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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불시 방문

by 첨물

단양행 KTX는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달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권씨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차내 안내방송마저 그녀에게는 남편과 두향의 대화처럼 들렸다.

진정해...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단순한 업무 관계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권씨는 자신이 단순한 업무 관계를 확인하러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노트북에는 이미 충분한 증거들이 모여 있었다. 단지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4_1.jpg 단양으로 향하는 KTX에서 생각에 잠긴 권씨


단양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30분쯤이었다. 권씨는 택시를 타고 곧장 단양군청으로 향했다. 택시 운전사는 친절하게도 단양의 명소들을 소개해 주었지만, 권씨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택시기사: "관광 오셨어요? 단양 맛집 많은데..."


권씨: "아뇨, 업무차 왔습니다. 군청으로 빨리 가주세요."

권씨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근무 시간이니 이황은 군청에 있을 것이다. 근무 시간에 두향과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4_2.jpg 현대적인 건물의 단양군청 전경



단양군청은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낮은 산자락에 위치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권씨는 택시 비용을 지불하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괜히 온 건 아닐까? 아니야, 이미 와버렸어.

권씨는 당당하게 군청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는 친절해 보이는 여성 직원이 앉아 있었다.

권씨: "안녕하세요, 단양군수 이황 교수님 사무실이 어디인가요?"


안내직원: "네, 방문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요?"


권씨: "아니요, 예약은 없지만 이황 교수님 아내입니다."

안내 직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급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내선 전화를 들었다.

안내직원: (전화를 받는 상대에게) "네, 여기 이황 군수님 부인분이 방문하셨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안내 직원은 전화를 끊고 권씨에게 미소를 지었다.

안내직원: "3층 비서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내해드릴 직원이 곧 내려올 겁니다."

잠시 후, 젊은 남성 직원이 내려와 권씨를 3층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권씨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피곤해 보였지만, 여전히 단정했다. 오히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3층에 도착하자 '단양군수 이황' 명패가 달린 사무실이 보였다. 권씨는 비서에게 인사했다.

권씨: "안녕하세요, 이황 교수님 아내입니다.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비서: "아, 사모님! 반갑습니다. 죄송하지만 군수님은 지금 회의 중이세요."

권씨의 직감이 예리하게 솟구쳤다. 회의라... 과연 어떤 회의일까?

권씨: "어떤 회의요?"


비서: (잠시 망설이며) "저... 두향씨와 지역 문화 콘텐츠 개발 회의..."

권씨의 눈이 커졌다. 두향. 바로 그 이름이었다. 그녀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권씨: "그 회의실이 어디죠?"


비서: "저기 복도 끝 소회의실인데... 사모님, 회의가 끝나면 제가 바로 군수님께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권씨는 이미 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20년 동안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는 소리처럼 빠르고 강했다.


4_3.jpg 복도를 따라 회의실로 향하는 권씨


회의실 문 앞에 도착한 권씨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췄다. 문틈 사이로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회의라기보다는 친밀한 대화 같았다.

권씨는 변호사로서 많은 재판에 임했다. 하지만 이런 순간만큼 심장이 뛰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회의실 문을 확 열었다.

4_6.jpg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이황과 두향


문이 열리자,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역시나 '회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친밀한 분위기였다. 이황과 젊은 여성이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고급 전통 찻잔과 다식, 그리고 몇 장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권씨: "여보, 이게 무슨 일이야?"

이황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이황: "당신이 여기 웬일이야? 갑자기?"

젊은 여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씨는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젊고 아름다웠다. 긴 생머리에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은 옅게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했다.

두향: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는 이황 선생님의..."


권씨: (손을 들어 제지하며) "조용! 여기가 무슨 사극이야? '선생님'은 뭐고 '사모님'은 또 뭐야? 나 권변호사야. 내 남편 이황교수와 무슨 관계지?"

권씨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법정에서 반대 신문을 할 때처럼 날카롭고 단호했다. 두향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침착해졌다.

두향: "저는 단양 문화관광해설사 두향입니다. 군수님과는 순수하게 업무적인 관계로..."


권씨: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 그럼 업무 시간에 왜 이렇게 친밀한 분위기인지, 왜 매일 밤 같은 매화 사진을 올리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이황이 두향과 권씨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이황: "여보, 오해하지 마. 우리는 단양의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을 함께하고 있을 뿐이야. 두향씨는 단양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권씨: "'도움'이요? 어떤 '도움'인데요, 교수님?"

권씨의 '교수님'이라는 말에는 비꼬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권씨: "그럼 설명해보세요. 왜 두향씨 인스타그램에는 당신 서재 사진이 올라가 있는지, 왜 같은 매화 사진을 두 분이 따로 올리는지."

