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서류에 서명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권씨는 아이들에게 아직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아빠와 엄마가 당분간 떨어져 있기로 했다"라고만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집안의 무거운 공기는 느끼고 있었다.
큰아들: "엄마, 아빠는 언제 돌아와요?"
권씨: "글쎄... 아직은 아빠가 일이 많아서. 나중에 시간이 되면 보러 올 거야."
집 안의 분위기는 어색했다. 이황의 물건들은 아직 그대로였다. 권씨는 그의 물건들을 정리할 시간적, 감정적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혼 절차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아직 아이들 문제가 남았어... 과연 이대로 끝내는 게 맞을까?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권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황이었다.
권씨: "무슨 일이죠?"
이황: "아이들 문제로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해."
권씨: "변호사를 통해도 충분히..."
이황: (말을 자르며) "제발.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모로서 결정해야 할 문제야. 내일 시간 괜찮아?"
권씨는 잠시 침묵했다. 이황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이들의 미래는 변호사가 아닌 부모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권씨: "알았어요. 내일 오후 2시, 우리 집으로 와요. 아이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까."
다음 날 오후,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초인종이 울렸다. 권씨가 문을 열자 이황이 서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깔끔하게 차려입었고,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황: "들어가도 될까?"
권씨: "들어와요."
이황은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왔다. 익숙한 공간인데도 낯선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서류 가방을 열었다.
이황: "아이들 양육 계획을 정리해봤어. 학교, 과외, 주말 활동까지..."
권씨: (놀라며) "꽤 열심히 준비했네요."
이황: "당연하지. 내 아이들인데."
권씨는 이황이 준비한 서류를 받아 꼼꼼히 살펴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세심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학교 일정, 취미활동, 방학 계획까지 모두 고려되어 있었다.
권씨: "생각보다 많이 신경썼네요."
이황: "그동안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아니었던 것 같아. 이제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
권씨는 의외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20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이런 이황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권씨: "갑자기 왜 이래요? 모범적인 아빠처럼 굴고."
이황: (진지하게) "많은 생각을 했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직업적 성취, 개인적 욕망, 그런 것들만 쫓다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쳤어."
권씨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이황을 바라보았다. 이혼 후에 갑자기 이렇게 변한 이황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권씨: "이황 씨, 솔직히 말해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 뭔가 목적이 있는 거죠?"
이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손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황: "사실... 단양에서 돌아오기 전날, 두향에게서 마지막 인사를 받았어."
권씨의 눈이 커졌다. 이황의 말에 갑자기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이황: "그 인사가... 나를 많이 생각하게 했어."
이황은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씨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권씨는 메시지를 읽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분노, 혼란, 그리고 이상하게도 약간의 안도감까지.
권씨: "그래서? 이게 왜 중요한데요?"
이황: "이 메시지를 받고 깨달았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두향을 만난 것도, 우리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 것도 모두 내 오만함 때문이었어."
이황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권씨는 그의 말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권씨: "그래서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이황: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야. 다만... 우리 이혼을 조금 더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권씨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황의 제안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권씨: "무슨 소리예요? 이미 서류에 서명했잖아요."
이황: "아직 최종 제출 전이야. 만약... 만약 우리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본다면?"
권씨는 혼란스러웠다. 이미 마음을 굳히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참인데, 이황의 갑작스러운 제안이 그녀의 결심을 흔들었다.
권씨: "농담하는 거예요? 당신이 얼마나 나를 배신했는지 알아요?"
이황: "알아. 정말 미안해. 내가 정신적으로 방황했던 거야. 성리학을 연구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어. 그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한 번 더 기회를 가져볼 수는 없을까 싶어."
권씨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분노와 배신감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20년이라는 세월이 쉽게 지워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권씨: "아이들이 힘들어할 거예요. 이혼은 어른들 문제지만, 그 상처는 아이들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하니까..."
이황: "그래서 더 생각해보자는 거야.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권씨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변호사로서 수많은 이혼 케이스를 다뤄왔다. 그 경험으로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현명했다.
권씨: "시간이 필요해요. 당장은 대답할 수 없어요."
이황: "물론이야. 시간을 가져도 좋아. 하지만 내 마음은 정했어. 나는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어."
이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류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이황: "아, 그리고 이건... 두향이 보낸 매화 씨앗이야. 당신이 가지고 있어."
이황은 작은 봉투를 권씨에게 건넸다. 권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권씨: "왜 이걸 나에게 주는 거예요?"
이황: "네가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심을지, 버릴지... 우리의 미래처럼."
이황은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집을 나갔다. 권씨는 한동안 봉투를 바라보았다. 매화 씨앗. 새로운 시작의 상징일까, 아니면 과거의 잘못된 선택의 증거일까?
그날 밤, 권씨는 베란다에 나가 봉투를 열었다. 작고 검은 씨앗들이 손바닥에 놓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이 씨앗을 버려야 할까? 아니면...
인생은 때로 너무 복잡해. 매화처럼, 추운 겨울을 지나야 꽃을 피우는 걸까?
그녀는 결심했다. 작은 화분에 흙을 담고, 매화 씨앗을 심었다. 그것은 용서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작은 기회였다.
베란다로 돌아온 권씨는 이황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두향의 메시지는 이황이 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보내졌다고 했는데... 메시지 전송 시간은 이황이 아직 단양에 있던 시간이었다.
