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라스코-브라이언셔프
#리뷰
#리뷰 속 나의 이야기
#엄마가 된 딸이야기
#슬픔은 무거움이다. 슬픔 ‘grief’ 이란 말의 어원은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ef 이다. 사람들이 슬픔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형용사는 ’참을 수 없는‘이다. 슬픔은 참아야 할 무엇이자 짊어져야 할 무거움인 것이다.
#슬픔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은 분노다. 비전문가들은 흔히 슬픔에 빠진 사람이 씻어내야 할 주요 감정이 비애라고 생각하지만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분노를 더 많이 이야기한다.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이자 종교적 신념에 대해 설득력 있는 훌륭한 주장을 편사람이 자신이 믿는 신을 고문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 루이스에게도 냉소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분노는 강렬한 감정이지만 보통은 끝이 있다. 일정 양의 죄절을 한번 터뜨려버리면 아마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대개의 사람들은 이내 평상시의 자아로 되돌아갈 것이다. 어쩌다보니 냉소를 좀 즐기게 되었다 하더라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된다. 냉소가 자신의 일부로 굳어지지 않도록만 주의하면 된다.
읽는 내내 정말 좋았다. 나도 명확히 모르는 마음의 어떠함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도 오랜 시간 우울을 앓았다고 한다. 역자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는 이 책은 내게도 그랬다.
감정을 보듬어주는 정도의 책이 아니었다. 슬픔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당연히 도움이 되는 것들도 언급했다.
일년 중 봄의 한 달 정도는 우울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내게 그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도록 했다. (내년 봄이 되어봐야 실감하겠지만!)
살아가면서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이 감추려했던 것도 보였다.
가만히 내 삶의 슬픔을 풀어 기록해보고 싶도록 만든 책이다.
책장에 오래도록 두고, 슬픔이 찾아올 때마다 꺼내어보고 싶다.
인스타 부계정 책 리뷰를 기록하는 곳에 간단하게 위 책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어떤 책은 머리로 헤아리며 휘리릭 하고 읽기도 하고, 어떤 책은 억지로 읽어 넘기기도 한다.
어떤 책은 맛있는 간식을 먹듯 읽기도 하고, 어떤 책은 멈추어 서서 크게 호흡하고 읽기도 한다.
이 책은 문득문득 멈추어 서게 했지만, 내 삶을 정확하게 진단해주어 큰 위안을 남긴 책이다.
마치 그동안 일상에서 불편했던 몸의 증상을 의사에게 설명하자 그 증상의 원인을 파악해주고 처방까지 받아 속이 개운해지고 안심이 되는 경험과 일치한다.
정서적인 위로와 보듬어주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면 어쩌면 나는 휘리릭 넘겨버렸을지도 모른다.
요 근래 서점에 가면 "다정한"이라는 형용사를 가진 책의 제목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 역시도 브런치 작가가 된 후 줄곳 "다정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소개를 했기 때문에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그 "다정한" 종류의 글, 위로와는 결이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의 종류를 무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백과사전? 에세이? 실용서?
나름의 개인적인 소감을 담은 책의 종류다.
이 책은 슬픔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한다.
"무거운"이라는 제목으로 글은 시작된다.
슬픔이라는 단어의 근원이 무거움이었다니!
어쩌면 내가 일평생 느꼈던 삶의 무게는 슬픔의 무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 때문이다.
슬픔의 무게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이십대를 보내면서 나는 잘 살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어서였다.
이십대를 그와같이 보내고 나니, 그 패턴은 내 습관이 되었다.
사십대를 살고 있는 지금은 그 습관을 가진 나를 발견했지만, 그 오랜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그래도 그 습관을 발견하고 알게 된 지금은 살아온 중 가장 내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더 관대해지리라.
얼마 전 길고 긴 연휴를 보내며 시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친정 아버지)을 만났다.
우리에게 더 베풀어주고 싶어 안달인 시부모님과 혼자 살아가는 삶 자체가 버거운 우리 친정 아버지.
아빠를 만났을 때, 이 책이 떠올랐다.