이황과 두향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둘 사이에 무언가 오가는 듯했다. 권씨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을까?

이황: "여보,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집에 가서 차분히 이야기하자. 두향씨,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두향: (고개를 숙이며) "네, 선생님. 사모... 아니, 권변호사님, 정말 오해입니다.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권씨: "설명? 좋아요. 지금 당장 해보세요. 여기서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권씨는 두향과 이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향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고, 이황은 점점 당혹스러워 보였다.

이황: "여보, 사람들 앞에서 이러지 말자. 가자, 내 숙소로."


권씨: "아니요. 여기서 해결하고 가죠. 그리고 '숙소'요? 그게 어디죠? 매화 화분이 있는 그곳인가요?"

이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권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혔지만, 그녀는 결코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두향: "권변호사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황 선생님과 저는..."

그때, 갑자기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비서와 몇몇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비서: "군수님, 죄송합니다만 도지사님 영상회의가 10분 후에 있습니다.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황은 마치 구원자를 만난 듯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권씨에게 말했다.

이황: "여보, 지금 중요한 회의가 있어. 회의 끝나고 대화하자. 내 숙소 주소를 문자로 보낼게. 미안하지만 먼저 가 있어줄래?"

권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녀는 두향을 한 번 더 날카롭게 쳐다본 뒤, 이황에게 고개를 돌렸다.

권씨: "좋아요. 회의 끝나고 봅시다. 하지만 오늘 모든 것이 명확해져야 할 겁니다."

권씨는 노트북을 가방에 다시 넣고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자신이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을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렸다. 이황과 두향이 나누었던 시선, 그 친밀함, 공유하고 있는 비밀...

***

권씨는 이황이 보내온 주소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예상과 달리 그 주소는 관사가 아닌 단양 외곽의 조용한 아파트였다. 아파트 현관에 도착하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신의 결혼 생활도 그 문처럼 닫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4_4.jpg 이황의 단양 아파트 앞에 서 있는 권씨



숙소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권씨는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에는 단아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곧 창가에 놓인 매화 화분으로 향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매화였다.

그래, 여기가 그 곳이구나...

권씨는 천천히 아파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거실 한쪽에는 작은 책장이 있었고, 그 옆으로 이황의 서재가 보였다. 두향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왔던 그 배경이었다. 부엌에는 두 사람이 사용한 듯한 찻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침실 문을 열었다. 침대는 정리되어 있었지만, 옷장에는 이황의 옷과 함께... 여성용 옷들이 걸려 있었다. 권씨의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역시... 이렇게 끝나는 건가...

욕실을 확인하자 여성용 화장품과 샴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화장대에는 두향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빗과 액세서리가 있었다.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었다.

권씨는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벽에 걸린 액자에는 이황과 두향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단양의 어느 관광지로 보이는 배경 앞에서, 두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0년 결혼 생활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증거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변호사로서의 습관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었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권씨는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모든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이황: (문을 열며) "여보..."

이황은 혼자였다.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권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죄책감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권씨: "설명해봐요. 모든 것을."


이황: (한숨을 쉬며) "여보, 난... 두향씨와 특별한 관계가 됐어."

권씨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물기 어린 눈으로 이황을 바라보았다.

권씨: "결혼 20년 차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당신이 그렇게 존경하던 퇴계 이황도 이런 짓을 했나요?"


이황: "미안해... 처음엔 단순히 업무상 만남이었는데, 점점..."


권씨: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이황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그는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이황: "나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하지만 두향은..."


권씨: (차갑게) "그녀가 뭔데요? 날 버릴 만큼 특별한 사람인가요?"

권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권씨: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매화는 곧 피겠네요. 하지만 우리 결혼은 이미 시들어버렸어요."

이황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씨는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권씨: "내일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와요. 이혼 절차를 시작할 거예요."


이황: (놀라며) "여보, 잠깐..."


권씨: "뭐, 후회하세요? 늦었어요. 매화가 피기도 전에 당신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갔어요."

권씨는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권씨: (문손잡이를 잡으며) "정말 잘 됐네요, 이 교수님. 역사 속 퇴계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를 현대에서 재현하시다니."

문이 닫히고, 권씨는 복도에 서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윤씨였다.

윤씨: (전화로) "어때? 상황이 어떻게 됐어?"


권씨: "끝났어... 다 끝났어."


윤씨: "어머, 정말? 둘이 정말 관계가 있었던 거야?"


권씨: "응, 모든 증거가 있어. 윤아, 내가 변호사로서 그동안 많은 이혼 사건을 맡았는데... 이제 내 차례가 됐네."

권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결심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매화처럼, 겨울을 이겨내고 새롭게 피어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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