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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Dec 17. 2023

어떤 인재가 되어야 할 것 인가

경력에도 서사가 필요하다


인텔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팀에서 인턴을 한 명 채용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이력서 한 장이 도착했다. 지원자 A는 미국의 괜찮은 주립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학위 과정 중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해 본 경험, 실리콘 밸리의 다른 빅테크 기업 몇 곳에서 이미 연구 인턴을 했던 경험까지 있었다. A의 이력서 상으로는 충분히 좋은 점수를 받을 만했다.


화상 회의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A는 그동안 해왔던 일을 요약해 짧게 소개했다. 박사 과정 중에 연구 프로젝트로 a, b, c를 해보았고, M회사에서 d, K회사에서 e라는 프로젝트를 했다는 식이었다. 아이템 위주로 언급하다 보니 예상보다 발표시간은 짧았다. 구체적인 발표 슬라이드를 준비하지 않았던 A는 추가 질문을 받자 부랴부랴 데모 프로그램을 띄워가며 기술적 설명을 이어갔다.


인턴이든 정직원이든 연구직 인터뷰의 경우 자신의 과거 연구 실적을 정리해 1시간가량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후 발표했던 슬라이드를 다시 복기하면서 면접관들과 다양한 질의응답을 통해 지식과 역량을 평가받게 된다. 


그런데 A와 같이 인터뷰를 준비한 경우 면접관 입장에서는 다소 난감하다. 깊이 있는 기술적 질문을 던지기에는 보여준 것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뭔가 의아했던 나는 A의 이력서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고, 곧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A는 이미 박사과정 5년 차였으나 아직 주저자로 쓴 논문이 없었다. 다양한 업계, 학계 프로젝트 경험을 쌓았으나 그 어떤 것도 결과로 마무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팀에 들어왔을 때 어떤 연구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다양한 분야에 모두 관심이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답답한 마음까지 들었다. 결국 B는 인턴으로 채용되지 못했다.


그 일이 있기 몇 년 전, 또 다른 인턴 지원자 B가 있었다. B는 석사 과정시 진행했던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체계적으로 작성한 뒤 논문 선공개 사이트인 아카이브(arXiv)에 업로드했다. 정식 리뷰를 거치는 학회나 저널은 아니었지만, 아카이브에 공개된 B의 논문은 학계, 업계에 곧 노출되었고, B의 아이디어에서 신선함을 발견한 우리 팀은 그를 인턴 인터뷰에 초대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인터뷰에서 B에게 연구 과정과 기술적 내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B는 프로젝트 경험이 단 한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이디어 도출부터 구현, 실험, 그리고 그 결과를 논리적으로 기술하기까지 전체 연구 과정을 끝까지 해냈던 것이다. 


3개월의 인턴을 마친 B는 학교로 돌아가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박사과정 중에도 팀에 재차 인턴으로 초대되기도 했다. B는 박사 졸업과 동시에 인텔의 정규직 리서치 사이언티스트가 되었다.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


A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전문성(expertise)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이런저런 경험은 많았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해 자신을 대표할 만한 전문성을 기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지원자는 실리콘 밸리 채용의 문을 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신입이 아닌 경력직의 경우 한 분야의 전문성을 쌓았는지가 매우 중요한데, 바로 실리콘 밸리가 '전문가(specialist)'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곳의 기업들이 일을 하는 방식 그리고 그에 따라 인력을 채용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실리콘 밸리 기업들이 발표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다양한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조직은 각 전문 분야별로 구성되고 하위 조직으로 갈수록 그 분야는 점차 세분화된다. 


조직이 실무자 수준까지 내려오면 해당 팀은 특정 업무에 매우 특화된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사원-대리(선임)-과장(책임)-부장(수석) 등의 직급으로 불리는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XXX software engineer, YYY silicon engineer, ZZZ architect, engineering manager 등 실제로 하고 있는 업무로 직책명이 결정된다 (물론 내부적으로 정해진 직급 레벨은 있다). 이런 조직이 극한까지 구조화된 회사가 바로 Apple이다. 


채용은 이런 전문가 집단에서 결원이 발생할 때 수시로 이뤄진다. 통상 회사에서 특정 직군의 채용 공고를 게시하면 공고마다 채용 기간이 설정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응모한 후보자들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해당 직군을 공석으로 남겨두더라도 채용 절차를 끝내버리곤 한다. 


