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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Oct 22. 2023

넷째 딸에게

태평양같이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딸...

나의 넷째 딸 강희야.

이렇게 이름을 불러놓고 보니, 너와 나는 다른 딸들과 다르게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구나.


너를 출산하던 그때가 생각이 나는구나. 1957년 36살 나이에 너를 낳았지. 고향집 안방에 너희들이 주르륵 누워 잠든 12월의 쌀쌀한 새벽이었지. 잠을 자다가 출산 기운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적당한 출산자리를 찾지 못해서 안방과 변소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 그러다가 그만 변소 나무바닥에서 너를 출산하고 말았구나.


갓 태어난 너를 치마폭싸 가슴에 안고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 "야들아~ 그만 일어나거라.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


그 후 어느 점쟁이가 네가 변소에 태어났다고 이름을 '분순'이라고 지어 주었지. 그래서 네 밑의 동생들이 너를 놀릴 때면 "분순아 분순아"하고 부르기라도 하면 어지간히 너그러운 성격의 너지만 벌컥 화를 내고는 했지.


나는 너를 끝으로 더 이상 아이를 출산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고만 땡'이라는 뜻으로 "만땡"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네 밑으로도 4명의 동생을 더 두었으니 어디 사람의 일이 마음대로 되더냐?


너는 성격이 다부진 것도 아니었고, 야무진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지. 너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잘 되기를 바라고, 그 사람들의 안부를 항상 궁금해했지.


너는 주변 상황이 어떠하든 책상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남달랐지. 그래서 전라북도에서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입학한다는 전주여자고등학교에 합격을 했지. 처음에는 넷째 오빠와 자취를 했고, 네 밑의 동생이 성심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동생과 자취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오수의 작은 방에서 공부를 하던 너의 모습이 생각나는구나. 아버지가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밤에는 공부지 말라고 하자, 작은 방 출입문을 얇은 담요로 가리고 공부를 했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애비 말을 무시하고 공부를 한다'라고 책상 앞에 앉은 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모습이 생각나는구나. 그때 화를 꾹꾹 눌러 참던 안타까운 너의 얼굴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구나.


너는 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합격을 했지. 그리고 건국대학교 야간대학 법학과에 진학을 해서 직장생활과 학업을 함께 했지.  


그런 네가 1986년 5월에 결혼을 하고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았지. 시댁이 있는 전주에 신혼집을 차렸지만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너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안양의 친정집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동생들과 함께 생활을 했지.


1987년 네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네가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네 아들을 보살펴주겠다고 했다.


나는 30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산서 외갓집을 오고 가면서 바쁘게 생활을 하느라 그때까지 손자 손녀를 보살펴 주지 못했지. 다만 너는 결혼 후에도 나와 함께 지냈고 그 좋은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너의 아들을 키워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1988년에 연년생으로 둘째 아들 형재를 출산했지. 내가 두 아이를 키우게 되었고, 그 아이들이 자라 걷게 되면서 집 근처 어린이집에 보내기도 했지만, 70이 다 된 내가 두 아이를 감당하기에는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단다.


그 사실을 알고 결혼을 하지 않은 네 밑의 동생들이 엄마가 열두 자식의 엄마이지 넷째 언니 혼자만의 엄마이냐고, 분가를 하거나 전주 네 남편 곁으로 내려가라고 했지. 그런 상황에서 네가 다니는 직장에 전주로 발령을 요청한 것이 이루어져서 1990년에 두 아들을 데리고 전주로 이사를 했다.


2001년 봄에 내가 둘째 오빠의 도움으로 산서면 오산리 외갓집 신축해서 이사를 갔지. 그때부터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넷째 사위와 두 아들을 데리고  40여분 거리에 있는 나를 자주 찾아와 주었지. 너의 가족들과 전국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행도 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참으로 많이 보냈다. 두 외손자들도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자신들을 키워 주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나에게 얼마나 살갑게 대하던지.. 너희 가족들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단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너의 가족과 모든 시댁 식구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했지.  사무관 진공를 하던 네가, 공무원생활을 20년 넘게 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법무사사무실을 차릴 수도 있는 네가 그 좋은 직장그만두고 사랑스러운 두 손주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이 나에게는 내내 서운하게만 느졌구나.


그러나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 가족들이 나의 가까운 곳에 살아서 자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너희 바람대로 보내 줄 수밖에. 그렇게 2003년 5월에 너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구나.


너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면 자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앞섰지만, 너의 가족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주 한국을 찾아왔지. 다만 너의 둘째 아들 형재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9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마음 한편이 아쉽기도 했구나.


2012년 8월, 태풍이 지나가고 집 밖에 쌓아 둔 쓰레기를 바깥 아궁이에 태우다가 쓰레기 속에 숨겨져 있던 에프킬라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나는 두 팔과 두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전주에 있는 병원에 4주 동안 입원을 하게 되었지. 4주 동안 침대에 누워서 2명의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다. 어느 정도 화상을 입은 상처가 치료가 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을 때, 4주 동안 움직이지 못한 내 다리의 근육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더구나.


그때는 나의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예전처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나는 두 며느리의 도움으로 산서집으로 돌아왔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생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몸인데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나는 오빠 언니들에게 요양원 생활을 요청했구나. 그렇게 나는 수원의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네 남편을 통해서 둘째 아들 형재가 보내준 3장의 손 편지는 요양원생활을 하는 나에게 기쁨과 보람을 선물해 주었단다.


형재는 편지에 주립고등학교와 주립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썼더구나. 세계연방준비위원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워싱턴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 온 지 9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10년이 되는 2013년에는 꼭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네 남편이 이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장모님께서 형재의 편지에 답장을 써 주시면 전달해 주겠다"라고 요청을 하더구나. 그때 요양원 병실의 침대에서 나는 노트에 연필로 지를 써서 네 남편에게 주었지. 그 편지를 받은 형재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책상 앞의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면서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고 있다고 했다. 내 마음보다 더 크게 받아 주어서 나는 고마웠다.


내 편지를 가까운 곳에 두고 힘을 받은 형재가 듀크대학에서 장학생으로 박사과정도 무사히 마쳤고,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결혼도 했지. 연필로 쓴 내 편지를 액자 속에 넣어서 책상 위에 세워놓고 지금도 계속 동기부여를 받고 있다니, 내가 편지에서 부탁한 일들을 형재가 잘 이루어 줄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단다.


나의 넷째 딸 강희야.

너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처음에는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자리도 잡아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두 아들도 알토란 같이 잘 커서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잘 지내고 있다니 감사한 일이다.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한국에 자주 들어와서 가족모임에도 참석하고 형제들 행사에도 빠짐없이 보탬을 주고 있으니 너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고맙다.


너에게는 내가 딱히 부탁할 일이 없구나. 다만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잘 지내거라. 주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두면서 항상 안부를 확인하는 너의 모습에서 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거라.

그리고 형재에게 외할머니가 마지막 편지에 쓴 부탁을 이루어준다면 아주 행복해 할 거라고 전해 주면 고맙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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