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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Oct 22. 2023

셋째 딸에게

65살 나이에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한  딸..

나의 셋째 딸 혜성아.


너는 어렸을 때부터 손 끝이 야무져서 음식 솜씨도 좋고 살림솜씨도 좋았지. 네 위로 명의 오빠를 둔 탓에

다른 딸보다 네가 더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단다.


어린 시절부터 확독에 보리쌀을 가득 담아 갈아서 삶고 밥을 짓는 너의 모습을 보고 뒷집 할머니가 "어린 네가 고생이 많다"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지.


고향에서 네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너의 아버지가 다니던 농협을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너와 밑의 동생들이 아버지의 끝없이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기도 했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곧잘 하던 너는 3학년 때 전교회장에 출마해서 여자회장에 당당하게 당선되기도 했지.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을 해서 서울로 상경을 했지. 그때부터 너는 직장을 다니면서 위로는 큰 오빠, 둘째 오빠, 셋째 오빠, 넷째 오빠. 아래로는 막내 규선이까지 네 손으로 지은 밥을 먹지 않고 보살핌을 받지 않은 남자 형제가 없을 만큼 너의 고생이 많았구나.

 

그래서일까? 큰 오빠와 둘째 오빠가 결혼을 하고 난 후, 내 생각에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 그래서 네가 결혼을 하겠다고 인사를 시킨 총각을 두고 "엄마는 몇 점이야?"하고 묻는 너에게 망설이지 않고 "빵점이다!"하고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지.


열두 형제 중에서 너의 뒷바라지를 받지 않은 한 사람도 없구나. 너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도 오빠들과 동생들 모두 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 않더냐?


1979년에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손끝이  야무진 너는 맏며느리가 아니면서도 맏며느리 노릇을 해 냈고, 시댁에도 친정에도 완벽할 정도로 잘 살아냈지.


1986년 열두 째인 막내가 연세대학교에 합격을 했지. 너희 형제들은 막내가 명문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한자리에 모여서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지.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없다 보니, 막내의 등록금은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자고 했지. 형편이 제일 나은 사람부터 먼저 등록금을 내주고, 형편이 어려운 형제들은 뒤에, 형편이 더 어려운 사람은 두 사람이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지.

막내는 자신보다 2살 위인 언니가 자신의 학비와 용돈, 생활비까지 보태고 있는데, 자신은 형제들 도움으로 위의 언니보다 편하게 대학교를 다니는 것이 '큰 빚'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용돈을 스스로 마련하려고 했지. 시험기간이면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여 장학금을 받고자 했고, 동아리 활동으로 바쁜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로 개인 과외를 지도하기도 했지.

 노력으로 막내는1987년 학생으로서 적지 않은 100만 원이라는 돈을 저축했지.

그러던 어느 날, 막내가 통장에서 약간의 용돈을 찾기 위해서 교내 은행에 들렀다지. 자동 출납기에 통장을 넣고 당장 필요한 만원을 인출하고 통장을 가방 앞 작은 주머니에 넣고 은행을 나섰지. 한참 후에 문득 가방 앞의 주머니가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넣어 두었던 통장이 감쪽같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지. 정신없이 은행으로 달려갔지만 통장의 모든 돈은 현금출납기에서 인출이 끝나버린 상태였지.

막내의 그 돈은 그렇게 쉽게 써 버릴 돈이 아니었지. 막내의 땀과 노력으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얼마나 허탈한 마음이었을까... 속상한 마음에 몸살까지 앓고 있다는 막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너도 막내만큼이나 속상해했다지.


그러던 네가 막내가 빈 통장을 볼 때마다 속상해할 거라는 마음에 막내의 빈 통장에 잃어버린 만큼의 돈을 소리 없이 채워주었지.

그때 당시 너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는, 결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기에 막내 통장을 채워 주느라 어쩌면 너의 가계부는 오랫동안 적자에 허덕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막내 동생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 망설임 없이 통장을 채워 준 네가 나는 고맙고 또 고맙구나.




2015년 1월이었지. 환갑을 눈 앞에 둔 네가 너 스스로에게 환갑선물로 스페인의 산티아고순례길을 선물하고 싶었다지.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산티아고순례길을 위한 준비를 했지만, 네 남편의 갑작스러운 혈액암 발병으로 산티아고순례 계획을 스스로 취소해야만 했지.


그렇게 시작된 남편의 간병. 환자보다 곁에서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보호자가 더 많이 힘들지 않더냐. 결국 네 남편은 건강을 회복했지만, 오랜 기간 암환자의 간병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너는 많이 힘들어했지.


그런 상황에도 네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 하고자 하는 일을 찾더니 2020년에 65살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입학을 했지. 너의 그 소식을 듣고 엄마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단다. 네 위로 오빠들과 네 밑의 여동생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네가 애써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겠느냐.


2020년 예상치 못한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비대면 강의를 들었다지만, 너는 1학년 1학기부터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았구나.


너의 형제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마치 자신의 일인 듯 기뻐하면서 너에게 축하인사를 전했지. 그리고 앞을 다투어서 너의 등록금을 부담하겠다고 스스로 자청하지 않더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이 모든 것이 네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형제들을 위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게 4년 동안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여 전 과목 A+ 성적을 받기도 하고, 과 활동에도 임원으로서 열심히 참여하여 전국을 다니더니, 이제는 통과하기 어렵다는 방송통신대학교 졸업논문이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구나.


내 딸 혜성아. 정말 장하고 장하구나.


같은 과에 다니는 학우들과 모임 자리에서 너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었다지.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우들이 많았다. 그래서 스스로 배움의 길을 걷고자 검정고시 등 눈물 나는 여정을 거쳐서 지금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우들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는 너의 이야기.  


네가 학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어렵던 시절에 때를 놓치지 않고 너희 열두 남매를 가르치느라 고생했던 엄마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고. 너의 그 말에 나 모든 고생들이 눈이 녹듯 사르륵 사라지더구나.


68살 나이에 방송통신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졸업사진을 찍은 너의 모습이 멋지고 자랑스럽더구나. 네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니 더 값지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들을 떠나 온 10년 동안에도 너의 수고가 아주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네 위로 6명의 언니, 오빠들. 네 밑으로 5명의 동생들을 중간에서 잘 아우르고 챙기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셋째 딸 혜성아.


그동안 너의 희생과 수고에 고맙다는 인사를 이제야 이렇게 전하는구나.

앞으로 네가 어떤 길을 걸을지 몰라도 엄마는 너를 응원한다.


엄마는 너를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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