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딸에게
엄마 앞에 당당한 삶을 살고 싶다는 딸..
우리 열한째, 여섯째 딸 명라야.
이렇게 너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는구나. 1964년 6월, 내가 43살 나이로 너를 낳았다. 서쪽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는 시간에 고향집 안방에서 너를 낳았구나. 너를 낳자마자 마침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갔던 둘째 언니 금자가 집에 도착을 했지. 금자는 출산을 한 엄마를 보더니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정재로 가서 미역국부터 끓여서 나에게 가져다주었지.
이제 막 태어난 너를 보고 금자는 이렇게 말을 했단다.
"엄마가 애기가 많이 크네요. 첫 번째 이레(생후 7일)만 지내고도 사람들에게는 세 이레(생후 21일)가 지났다고 해도 믿겠어요."
나는 유난히 크게 태어난 너를 보고 서울대학교에 가겠다고 재수를 하고 있는 큰 오빠에게 "비록 남자가 아닌 여자이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 주거라"라고 했다. 그래서 큰 오빠는 너의 이름을 밝을 명(明) 비단 라(羅), 명라(明羅)라고 지어주었구나.
나는 너를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을 줄 알았는데(너의 넷째 언니 때부터 이렇게 생각을 했었구나) 네 밑으로 막내를 더 낳았지. 네 동생이 태어난 후 너는 산서 외갓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지.
내가 외갓집을 찾아가면 너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가 헤어질 때에는 나에게 "엄마~ 까까 이~"하고 다음에 올 때에는 과자를 사 오라고 했지. 그리고 외갓집 앞 길가에 있는 호두나무까지 따라 나와 호두나무 가지를 붙잡고 멀어져 가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했다.
너는 외갓집에서 6살까지 지내다가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오수의 집으로 왔단다. 너는 공부에는 통 정신을 쓰지 않았다. 넷째 언니가 빌려오는 만화책을 즐겨보거나 그림을 잘 그려서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구나. 그리고 5학년이 되면서 학교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책 읽기를 좋아했지.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제법 공부에 집중을 하더구나. 그렇게 1982년에 서울에 있는 야간대학교에 합격을 하게 되었지.
그때 큰 언니가 너에게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돈을 벌다가 집에 도움도 주고, 너의 결혼비용은 스스로 벌어서 시집이나 가라"라고 했었지.
큰언니의 그 말을 듣고 오빠 언니들이 모아 준 입학등록금이 준비되어 있는데도 너는 등록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큰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너를 약대에 보낼 때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렇게 너를 대학교에 보냈는데 왜 명라한테 대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냐? 내가 준 대학등록금, 약국을 차려 준 돈 모두 내놓거라"하고 우체국이 떠나 갈 정도의 목소리로 큰언니를 야단을 쳤구나.
너는 두 번의 휴학을 하면서 4년 대학을 6년 만에 졸업을 했지. 총 8번의 등록금 중에서 2번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고, 6번은 네 스스로 벌어서 해결을 했지. 그러면서 네가 결혼을 할 때까지 매달 나에게 생활비를 주어서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너는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내가 집에 없으면 밥을 해 먹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내가 외갓집에 가서 자고 오거나, 서울의 언니 오빠 자취집에 가서 자고 오는 일이 많았지. 그때마다 네가 밥을 지어서 아버지의 밥을 차려주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지.
셋째 언니는 서울로 취직을 해서 올라가고 넷째 언니 다섯째 언니는 전주에서 자취생활을 했으니, 어린 네가 밥을 해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훗날 네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내가 혼잣말처럼 "이제 너도 결혼을 해야 할 텐데.." 했더니
"내가 결혼할 사람이 있어도 주말에도 아버지 밥을 차려 주려면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요?"하고 나에게 투정을 부렸지.
내가 외갓집에 가서 며칠 동안 있다가 오겠다고 하면 너는 짜증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잘하는 것도 네 것이고, 못하는 것도 네 것이다. 그런데 이왕이면 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결혼을 하기 전에 밥도 잘하고 반찬도 잘하면 시집을 가서도 잘할 것이고, 그러면 시부모님도 좋아하지 않겠느냐?"하고 너를 달래고는 했지.
너는 1991년 3월에 결혼을 해서 위로 딸, 아래로 아들을 낳아서 남매가 두었지.
결혼 후 서울과 성남에서 살던 너는 둘째를 낳은 지 4개월이 될 때 시댁이 가까운 경남 창원으로 이사를 했지.
그곳에서 너는 두 아이를 키우고 주말이면 시댁을 찾아가면서 잘 지냈지.
그러던 네가 2002년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을 해서 4년 동안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더니, 2007년 2월에는 네 동생이 마포에 영어학원을 개원을 하면서 너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여 5년 동안 서울생활을 하면서 주말부부로 지내기도 했지.
너는 2011년 12월에 다시 서울생활을 접고 창원으로 내려갔지. 그때부터 너는 2시간 거리에 있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와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었지.
나에게 미리 말을 하면 네가 외갓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걱정을 한다고 그랬지.
그렇게 지내다가 나는 2013년 2월 14일 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너는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산서교당에서 진행하는 나의 49 천도제에 참석을 했다. 천도재가 끝나면 나의 산소를 찾아와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 놓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돌아갔지.
7번의 천도재가 끝나고, 나의 생일기도도 끝나고, 나의 백일기도도 끝난 후 너는 나를 위에서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우울증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즐거움도 없다고 생각을 했지. 너의 두 아이들도 대학교 4학년과 군대에 입대를 했으니 너의 손길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지. 죽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생각도 했지. 네가 죽으면 나와 둘째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지.
그런 네가 18개월이 지난 2014년 8월에 우연하게 웰다잉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었다고 했지.
그때 너는 웰다잉 강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했어. 그때 웰다잉 교육이 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거야.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것인데, 아무 생각 없이 삶을 살다가 의미 없이 죽는 것이 아닌, 죽을 때 후회 없이 행복하게 죽을 수 있도록 평소에 죽음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지.
너는 웰다잉 교육을 받으면서 내 생각을 했다고 했어. 돌아가신 엄마는 웰다잉 교육받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38살 나이에 웰다잉을 실천했다는 것을 알았대. 그래서 누구보다 들려 줄 이야기가 많은 웰다잉 강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게야.
그래 여섯째 딸 명라야 고맙다.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이 네 삶의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렇게 네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네 삶을 살거라.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고 살거라.
내가 너에게 여러 차례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 사람은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고.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도, 심지어 도둑이나 강도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고. 세 살짜리 어린아이지만 배울 점이 있으면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나는 도둑질이나 강도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많다고 했지.
이왕이면 너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을 주도록 해라.
네가 웰다잉 강의를 하면서 가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이 너의 강의를 듣고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전달하도록 하거라.
너는 언제인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엄마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오고 싶다고 했지.
지금도 너는 나에게 충분히 자랑스럽단다. 네 앞에 어떤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거라.
네가 글로 쓴, 나의 93년 동안 살아 온 삶의 여정과 나의 이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읽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댓글을 썼다지.
'한번 오면 누구나 다시 돌아가는 그 길,
자연의 이치입니다.
아름다운 단풍처럼 곱게 지셨습니다.'
나의 여섯째 딸 명라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거라.
너도 나처럼 아름다운 단풍처럼 곱게 질 수 있도록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살다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