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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Oct 21. 2023

둘째 아들에게

언제나 웃음과 즐거움을 선물했던 아들..

나의 둘째 아들 규중아.


내가 28살 나이에 너를 낳았지. 네가 태어나고 17개월 정도 지난 1950년에 6.25가 일어났지. 그때 피난을 떠나지 못한 너와 나는 우리 집 마루에 앉아서 삶은 고구마를 먹고 있었지.


이제 2살이 된 네가 나에게 무슨 이유로 화가 났는지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서 토방으로 내려가서 신발을 신더구나. 그리고  몇 개의 돌계단을 이용해서 마당에 내려가더니 신발을 마당 한쪽에 가지런히 벗어 놓고는 마당 한가운데서 마구 뒹굴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었지.


한참을 그렇게 뒹굴고 있을 때 내가 마당으로 내려가서 "우리 착한 아들이 왜 이리 화가 났을까, 엄마가 잘못했네..." 하고 다독였더니, 어린 너는 떼를 쓰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너의 특유인 장난기 섞인 웃음을 '씩~' 하고 짓더니 다시 신발을 신고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내고는 마루로 올라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고구마를 먹었지.



1949년 1월생 소띠인 너는 남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6살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지. 엄마는 무엇이 급해서 둘째 오빠를 그렇게 빨리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냐고 묻는 영라에게 나는 네가 너무나 공부를 하고 싶어 해서 아예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했단다.


6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너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진학하여 전주까지 기차 통학을 했지. 동기생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로 네가 공부를 따라가면서 피곤했는지, 어느 날인가 학교를 마친 후 기차를 타고 오수의 집으로 오는 동안에 그만 기차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서 내려야 할 '오수역'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지.


네가 집에 돌아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서 나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단다. 뒤늦게서야 네가 잠을 자느라 남원까지 가서 지금 남원역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지.


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진학을 했고, 그 후 전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를 졸업했지. 무릎이 튀어나온 아버지의 낡은 골덴 바지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대학교에 다니던 너를 보면서 마음 한편으로 내내 안쓰러웠던 마음이 들었단다.




1972년이던가? 큰형이 서독에 광부로 가 있을 때, 너는 군대에 입대해 있었지. 그때 너는 편지를 보내서 나에게 면회를 와 달라고 했지. 너를 면회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 후에 나는 네가 자원을 해서 월남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단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월남으로 가는 것을 결정하고도 행여 내가 걱정을 하게 될까 봐서 면회를 간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속 깊은 네가 아니더냐.


월남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있을 때 네가 집으로 보낸 편지 속에 들어있던 한 장의 사진이 지금도 생각이 나는구나.


몸매가 날씬어느 팔등신 아가씨 옆에 흐뭇하게 웃는 너의 모습에 네 동생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었지. 그 아가씨와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너의 어깨너머로 같은 부대의 전우들이 부러운 듯이 너를 바라보는 사진은 충분히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그런 사진이었다.


그 팔등신 미녀는 그때 당시 미스코리아로 선발된 후, 월남의 네가 근무하는 부대에 위문공연차 들렀다가 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했지. 그때 네 동생들은 사진 속 장난스러운 너의 표정과 팔등신 미녀의 모습만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단박에 걱정부터 했단다.


사진 속 너의 한쪽 발은 군화를 신었는데 한쪽 발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 네 동생들은 네가 빨리 사진을 찍으려는 급한 마음에 군화를 제대로 신을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었지. 훗날 너에게 그때의 일을 물어보았더니 네가 발을 다쳐서 부어올라 발에 군화를 신을 수 없었다고 했지. 부상당한 발을 가지고도 남보다 빠른 행동으로 팔등신 미녀와 사진을 찍었던 너는 민첩함과 정신력에 동생들은 또 감탄을 했던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지금 생각을 해 봐도 월남에서의 너의 군대생활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을 것 같구나. 정글에서 언제 어느 때에 베트콩과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 많았고, 사실 몇 번 마주치기도 했다고 했지. 그럴 때면 서로가 씩 웃고 그냥 지나쳤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눈앞에 닥쳐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지. 행여나 동생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너는 특유의 눈웃음과 재치 있는 말솜씨로 동생들을 한바탕 웃음과 함께 조금 전의 걱정은 훌훌 털어 버릴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했지.


