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온 권씨는 이틀 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좀 아프다"라고만 말했고, 아이들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이황이 가끔 전화를 걸어왔지만, 권씨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20년 결혼 생활...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셋째 날, 권씨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부어있는 눈과 창백한 얼굴이 그녀를 반겼다.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고 결심했다.
이제 그만 울어야지. 모든 것을 명확히 해야 해.
권씨는 이황보다 두향을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 변호사로서의 직감이었다.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두향의 인스타그램을 다시 열었다. 최근 게시물에 '강선대 카페에서 오늘의 글쓰기' 라는 해시태그가 있었다.
권씨는 다시 단양행 KTX를 예약했다. 이번에는 두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지금까지 모은 모든 증거를 다시 한번 정리했다. 두향의 SNS 게시물, 이황과 나눈 댓글들, 인스타그램 메시지까지. 변호사로서 그녀는 철저했다.
다음 날 오후, 권씨는 단양 강선대 근처에 도착했다. '매화다방'은 강선대를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카페였다. 유리창 너머로 단양의 아름다운 산세가 펼쳐져 있었다. 권씨는 카페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시계는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향이 올 시간까지 30분. 차분하게 기다리자.
권씨는 차를 주문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단양의 산세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이황이 이곳에서 행정을 맡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들어왔다. 긴 머리에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여성. 바로 두향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권씨와 눈이 마주쳤고, 잠시 당황한 듯했다.
권씨는 손짓으로 두향을 자신의 테이블로 불렀다. 두향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다가와 권씨 맞은편에 앉았다.
두향: "변호사님, 오셨군요."
두향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단호했다.
권씨: "앉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내 남편이랑 뭐야?"
두향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권씨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두향: "이황 교수님은 제게 많은 영감을 주시는 스승이세요. 저는 그분의 철학적 깊이에 매료되었을 뿐..."
권씨: (말을 자르며) "그만해요. 나도 한때 그 철학적 깊이에 매료됐던 사람이야. 근데 정작 그 사람 속은 이렇게 얕아."
권씨의 말에 두향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모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두향: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순수한 학문적 교류를 ..."
권씨: (차갑게) "순수? 그런 말 쓰지 마요. SNS 다 봤어. 매일 밤 '선생님, 이 구절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보내는 메시지가 밤 11시에 뭐가 학문적이야?"
권씨는 노트북을 펼쳐 두향과 이황의 SNS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두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두향: (당황하며) "이건... 단순한 학문적 대화였을 뿐이에요."
권씨: "그래요? 그럼 이건요?"
권씨는 다른 증거들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두향이 이황의 관사에서 찍은 사진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담은 다른 사람들의 SNS 게시물, 심지어 이황이 두향에게 보낸 편지까지.
두향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권씨: "내가 변호사야. 증거 수집은 내 전문이에요."
두향: (한숨을 쉬며) "변호사님...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권씨: "솔직하게 말해요. 내 남편이랑 얼마나 깊은 사이예요?"
두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들어 권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향: "저와 이황 선생님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어요. 처음에는 정말 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만남이었는데..."
권씨: (차갑게) "그래서 내 남편의 관사에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
두향: "아니요! 전 제 집에 살고 있어요. 다만... 자주 방문했을 뿐이에요."
권씨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두향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20년 전, 이황에게 매료되었던 자신의 모습.
권씨: "이황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어요? 아내와의 관계는 어떻다고 설명했죠?"
두향: (망설이며) "그는... 변호사님과는 오래전부터 마음이 멀어졌다고 했어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권씨: (쓴웃음을 지으며) "그래요? 참 잘됐네요. 그럼 왜 이혼을 하자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왜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한 아빠였을까요?"
두향의 눈에 혼란스러움이 스쳤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권씨: "알아요? 이황은 20년 전에도 매력적인 남자였어요. 나도 당신처럼 그의 철학적 깊이, 지식, 유머에 빠졌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꼬신다는 거예요."
두향: "저는 꼬임에 넘어간 게 아니에요! 우리는 서로를..."
권씨: "사랑한다고요? 그래요, 인정할게요. 하지만 사랑이 결혼 생활을 배신해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카페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권씨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권씨: "두향씨, 당신을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네요. 당신도 피해자니까요. 이황은 지금 당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나한테도 보여줬었어요. 그가 정말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두향의 눈에 의심의 그림자가 스쳤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물었다.
두향: "무슨 뜻이세요?"
권씨: "단양에 온 지 3개월 만에 당신을 만났죠? 그리고 빠르게 관계가 진전됐고요. 이게 진정한 사랑일까요, 아니면 패턴일까요?"
권씨는 폰을 꺼내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몇 년 전 이황이 학회 차 방문했던 도시에서 현지 여성과 찍은 사진이었다.
권씨: "이 사람은 3년 전 이황이 학회 참석차 갔던 제주도에서 만난 여성이에요. 2주 동안 '학문적 교류'를 했대요. 집에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연락했죠."
두향: (충격받은 표정으로) "어떻게 이런 걸..."
권씨: "내가 변호사라고 했잖아요. 이혼 전문. 증거 수집은 내 일상이에요."
두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향: "저는... 정말 몰랐어요."
권씨: "이황의 진짜 모습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복잡해요. 그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나는 20년 동안 지켜봤으니까."
두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혼란스러움과 배신감이 교차했다. 권씨는 그런 두향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두향: "그럼... 변호사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권씨: "이혼할 거예요. 이미 변호사에게 의뢰했어요. 내가 내 사건을 직접 맡긴 하지만, 감정이 개입되니까요."
