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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Oct 21. 2023

큰 아들에게

나의 가장 아픈 손가락 큰 아들..

나의 큰 아들 풍작아.


나는 23살 나이에 너를 낳고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단다. 형제도 없이 무남독녀 외동딸로 외롭게 자란 내가 너의 누나를 낳고 아래로 너를 낳은 후 얼마나 기뻤는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


불면 하늘로 날아갈세라 땅으로 꺼질세라.. 노심초사 너를 키우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던 일도 있었지.  


집 근처 냇가에서 잡아 온 대사리(다슬기)를 삶아 고향집 마루에 앉아 누나가 옷핀으로 대사리 살을 빼내어 너의 입에 넣어주었지. 그때 네가 웬간히도 대사리가 맛이 있었는지 힘껏 빨아들이는 바람에 옷핀까지도 너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말았지. 깜짝 놀란 누나의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깐 망설였지만 얼른 가마솥에 고구마를 삶아서 너에게 먹이기 시작했지. 몇 개의 고구마를 연달아서 너에게 먹이고 다음 날 네가 싼 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네가 대사리와 함께 삼킨 옷핀을 발견하고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단다. 지금도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지는구나.


고향의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도 곧잘 했던 네가 6학년 때 전주에 있는 북중학교에 진학을 하려고 했지만, 6학년 담임선생님이 너보다 성적이 부족한 다른 친구에게 입학원서를 써 주고 너는 서중학교 원서를 써 주었지. 결국 그 친구는 북중학교 불합격하였고, 너는 북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과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유로 오랫동안 담임선생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졌었지. 훗날 그 담임선생님이 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구나.


너는 고향에서 100여 리 떨어진 전주에 있는 서중학고, 신흥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기차통학을 했지. 그 후로 네 동생 규중, 건우도 전주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너와 기차통학을 하게 되어 나는 늘 마음이 든든했다.


너의 고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친구와 함께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치렀는데 친구는 합격을 했고 너는 낙방을 했지. 그때 너는 합격을 한 친구보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믿지 않았기에 재수를 해서라도 서울대학교에 가겠다고 한번 더 도전을 했지만 합격하지 못했지.


그래서 너후기대학으로 인천에 있는 인하대학교 공대에 지원을 해서 합격을 했지.  1965년 그 당시에는 인하대학교 공대도 서울대학교 공대만큼 들어가기 쉽지 않은 학교였지.


나는 네가 장남이기에 농협에 근무하고 있는 아버지가 네 누나와는 다르게 입학등록금을 마련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구나. 그러나 등록 마감일이 이틀 후인데도 아버지는 너의 대학 등록금 준비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말도 없더구나.


그때서야 뒤늦게 심각한 사태를 파악한 나는 주변의 여기저기를 급하게 쫓아다니며 등록 마감일 하루를 앞두고 너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단다. 등록 마감일에 나는 어럽게 준비한 입학등록금을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열한째 명를 등에 업고 인천으로 향했구나.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1965년. 고향 오수에서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또 버스로 갈아타고, 어린 딸까지 둘러업고 인천에 있는 인하대학교로 부랴 부랴 달려가는 동안 엄마의 마음은 내내 두근거렸단다. 지금도 그때의 절박한 마음을 잊을 수 없구나.


그렇게 도착한 인하대학교에서는 등록 마감시간이 30분 지났다고 너의 등록금을 받아 주지 않더구나. 내가 아무리 간절하게 사정을 해도 끝끝내 안된다는 무정한 말에 나는 힘없이 돌아서야만 했구나. 그 시절에는 등록을 하지 못한 자리에는 돈이 많은 집의 자녀가 많은 입학 기부금을 납부하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


등록 마감시간 이전에 도착하기 위해서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달려갔던 그 먼 길을 허탈한 마음으로 뒤돌아 오면서 나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통한의 눈물을 뿌리면서 왔구나.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단다. 이제부터 너희들 교육에 있어서 절대로 아버지를 믿지 않겠다고. 무엇보다 대학교 입학금은 빚을 내어서라도 일찌감치 장만하여 두 번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단다.