네 동생들이 너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은 희망과 행복이 가득 찬 곳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너는 우리 가족의 희망이 되기도 했고 언제나 나에게 어려움을 의논할 수 있는 그런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너의 친한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너는 우리 집에서 동생들에게 했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고 했지.


"규중이는 절대로 친구들 사이에서 허점을 보이지 않는, 냉정할 정도로 완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주고 정을 나눈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절대 신뢰하고, 그 사람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서라도 도움을 준다"라고 했지.




나의 둘째 아들 규중아. 내가 너에게 많이 고마워해야 할 일이 있구나.


2000년, 너희 열두 남매가 모두 결혼을 하여 내 곁을 떠나고, 안양에서 나와 아버지 둘이서 살고 있을 때였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산서면 오산리에 있는 나의 친정집(너희 외갓집)을 잊지 못하고 먼 길을 오고 가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


그때 너는 낡은 외갓집을 허물고 새집으로 신축하여 나와 아버지를 그곳에서 살 수 있게 하자고 했지. 그때 다른 형제들은 외갓집을 허물고 신축하는 것이 나의 오랜 간절한 소망임을 알면서도 많은 반대를 했지.


나이 80이 넘은 나와 너희 아버지. 먼 곳에 살고 있어도 자식이 가까이 사는 곳으로 모셔 와야 하는데 가까운 데(안양)에 사시는 분들을 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해야 하느냐고 반대를 했지.


그때 너희 열두 남매 중 둘째인 네가 새집을 신축하는 일을 자청해서 떠맡았지만, 누구 한 사람 너에게 잘한다고, 잘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지. 그러나 너는 많은 형제들에게 비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외갓집을 신축하였고,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구나.


누구보다도 큰누나의 반대가 가장 컸었지. 하지만 그 후 여름휴가 때 큰누나가 외갓집에 다녀간 이후에

"잘한 일이라고, 생각보다 엄마, 아버지께서 만족하고 잘 지내시니 마음이 놓인다"라고, "다만 두 분이 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라고 했지.


외갓집을 신축하는 동안에 주말이나 주중에도 외갓집을 못 잊어서 밤길에 속도를 내어 달려오느라고 범칙금도 두 번이나 냈다고 했지. 내가 고속도로를 운전을 하며 달려오다가 고향을 표시하는 지명을 발견하면 두 팔을 벌려 좋아했다는 이야기에 나는 마냥 고맙고 마음이 뿌듯했단다.


나와 너희 아버지가 새집에 이사하신 후, 네 사무실 일은 내팽개쳐 두고 찾아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혼자서 하수도 공사, 장독대 공사, 그리고 수돗가 주변 공사를 했지. 확독을 인체공학적으로 계산하여서 허리와 엉덩이를 돌리기에 딱 좋은 높이로 맞추어 놓았다는 너의 허풍 섞인 너스레는 언제 들어도 행복한 웃음을 짓게 했단다.


네가 형제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어 준 그 집이 나에게는 행복한 보금자리였고 천국이었단다. 그 집에 13년 동안 아주 만족스러운 삶을 살면서 나는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느꼈는지 모른단다.


2013년  2월 17일 아침 9시. 그날이 너의 생일이어서 이제 막 미역국 한술을 뜨려고 하는데 '엄마께서 돌아가셨음'하는 나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고 했지.


그곳에서 파란만장했던 나의 93년 삶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잘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너의 생일과 내가 세상을 떠나 온 날이 같은 것도 너와 나의 인연이 각별하게 깊은 것 같구나.


올해 75살인 둘째 규중아.


앞으로도 너의 가족들과 형제들에게 즐겁고 긍정적인 좋은 기운은 듬뿍듬뿍 나눠 주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언제나 네가 만족해하는 삶을 살거라.  많이 많이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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