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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Oct 21. 2023

셋째 아들에게

나를 위해 천일기도를 해 준 고마운 아들..

나의 셋째 아들 건우야.


너는 평소에도  말수도 적고 과묵해서 나는 항상 든든함을 느꼈단다. 그렇게 과묵한 너도 어린 시절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나에게 선물했었지.


추석을 며칠 앞두고 나는 장을 보러 간다고 집을 나서면서 너의 신발도 사 오겠다는 약속을 했었지.  그때 너는 내가 신발을 사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찾아 대문을 나섰지. 그러나 아직 어린 네가 방향 감각이 부족했던 탓에 장터와는 반대방향인 남원으로 가는 신작로를 따라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고 했지.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네가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온 가족들이 너를 찾아서 동네 골목을 찾아다니는 소동이 벌어졌었지. 가족들이 너를 애타게 찾는지도 모르고 너는 먼지가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몇 시간 동안 앞으로만 자박자박 걸어갔다고 했지. 그러다가 마침 나를 잘 아시는 이웃동네 아저씨가 소달구지를 타고 남원 방면에서 오다가 너를 발견하였고, 너에게  "지금 어디를 가느냐?'라고 물었더니, 너는 태연하게도 "엄마를 찾아서 장에 간다"라고 했더라지.


눈썰미 좋은 그 아저씨는 너를 번쩍 안아 자신의 소달구지에 태우고 우리 집까지 태워 주었지. 그 고마운 아저씨가 너를 우리 집에 데려다 주기 전까지 우리는 너를 영영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지.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우리 가족들에게 웃음 섞인 이야깃거리가 되었단다.


너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지.

그 당시 너희 아버지는 고향에서 번화가라 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은 농협에 근무를 했었지. 그때 아버지는 내가 싸 주는 도시락을 가지고 출근을 했었는데, 어느 날 도시락을 깜박 잊고 그냥 출근을 했더구나.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너에게 농협으로 아버지 도시락을 가져다주고 오라는 심부름을 보냈었지.

네가 도시락을 가지고 농협에 도착을 했을 때, 아버지는 점심을 먹었다고 그냥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었지. 그러자 너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농협의 창문 아래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펼쳐 놓고 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의 밥상에 놓인 반찬과 너희들 밥상에 놓인 반찬은 분명하게 차이가 났었지. 그래서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면 너희들은 아버지 밥상에 남은 반찬을 서로 먹으려고 했었지. 하물며 농협에서 먹는 아버지의 도시락 반찬이니만큼 엄마의 정성도 각별했겠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너는 농협 건물 아래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펼쳐 놓고 먹어버린 것이겠지.


그때 아버지와 같은 농협에 근무를 하고 있는 아저씨가 너의 그 모습을 보고  빵 하나를 사 주었다지. 그 아저씨도 그렇지. 너희 형제들이 몇 명인데 달랑 빵 하나만 사 주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아버지의 도시락도 다 먹어서 배도 부르겠다, 그 맛있는 빵을 형과 동생, 그리고 누나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겠지.


집으로 그 빵을 가지고 왔더니, 큰 형, 둘째 형, 네 동생과 누나들이 "나 한 입만, 나 쪼끔만..."하고 너에게 매달리는 바람에, 너는 달랑 하나뿐인 빵을 여러 사람들과 나눠 먹으려니 너에게 할당될 양이 너무 적을 것 은 생각에 작은 방에 숨어서 그 빵을 다 먹어버리고 말았지.

그때부터 형들과 누나들에게 너의 별명은 '돼지''밥통'이었다. 아버지의 도시락을 다 먹은 상태에서도 빵 하나를 통째로 다 먹었다는 이유로 누나와 형들에게 너는 오랫동안 돼지와 밥통으로 놀림을 받았었지.




원리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고지식해 보일 정도로 올곧게 살아가는 너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네가 사법시험에 합격을 해서 판사를 하면 아주 잘했을 거라고 생각을 했단다. 그래서 네 동생들 앞에서 자주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단다.

 

"셋째 오빠가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너희 아버지가 자식들 교육에 조금만 신경을 쓰고, 가정에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셋째 오빠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라고.


네가 전주에 있는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하겠다고 서울대학교 입학원서를 사 가지고 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네가 사 온 서울대학 입학원서를 찢어 버리고 말았지.