'내 슬픔의 근원이 아빠구나!'
'누군가가 슬픔의 근원이 될 수 있구나!'
'나의 결핍과 연민의 이유는 아빠였구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아빠의 인생을 보며 도리어 이제 입을 다물게 된다.
그저 밥 한끼를 같이 하는 것이 아빠와 함께 보낸 시간의 전부였지만 그 안에 내 슬픔의 전부와 그 무게가 고스란히 담겼다.
<아빠의 이야기는 나의 브런치북 "다정한세상"> 에 담았다. 다정한 세상, 두번째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봄이 무르익어 갈수록, 찬란해질수록 나의 슬픔도 짙어졌는데 결혼 후 매해 5월이 되면 나의 감정은 이리저리 요동한다. 바람이 불어오듯 우울이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우울은 지난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실감과 제 역할을 해주지 않았던 엄마, 아빠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내 부모의 모습은 다시 그 슬픔을 확인시켜준다.
여전히 육아는 어려운 것이고, 나도 내 아이와 늘 편안하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부모이기에.
돌아가야 할 나의 자리, 그 기본값을 기억한다.
그런데 나의 엄마, 아빠는 왜 그랬을까?
나에게, 내 삶에게, 내 시간 속에서.. 왜 그랬을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많은 순간이 문득 찾아올 때마다 또다시 슬픔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나는 여지없이 흔들리지만 이제는 그래도 나를 채찍질하지 않는다.
바람이 부니, 흔들리지..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법이지...
잠시 그 바람이 불도록 내버려둔다.
"엄마, 카카오톡 시간이 게임시간하고 같이 포함되서 핸드폰이 잠겼어. 게임 조금밖에 안했는데."
"카카오톡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핸드폰 사용시간이 좀 과하다!"
"아니, 근데 나 게임 중이었단 말이야. 이거 다시 열어줘, 빨리."
"야, 이거 약속한 시간이잖아. 너가 조절을 했어야지!"
"아니, 이거 애초에 카톡시간이랑 게임시간이랑 다른데. 그냥 지금 열어줘, 다시. 빨리!"
아이와의 핸드폰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시간 제한 없이 그냥 내버려두면 핸드폰 때문에 전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정말 이제 그래야 하나?
하. 예상했지만 매일의 이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온세상에 핸드폰이 사라지고, 티비도 사라지고, 컴퓨터도 사라져버리면 좋겠다고 몇번이나 생각했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거리낌없이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화가 났고, 한편으로는 단한번도 엄마아빠에게 이렇게 요구해본 적이 없는 내가 떠올라 슬픔이 밀려왔다.
아이의 태도에 화가 난 것과 나의 과거의 슬픔이 동시에 떠오르니 정말 혼란스러웠다.
아이의 요구대로 핸드폰을 열어주어 우선 내보내버리고 혼자 화를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애를 썼다.
둘째 아이가 학원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집안 분위기를 살펴보고 5초도 안되서 눈치를 챘다.
"형아, 엄마한테 또 혼났구나!"
이럴 때는 정말이지 모든 상황이 나를 탓하는 것만 같다.
나의 모든 느낌과 소리를 잠재울 수 없어서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먼저 식탁에서 일어난 후, 남편에게 나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후두둑, 후두둑.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눈물이 날 때는 그저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어떤 감정도 억누르지 않는 것이 늘 최선인데, 나의 눈물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느낄까 감추고만 싶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며, 아이에게 화가 난 것은 그것대로. 내 스스로 떠오른 슬픔과 분노에 대한 것은 그것대로 정리를 해본다. 겨우 조금 추스려지니 숨이 쉬어졌다.
살면서 슬픔을 더 발견한다.
그 근원을 발견할 때 쯤이면 조금은 의연해지지 않을까 싶지만, 나는 전혀 의연하지 않다.
내가 생각한 사십대와 진짜 내가 살고 있는 사십대의 모습이 다르지만 그것 그대로 괜찮다고 안위해본다.
혼란스러운 지금의 나와 손을 잡아 다독여본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과 함께 이 슬픔의 바람을 잘 느끼고 지나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