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할 수 있는 역량
넌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 말은 내 잠재력을 인정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역량을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특히 내가 하는 일이 객관적으로 성과를 입증하기 어려운 직종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성공한 브랜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성공은 누구의 공일까?
• 뛰어난 실적을 낸 영업부서일까?
• 흠잡을 데 없는 품질을 만들어낸 개발부서일까?
• 소비자들에게 화제를 몰고 온 마케팅 부서일까?
• 아니면 강렬한 이미지를 완성한 디자인 팀일까?
• 혹은, 결국 모든 공을 가져가는 대표님, 아니, 오너일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기획자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무대 뒤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를 멀찍이서 조용히 듣고 있을 것이다.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
현실은 결과로 모든 것을 말한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그 순간을 함께한 동료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획이라는 작업은, 입증하기가 정말 어려운 영역이다.
물론, 아이디어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방향을 잡고, 가치를 발견하며, 그것을 조직과 사람들에게 공감시키는 힘은 어떤 일의 시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기획자는 말하자면, 건물의 골조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기획자의 이력서를 들여다보면,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더라도 본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여를 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기획이라는 영역을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획 전문가가 투입되면 결과물이 일정하게 보장될까?
그래서 기획자는 뭘 할 수 있는데요?
이 질문은 기획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다. 기획에는 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명확한 역량으로 인정받는 것도 어렵다. 무엇보다 그 수준의 높고 낮음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기획의 진짜 힘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없으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생각은 모든 일의 시작이고 절대 기반이기 때문이다.
마쓰다 무네아키가 이끄는 츠타야 서점의 CCC는 기획회사를 표방한다. 서점이라는 결과물로 유명해졌지만, 그 핵심은 남들과 다른 기획력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책을 경험하게 만드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기획력이란 남들과 다르게 보는 생각의 힘,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추진력을 동시에 말한다. 애플 또한 마찬가지다. 애플은 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콘셉트를 기획하는 회사다. 그리고 그 기획력이 세상을 바꿨다.
기획자는 사라질까?
아이러니하게도, 기획자의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위치는 사장이나 오너다. 그들이 기획자가 되어야 모든 일이 풀리기 때문이다. 또는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생각의 파트너를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 밑에서 올라오는 기획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의미와 날카로움을 잃기 쉽다. 그래서 기획자는 점점 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기획자가 전문가로 인정받는 시대는 올 것이다.
측정할 수 없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좋은 기획은 모든 일의 시작이고 토대이다. 만약, 매번 무색무취한 성과로 실패하고 있다면, 기획의 힘을 빌려야 한다. 기획자는 평소에 존재감이 없을지 몰라도, 그들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면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기획자가 없을 때 비로소 공백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게 기획의 진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