두향: "이황 선생님은... 알고 계시나요?"
권씨: "물론이죠. 어제 서류를 받았을 거예요."
두향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물었다.
두향: "왜 저를 만나러 오셨어요? 그냥 이혼하시면 되는데..."
권씨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단양의 아름다운 산세가 펼쳐져 있었다.
권씨: "20년 결혼 생활이 끝나는데, 모든 걸 알고 싶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경고하고 싶었어요. 이황의 진짜 모습을요."
두향은 권씨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라이벌이자 방해물로만 여겼던 이 여성이, 이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향: "감사합니다... 이 모든 걸 알려주셔서. 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권씨: "당신의 결정이 무엇이든, 그건 당신의 삶이에요. 다만 모든 사실을 알고 결정하길 바랐을 뿐이에요."
권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떠날 준비를 했다.
권씨: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 같네요."
두향: "변호사님...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권씨: "뭐죠?"
두향: "변호사님은... 아직도 이황 선생님을 사랑하세요?"
권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권씨: "내가 사랑한 건 이황이 아니라, 그가 연기했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20년 동안 나는 환상을 사랑했던 거죠."
권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카페를 나섰다. 그녀가 떠난 후, 두향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
서울로 돌아온 권씨는 곧바로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대학 동기인 윤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씨: "어떻게 됐어? 두향이라는 사람 만났어?"
권씨: "응, 만났어.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이었어."
윤씨: "그래서? 이혼 진행하는 거 맞지?"
권씨: "당연하지. 이미 서류는 다 준비했잖아."
윤씨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윤씨: "여기 다 준비해뒀어. 이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최대한 유리하게 준비했어. 특히 아이들 양육권은 무조건 따낼 거야."
권씨: "고마워, 윤아. 내가 직접 맡아도 됐을 텐데..."
윤씨: "네가 당사자잖아. 감정이 개입되면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 내가 도울게."
권씨가 서류에 서명하려는 순간,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윤씨가 받았다.
윤씨: (전화를 받으며) "네, 윤변호사 사무실입니다... 네? 이황 교수님이요?"
권씨의 눈이 커졌다. 윤씨는 그녀를 바라보며 전화를 이황에게 넘겨야 할지 묻는 눈빛을 보냈다. 권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씨: (전화를 받으며) "여보세요, 이황 씨."
이황: (전화로) "여보, 제발 대화 좀 하자. 이런 식으로 끝내면 안 돼."
권씨: "할 말은 다 했잖아요. 내일 오후 2시, 변호사 사무실로 오세요. 이혼 조건을 논의할 거예요."
권씨는 이황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손이 약간 떨렸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윤씨: "괜찮아?"
권씨: "응, 괜찮아"
다음 날 오후, 이황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는 전날과 다르게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윤씨가 그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황: "권변호사는 어디 있나요?"
윤씨: "곧 올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권씨가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이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권씨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윤씨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황: "여보, 우리 대화 좀 해보자. 이렇게 끝내면 안 돼."
권씨: "이황, 난 변호사야. 20년 동안 누구를 변호해왔는지 알지? 이혼 전문. 네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권씨의 말에 이황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황: "여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단지 학문적 대화..."
권씨: (말을 자르며) "그만해. 매화라... 시골 발령 받았다고 느닷없이 세컨드 만들어? 내가 성리학을 몰라서 속는 줄 알았어?"
이황은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권씨의 시선이 너무 날카로웠다.
권씨: "나를 속이기엔 내가 당신을 너무 잘 알아, 이황 씨.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젠 완전히 알게 됐어."
이황: "여보, 난 당신을 사랑해. 아이들도 있고..."
권씨: "이제 와서 사랑 타령은 그만해요. 아이들? 그들은 이혼해도 여전히 당신의 아이들이에요. 다만 당신 같은 아버지를 가진 게 불쌍할 뿐이지."
이황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권씨는 이혼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권씨: "합의 이혼으로 진행하죠. 조건은 다 적혀 있어요. 읽어보고 서명하세요."
이황: (서류를 보며) "이건... 너무 일방적이야."
윤씨: "일방적이라고요? 불륜이 명백한 상황에서 이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조건입니다."
이황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황: "아이들 양육권... 네가 가져가는 거야?"
권씨: "당연하죠. 당신이 단양에서 '매화'와 새 인생을 사는데 아이들까지 맡길 순 없잖아요."
이황: "그래도 난 아이들 아빠야. 면접 교섭권은..."
권씨: "있어요. 서류에 명시되어 있어요. 한 달에 두 번, 주말에 만날 수 있어요."
이황은 한동안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후회와 체념이 교차했다.
이황: "알았어... 서명할게."
이황은 천천히 펜을 들어 서류에 서명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서명할 때마다 20년 결혼 생활이 한 페이지씩 닫히는 것 같았다.
모든 서명을 마친 후, 그는 마지막으로 권씨를 바라보았다.
이황: "정말 이걸로 끝인 거야?"
권씨: "이황 씨가 끝낸 거예요. 3개월 전에."
권씨는 담담하게 서류를 챙겼다. 이황은 천천히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황: (문손잡이를 잡으며) "여보... 아니, 권변호사님. 정말 미안해요."
권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황이 떠난 후, 방 안에는 권씨와 윤씨만 남았다.
윤씨: "괜찮아?"
권씨: "응... 이제 정말 끝났네."
권씨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빌딩 숲이 펼쳐져 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봄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비춰들었다.
이제 새 출발이야. 매화처럼...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울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