"만약 네가 큰 형처럼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지 못하고 떨어지면, 네 밑의 동생들이 많은 탓에 재수를 시킬 수도 없고, 그러면 큰형처럼 아예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할지 모른다고 했지. 그러니까 확실하게 합격할 수 있는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써넣거라"라고 했지. 그런 나의 단호함 때문에 너는 전북대학교 법대에 진학을 하였고 졸업했지. 전북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너는 사법시험 준비를 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계속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고,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지.


1981년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한 너는 아들, 딸 남매를 두었지.


2008년 2월 21일, 법대에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준비하던 너의 아들 승엽이가 26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

그때까지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너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네 동생이 다니고 있는 원불교 교당에서 승엽이의 49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지. 그때 이후로 너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원불교에 다니고 있지. 26살 젊은 자식을 떠나보내고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을 가진 너는 종교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싶었겠지.


너희 다섯 형제들 중에서 나처럼 원불교를 다니는 아들이 없었는데, 2008년 승엽이를 떠나보낸 이후부터 네가 원불교를 다니게 되어서 나는  은근히 기분 좋았단다.


너는 승엽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부조금을 아들의 친구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했다는 이야기를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네 안사람에게 들었다. 너는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돈을 의미 없이 쓰기보다는 뜻있게 사용하고 싶었다고 했다지. 승엽이가 세상을 떠나기 이전부터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친구의 사정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을 기억했고, 그 친구에게 망설임 없이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했다.


그 후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금액을 아들 친구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하였고, 마침내 그 친구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여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승엽이의 기일이면 너희 집을 찾아온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어쩌면 너와 승엽이가 이루지 못한 사법시험 합격에 대한 꿈을 그 친구가 대신 이루었다는 뿌듯한 보람도 느꼈겠구나.




2010년 6월 14일. 너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있는 내가 걱정이 되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이면 9시를 전후하여 안부전화를 하는 것도 너였지. 그래서 엄마는 매일 아침이면 "우리 효자 아들의 전화를 받아야지~"하고 너의 전화를 받기 위해서 거실에 있는 전화기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매일 너와 안부전화를 받고 나서야 마당과 텃밭에서 일을 시작했단다.


2013년 2월 17일 아침 8시 30분쯤, 엄마의 93년 삶을 마무리는 하는 순간도 너와의 전화통화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일요일 아침이었던 그날, 어느 날처럼 변함없이 걸려 온 전화로 너의 목소리를 확인한 나는

"오늘 일요일인데 교당에 나가냐? 교당에 가서 마음공부 잘하고 오너라"하고 이생에서의 나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너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앉은 채로 거실에서 안방 방문을 넘어가다가 갑자기 나의 몸이 뒤로 넘어갔지.

그때 내 옆에서 너와의 전화 통화를 지켜보던 요양보호사가 뒤에서 나를 가슴으로 안았단다.


그 순간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는 숨을 들이마시지 못했다. 그때 나의 모습을 보고 당황을 한 요양보호사는 곧장 너에게 "지금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숨을 쉬지 않는다"라고 전화를 했지.


그렇게 93년 동안 이어왔던 나의 삶을 마무리한 후, 너희 열두 남매는 나의 49 천도재를 지냈고,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 법회도 지냈고, 백일기도도 지냈었지.


이제 세상을 떠난 나를 위해서 자식들이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너는 매일 새벽마다 다른 형제들도 모르게 나를 위해서 천일기도를 해 주었지. 매일 이른 새벽마다 100일 기도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1년 365일 기도 하는 것도 어려울 텐데 1,000일 동안의 기도라니.. 매일 천일 동안 나를 위해 기도를 하는 너의 정성에 엄마는 정말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2015년 11월 13일인 금요일, 천일 동안 나를 위해 진행하였던 기도를 너는 무사히 마무리하였구나.

너의 기도 덕분에 엄마는 너희 열두 남매를 떠나 온 이곳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잘 지내고 있구나.


그동안 나를 위한 천일기도를 하고 있다고 형제들에게  내색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그 사실을 모르는 형제도 있을 것이다.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 묵묵히 너의 판단과 생각을 끝까지 실천하는 성실함과 꾸준함을 나는 칭찬하고 싶구나.


나의 셋째 아들 건우야. 너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년 동안 매일 아침 9시면 나에게  안부전화를 해 주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나를 위해 천일 동안 정성을 다 해 기도를 해 주어서 고맙구나.


이제는 이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너의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무나.  이제 너도 72살 나이가 아니더냐. 비록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 큰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지만, 네 스스로 만족하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거라. 엄마의 진심 어린 부탁이란다.


나의 셋째 아들 건우야.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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