이상하네. 시간이 안 맞는데... 혹시...
권씨는 휴대폰을 들고 단양행 버스와 기차 시간표를 검색했다. 이황이 탄 버스는 오후 4시 출발이었다. 그런데 두향의 메시지는 오후 9시에 보내졌다. 그때 이황은 이미 서울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메시지에는 '잘 가셨나요?'라고 되어 있을까?
뭔가 이상해. 시간이 안 맞아. 혹시... 이황이 거짓말을 한 걸까?
권씨는 갑자기 직감이 스쳤다. 그녀는 다시 이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황: "여보세요?"
권씨: "이황 씨, 단양에서 언제 서울로 왔죠?"
이황: (잠시 망설이며) "지난주 월요일, 오후 버스 타고..."
권씨: "두향에게서 마지막 메시지는 언제 받았어요?"
이황: "음... 그날 저녁, 서울 도착했을 때쯤?"
권씨는 자신의 의심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무언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권씨: "이황 씨, 왜 거짓말해요? 메시지를 보면 당신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보낸 거잖아. 그런데 '잘 가셨나요?'라고 묻고 있어. 이게 말이 돼요?"
전화 너머로 이황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황: "...그건... 내가 단양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보낸 거야."
권씨: "거짓말 그만해요. 당신, 그 메시지 직접 쓴 거죠?"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이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황: "...미안해. 내가 쓴 거야."
권씨: (놀라며) "뭐라고요? 왜요?"
이황: "너무 부끄러웠어. 내가 한 행동들이... 그래서 적어도 두향이 깨끗하게 떠났다고 생각하길 바랐어. 그녀는 정말 그런 메시지를 보냈을 법한 사람이었으니까..."
권씨는 어이가 없었다. 이황은 끝까지 연극을 하고 있었다.
권씨: "당신, 진짜 최악이네요. 지금까지도 거짓말을 하다니... 더 이상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이황: "기다려, 다 설명할게. 사실은..."
권씨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베란다로 향했다. 화분에 심은 매화 씨앗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심지어 이 씨앗조차도 정말 두향에게서 온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냥 버릴까...
하지만 권씨는 씨앗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화분에 물을 주었다. 거짓으로 시작된 것이라도, 이제 이 씨앗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매화는 언젠가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내 인생도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이황과 상관없이.
***
2년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권씨와 이황은 결국 이혼했고, 권씨는 아이들 양육권을 가져갔다. 이황은 서울대학으로 복귀했지만, 단양에서의 스캔들로 인해 학계에서의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처음 6개월 동안, 이황은 계속해서 화해를 시도했다. 꽃다발과 편지, 심지어 아이들을 통한 메시지까지. 하지만 권씨는 단호했다.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한 사람을 다시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씨는 이황이 진심으로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고, 양육비도 빠짐없이 보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아빠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이 권씨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래서 약 1년 전부터, 권씨와 이황은 부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혼 후 아이들을 어떻게 함께 키울지에 대한 상담이었지만, 차츰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상담사는 그들에게 '관계의 재건'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관계 형성'이라고 표현했다. 과거의 상처를 덮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
오늘도 권씨와 이황은 상담을 마치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이황은 이제 주말마다 아이들을 보기 위해 방문했고, 가끔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황: "오늘 상담이 도움이 됐어?"
권씨: "그런 것 같아요. 특히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게 좋았어요."
이황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차를 준비했다. 2년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더 겸손해졌고, 집안일도 자연스럽게 도왔다.
이황: "아이들 곧 학원에서 돌아올 텐데, 간식 뭐 준비할까?"
권씨: "냉장고에 과일 있어요. 그거 좀 썰어주세요."
권씨는 베란다로 나갔다. 2년 전 심은 매화 화분이 아직 그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씨앗은 싹을 틔워 이제 작은 나무가 되어 있었다. 아직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황이 차를 들고 베란다로 나왔다. 그는 매화 나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황: "이게... 그때 그 씨앗이야?"
권씨: "네. 살아있더라고요. 꽤 강인한 생명력이네요."
이황은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나뭇잎을 만졌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권씨: "여보, 솔직히 말해봐. 아직도 그 여자 생각해?"
이황: (잠시 침묵했다가) "가끔...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떠올라. 하지만 그건 내 잘못된 선택이었어."
권씨는 이황의 솔직한 대답에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거짓보다 낫다는 것도.
권씨: "당신이 퇴계 이황이라서 다들 존경하지만, 나는 알아. 당신도 그냥 평범한 남자라는 걸. 완벽할 필요 없어. 그냥 정직하면 돼."
이황은 천천히 일어나 권씨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황: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 순간, 이황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인스타그램 알림이었다.
이황: (놀란 목소리로) "두향이..."
권씨도 화면을 보았다. 알림은 '두향_단양문화'가 새 게시물을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이황은 망설이다가 알림을 열었다.
사진 속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두향과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프로필 사진도 결혼식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권씨: (쓴웃음을 지으며) "봐,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이황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권씨의 손을 잡았다.
이황: "그래,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는 거야. 나도... 우리도."
권씨는 베란다의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아직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분명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인생도 매화나무 같아.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겨울을 지나고 있고, 언젠가는 봄이 와서 꽃을 피울 거야.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완전한 화해일 수도, 아니면 그저 아이들을 위한 좋은 부모로 남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과거의 상처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베란다의 매화는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오면 꽃을 피울 준비를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