그렇게 대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너는 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때 네가 인하대학교 공대에 입학을 했더라면 지금보다 너의 삶이 훨씬 풍족하고 살기가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은 달랠 수가 없었단다.  


그 후에 너는 군대에 입대를 했지. 네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올 때 우리 집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서 놀고 있는 어린 명리를 발견이라도 하면 너는 동생을 번쩍 안아 들어 올려 목마를 태우고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서고는 했지.


네가 군대를 제대한 후 집 앞 빈터에 양계장을 지어 놓고 닭들을 사육하던 일, 우리 집 토방에 벌통들을 세워 놓고 양봉을 하던 일이 나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구나. 꽃 가꾸는 것을 좋아했던 네 덕분에 우리 집 꽃밭은 다양한 종류의 장미꽃들과 백합, 많은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지.


그러던 네가 서독으로 광부 생활을 하러 떠났다. 너는 3년 동안 서독에서 광부 생활을 하며 번 돈을 나에게 보내 주어서 네 밑의 동생들이 학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네가 서독에서 보내 준 돈이 없었다면 너의 동생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단다. 너는 정작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낯선 외국에서 온몸으로 벌어 들인 돈으로 너의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부담할 수 있었구나. 너에게 내가 고마워하는 것이 또 있구나. 너는 한 번도 동생들이 대학교에 간다고 배를 아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지.


네가 서독에 있을 때, 너의 동생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앉아 마치 군인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듯 너에게 편지를 쓰던 기억이 나는구나. 너에게서 편지가 도착하는 날이면 모두들 얼마나 반가워들 했는지 모른단다. 여백이 그리 많지 않은 봉함되는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지.


서독에서 돌아온 너는 그 시절에는 조금 늦은 나이인 31살에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두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밑의 동생들보다 너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보여서  나는 항상 안타까웠고 마음 한편이 저렸구나.  


너는 고등학교시절부터 시(詩) 쓰기를 즐겨하더니 1987년 월간 <예술계>에서 신인상에 당선이 되어 등단을 했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지만, 시를 쓰면서 정신적인 부분에 만족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무척 좋았단다.


그러나 13년 전인 2010년 7월, 너의 처가 59살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너는 또 나의 안타까운 아들이 되었지. 결혼 적령기인 두 아들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노후준비를 다 해서 살만하다고 말하던 네 안사람이 황망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렇게 세상을 떠난 큰며느리도 안타까웠고, 너와 두 아들도 안타까웠다.


너의 안식구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3년. 혼자 몸으로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며느리를 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 덕분에 장손과 두 손녀의 재롱을 보면서 보람도 느끼고 있겠지? 얼마 전에는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더구나. 이제 수술도 했으니 너의 건강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구나.


어느덧 너의 나이도 80살이구나. 네 몸이 건강해야 세명의 손자 손녀들, 그리고 며느리들 아들들과 행복한 삶을 누리지 않겠느냐?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만족한 삶을 살다가 적당한 때에 네 안사람과 내가 있는 곳으로 오너라. 네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는 부디 이생에서의 너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구나.


 나의 장남 풍작아. 앞으로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보내기를 엄마는 빌고 또 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 한 풍 작



빈주먹 펴면

꿈은 아득하고

고개를 들면

하늘이 암울한 시절


기다리던 방학

뿔뿔이 흩어졌던

초. 중. 고. 대

줄줄이 사탕이 모인다


기둥뿌리 흔들흔들

끼니때 밥상에 둘러앉아

제 몫을 챙기다 보면

한 그릇 모자랄 때가 있었다


계면쩍어하시는

어머니의 실소 앞에

저마다 한 수저씩 모으면

한 그릇 거뜬했다


딸. 아. 딸. 아. 아. 아.

딸. 딸. 딸. 아. 딸. 딸.

사실은 십이시일반(十二匙一飯)


울리고 웃기면서

끌어주고 밀어주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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