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와 쌀자루
이제 친정엄마의 쌀자루를 받을 수 없습니다.
101년 전 무남독녀로, 누구보다 귀한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친정엄마는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열두 남매를 낳았습니다. 그 열두 남매를 보살피느라 살림 사는 집이 최소한 3, 4집이었습니다
아버지, 엄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집 살림, 장가 안 간 오빠와 시집 안 간 언니들이 사는 서울의 자취집, 그리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던 외갓집.
친정엄마는 우리 열두 남매 뒷바라지와 많은 자식들의 아버지이기를 일찌감치 포기 해 버린 친정아버지 뒤치다꺼리, 아버지 퇴직금으로 구입한 기찻길 옆의 용정리 밭의 농사, 그리고 외갓집에 있는 논과 밭농사까지 챙기시느라 언제나 바쁘셨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5학년부터 엄마께서 외갓집에 가셔서 주무시고 오시거나, 아니면 서울 언니 오빠들에게 가셔서 며칠 동안 집에 오지 못하면 길게는 1주일, 짧게는 2, 3일 동안 아침, 저녁밥을 직접 지어먹고 도시락을 제 손으로 직접 싸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엄마는 남들보다 몇 배 많은 자식들을 두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외갓집 일에 소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그 어떤 아들이었더래도 엄마처럼 외갓집에 자주 다니며 일일이 모든 일을 다 챙기지는 못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주말이면 그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안양 집에서 6시간이나 떨어진 외갓집에 가시고는 했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엄마가 저에게 그러셨지요.
"이제 너도 시집을 가야 할 텐데..."
그때 은근히 엄마께서 외갓집에 가실 때마다 끼니를 책임져야 했던 저는 엄마에게 톡 쏘아 부쳤습니다.
"이구~ 애인이 있다 해도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데 무슨 수로 시집을 가?" 하고요..
정말 저는 국민학교 5학년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께서 우리 집에 안 계실 때마다 모든 식사를 책임져야 했고, 단 한 번도 그 책임에서 소홀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1년 동안 데이트를 할 때에는 저에 그늘에 가려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여동생이 아버지 식사를 챙기곤 했습니다.
암튼 엄마는 자식들이 모두 자라 각기 자기 갈 길을 가게 되자, 이제는 주말이나 평일을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외갓집에 자주 다니셨습니다.
그냥 돈만 있으면 사 먹을 수 있는 쌀이며, 깨며, 고추 등을 외갓집 텃밭에 심으시고 가꾸면서 그 곡식들을 자식들에게 보내 주는 낙으로 사셨습니다.
오래전 둘째 오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둘째 오빠의 아이들은 3명이었고, 나름대로 여유롭게 살던 둘째 오빠의 공부기간이 상당히 길어지면서 둘째 올케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말은 못 하고 어려워진 살림 하느라 상당히 빠듯했던 가 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리기에 둘째 올케언니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니 쌀자루 하나가 덩그러니 문 앞에 놓여 있더랍니다.
처음에는 언니네 집으로 잘못 배달된 쌀자루인 줄 알았는데, 자루에 쓰인 글씨를 보니 삐뚤빼뚤 서투르게 언니네 집주소가 쓰인 시어머니의 글씨 더랍니다.
물론 쌀이 없어서 밥을 못 먹진 않았지만, 소리 없이 보내 준 시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져서 올케언니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 넷째 오빠와 셋째 형부가 다니던 직장에 명예퇴직을 하고 세무사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특히 셋째 형부는 삼수를 하는 큰아들과 고3인 둘째로 하여금 한집에 수험생이 무려 3명이나 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친정엄마는 사위도 아들과 다름없이, 그리고 대학 수험생인 외손주들까지 평소처럼 매일 빼놓지 않고 새벽이면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곡식을 수확하는 가을이 되어 다른 자식들에게는 한 가마니씩 보내 주는 쌀자루를 넷째 오빠와 셋째 형부에게는 2자루씩 보내주었더랍니다.
장모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보내 주신 쌀자루에서 셋째 형부가 장모님의 사랑을 느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형부 자신을 낳아 주신 친어머니도 미쳐 살펴주지 못하는 사랑을 장모님으로부터 받으시고 그 고마움을 오랫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셋째 언니는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많은 자식들에게 소리 없이 보내주었다는 친정엄마의 쌀자루를 저는 오랫동안 한번도 받아 보질 못했습니다.
그때 친정엄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시댁에서 가져다 먹으니까 주지 않지만, 왠지 내 마음이 미안하구나..."
"이구~ 엄만, 괜찮아요~ 엄마가 주신다고 해도 내가 안 받아요, 받은 거나 마찬가지지 뭐..."
그러던 저에게 어느 가을날 친정집을 찾은 저의 자동차 트렁크에 쌀 한 자루가 실렸습니다.
그동안 시댁에서 쌀을 가져다 먹기에 괜찮다는 너에게만 쌀을 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다는 엄마의 말씀이 쌀자루에 그대로 담긴 듯, 그해 저의 차에 실린 쌀자루는 유난히 크고 무거웠습니다.
2013년 2월 17일 아침, 꿈결처럼 우리 열두 남매 곁을 떠나신 엄마.
이제 더 이상 우리 열두 남매는 친정엄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쌀자루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우리들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생각이 날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보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