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셋째이면서 둘째 딸 금자야. 너는 어릴 때부터 손끝이 야무져서 음식 솜씨도 좋고 살람을 사는 솜씨도 남달랐지. 그리고 글을 쓰는 솜씨도 좋았고, 글씨도 어쩌면 그렇게 잘 썼는지...
너는 어릴 때부터 바로 위의 오빠를 좋아해서 어디든지 따라다니려고 했었지. 오빠가 친구들과 놀러 갈 때에도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때로는 오빠가 너를 귀찮아하기도 했었지. 행여 대문 밖으로 나갈 때마다 너를 떼어놓고 가려고 눈치를 살피기도 했지. 어느 날인가 그날도 평소처럼 따라가려고 떼를 쓰는 너를 오빠가 야무지게 두들겨 패서 방안에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너를 발견하고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처럼 깜짝 놀라기도 했단다.
너는 위로 큰언니와 큰 오빠, 그리고 밑으로 줄줄이 세 명의 남동생을 둔 까닭에 고등학교를 바로 진학시키지 못하고 한해 쉬게 했어야 했었지. 그 해 봄, 너는 집에 여러 마리의 병아리를 사 가지고 왔더구나 어쩌면 다음 해에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서 병아리를 키워서 계란을 낳게 되면 그 계란을 판 돈으로 너의 고등학교 입학금과 수업료를 장만하려고 했었던 게지. 그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너의 간절한 마음을 알게 되면서 나의 마음이 얼마나 저리고 아팠는지 모른단다.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도 했고, 고향의 우리 집과 외갓집을 오고 가면서 엄마 대신 동생들을 보살피고 집안 살림에도 큰 보탬을 주었지.
외갓집에 단감과 먹감이 익어가는 가을이면, 외할머니께서 감을 꾹꾹 눌러 담은 무거운 포대를 머리에 이고 오느라 목이 자라목처럼 쑥 내려가서 감포대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올라오지 않았다는 너의 말을 한바탕 웃음으로 날리던 때가 있었구나.
혼기가 꽉 찬 네가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월남 파병 군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장거리 연애를 하고, 이내 결혼을 하겠다고 했었지. 그 총각은 키도 너보다 작고 경상도 사투리가 유난히도 심했지만, 내가 차려준 음식이라면 무엇이라도 잘 먹고, 소탈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좋아 보여서 멀리 경상북도 경산으로 너를 시집을 보냈지.
처음에는 동네사람들이 네가 전라도에서 시집을 왔다고 거리를 두었지만, 너의 야무진 살림솜씨를 보고 자기들도 너 같은 전라도 며느리를 보고 싶다고 했다지. 그리고 너의 글 쓰는 솜씨를 알고 나서 네가 동네 사람들의 모든 편지를 읽어주고, 대신 편지도 써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위로 딸만 둘을 낳은 네가 세 번째로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하던 때도 잠시, 너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갑자기 찾아온 탓에 그 병을 낫게 하려고 너와 함께 안 해 본 것이 없었지. 그런 와중에 너의 둘째 딸을 5살 어린 나이에 사고로 황망하게 떠나보내기도 했지. 어쩌면 그렇게 모질고 힘든 시간이 너에게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둘째 아들을 낳아서 세 남매를 알토란 같이 야무지게 잘 키워서 대학교도 졸업시키고 남들이 부러워할 좋은 직장에 취직도 시킨 네가 2009년 7월, 63살의 나이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 버렸구나.
네가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을 해서 정밀검사를 해도 원인도 알 수 없는 그 몹쓸 병을 앓는 동안 나와 너는 단양 구인사를 몇 번이나 함께 다녔지도 모른다. 네가 그 병을 나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무엇도 망설이지 않고 다 해 주려고 했다. 그래서 너는 일곱 명의 딸 중에서 나와 가장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낸 각별한 딸이었다.
네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하던 내가 자꾸만 너의 안부가 궁금하여 너의 집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하면 너의 가족들은 네가 부녀회에서 여행을 갔다고 하기도 하고, 유렵여행을 떠났다고도 하면서 너의 죽음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살림을 하는 여자가 왜 그렇게 집안 살림은 나 몰라하고 여행만 다니느냐고 싫은 소리를 하는 나에게 너의 자식들도 네 남편도 제대로 된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셋째 며느리를 통해서 너의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마침 너의 천도재가 진행 중 이어서 뒤늦게 셋째 아들과 참석한 너의 천도재. 89살의 나는 화사한 한복차림의 너의 영정 사진 앞에 절을 하면서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 백일이 지난 손주를 두고 어떻게 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었는지.. 아직 결혼도 못 시킨 막내아들을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는지..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할라치면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서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일을 해 주었던 네가 나를 떠나갔다는 것이 차마 믿어지지 않았다.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나는 너의 빈자리를 너무나 자주 느껴야 했다. 그렇게 준비 없는 이별을 한 후에도 너의 3남매는 다 자리를 잡고 잘 살아가더구나. 너의 딸은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딸을 출산하였고, 장남은 딸 둘을 더 낳았구나. 그리고 막내아들은 결혼을 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매년 5월이면 너의 아버지와 나의 합동제사에 너의 아들들이 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는 것을 보니, 네가 적지 않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 농사는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둘째 딸 금자야. 내가 너에게 더 고마워하는 일이 있다.
2013년 2월 17일 오전 9시. 내가 숨 한번 크게 내쉬고 더 이상 숨을 들이쉬지 않을 때 얼른 나에게 달려와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처음으로 떠나는 나의 저승길이 네가 있어서 외롭지 않고 따뜻했다. 내가 세상을 떠나온 지 10년. 너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마음 놓고 훨훨 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내 옆에서 동무가 되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