸 중매쟁이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지만 너는 그 많은 부잣집의 며느리 되는 것을 모두 거절했지.
너는 밑으로 줄줄이 딸린 11명의 동생들을 앞으로 보살펴 줘야 하는데, 우리 집과 경제적으로 너무나 차이가 나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면 시댁의 눈치를 보느라 네 마음대로 친정집을 도와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좋은 혼처를 모두 거절했다고 했다. 결국 평범한 집안의 공무원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지.
나는 사실 그 남자가 너의 짝으로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너는 끝내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위로 두 딸, 아래로 아들 3남매를 두었지. 약사를 아내로 둔 네 남편은 진득하게 직장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지. 그 후로 여기저기 새로운 직장을 다닌다고 했지만 돈을 버는 기간보다 집에서 노는 시간이 더 많았지.
결혼 초기에는 서울 흑석동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화곡동에서 약국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능력이 많이 부족한 남편과 3남매를 낳고 키우고 가르쳐야 했던 너. 친정식구로는 부족하여 시댁까지 챙겨야 했던 너에게 나는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한 것은 아닌지 많이 미안하구나. 이런 나의 마음을 너에게 단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온 것이 참으로 후회되는구나.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너는 원하지도 않은 약사가 된 탓에 너는 너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지. 나에게 남편보다 더 든든한 의지가 되었던 너에게 마음으로는 많이 고마워하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 많이 미안하구나.
가끔 서울에서 자취하는 너의 동생들을 찾아갔다가 너의 약국에 들르면, 나의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워 주면서 "엄마~ 이번에는 이 반지를 팔지 말고 오래오래 끼고 계셔요."하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은방집에 들러서 네가 끼워 준 금반지를 팔았던 일도 여러 차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한 동생들과 계를 해서 모은 곗돈으로 너희들을 가르치느라 진 빚들을 갚아 주던 일. 어린 동생들의 학비와 용돈을 챙겨야 했던 일들.. 모두 모두 고맙고 감사하다.
나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었던 큰딸 문자야. 24살 나이에 약국을 개업하여 54년 동안 쉼 없이 약국을 운영하면서 살아온 네가 이제는 83살 나이가 되어 버렸구나.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네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너무 고생하지 말고 나에게 오너라. 그때 내가 너의 동생 금자와 손을 잡고 반갑게 마중을 가마.
사랑한다. 나의 큰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