우리나라처럼 기간 내에 어떻게든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기준에 조금 모자라도 누군가를 채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전문가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전문가를 찾기 때문이고, 따라서 인터뷰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심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전문 분야에 따라 업무를 분장하고 이에 따라 인력을 채용한다. 따라서 엔지니어들은 경력을 쌓으면 쌓을수록 자신의 줄기 기술을 바탕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며 자연스럽게 해당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게 된다. 수시로 이직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직무를 계속 수행한다. 따라서 업계에서 보낸 연차가 고스란히 인정받는 경력이 되는 것이다. 



글로벌 오덕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제1의 필요조건


흔히들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I자형을 넘어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T자형, 두 개의 전문성을 가지는 π(파이) 형, 심지어 최근엔 문어발식으로 전문성을 넓히는 폴리매스(Polymath) 형을 꼽고 있다. 결국 한 가지만 잘하는 전문가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즉 직무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는 융합형 인간을 지향하라고 한다. 


물론 경력이 쌓이고 조직의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과 잘 융합할 수 있는 넓은 시야, 응용 능력, 그리고 타 분야 인사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관리자로서 팀이나 조직을 이끌어 성과를 내고 그룹의 정점일 찍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융합형 인재가 되는 것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맞다. 


하지만 이러한 융합형 인재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은 우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조차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스킬 셋의 수명은 짧다. 과거의 학습과 경험은 몇 년만 지나도 무쓸모 해지기 일쑤다. 한 우물만 파도 전문가가 되기 어려운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말콤 그래드웰은 '아웃라이어'를 통해 '1만 시간의 법칙'을 소개한 적이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분석한 결과 공통적으로 대략 1만 시간 정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적절한 환경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가정까지 붙는다. 따라서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드웰은 책에서 '1만'이라는 절대 시간에 방점을 두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따라줬을 때 성공의 영역에 도달할 즈음까지 자연스럽게 그 정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방점은 반드시 1만 시간이 아니더라도 몰입할 수 있는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전문가가 되기 위기 위해서 자신이 투입하는 시간, 경력을 분산시키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엔지니어 경력에는 방망이깎는 노인을 담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경력에도 서사가 필요하다


글로벌 오덕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업계에서 경력이 만개하는 과장급, 시니어 엔지니어까지는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야한다. 시류와 유행에 따라, 많은 분야를 얕게 파게 되면 1만 시간이 아니라 10만 시간을 써도 전문가는 될 수 없다. 기술 트렌드를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잃지 말고, 트렌드에 따라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잠시 내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대학원에서 그래픽스 하드웨어/아키텍쳐/시뮬레이터/디바이스 드라이버, 병렬 렌더링(Parallel Rendering), 과학적 시각화(Scientific Visualization) 등의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실의 사정상 다양한 산학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니 잡다한 주제를 조금씩 건드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졸업을 준비할 즈음 박사 학위 논문을 정리하려 그동안 출판한 논문들을 엮었을 때, 그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제목을 도저히 만들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크게 연관 없는 두 개의 줄기를 이어 붙여 제목을 지어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졸업 후 진로를 모색할 때도 문제였다. 졸업을 앞두고 미국에 박사 후 과정, 포닥 자리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전공 분야가 분산되다 보니 이력에서 전문성을 보여주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래픽스 하드웨어/아키텍처'는 GPU가 출현한 이후 업계가 학계를 추월한 지 오래되었고, '과학적 시각화, 렌더링' 분야를 잘하는 학교 쪽으로 지원하기에는 내가 해온 연구 깊이가 너무 얕았다.


이후 삼성에 입사한 뒤부터는 경력의 깊이를 더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내 경력에서 '시각화, 렌더링' 분야는 과감히 버리고, 그래픽스 하드웨어를 줄기 기술로 시작해 그래픽스 특화 DSP 프로세서, 모바일 GPU 프로젝트들로 업계 경력을 쌓아갔다. 동시에 GPU/그래픽스 기술 트렌드에도 항상 민감했다. 미국 학회의 기류를 읽고 광선 추적(Ray Tracing)이라는 새로운 가지를 뻗어냈다. 당시 업계의 GPU에는 아직 포함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삼성에서 보낸 11년 동안 많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GPU라는 줄기 기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조직 개편으로 부서는 가끔씩 바뀌긴 했지만, 내가 하는 업은 끝까지 사수하려 했다. 경로를 이탈하는 순간 내 전문성은 와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지켜온 커리어가 인텔을 거쳐 현재 AMD의 GPU 아키텍트 자리로 이끌었다. 


전문 분야를 지키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현재까지 내가 걸어온 업계에서의 궤적을 뒤돌아 봤을 때 하나의 줄기 기술로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는지를 보라. 대학에서의 전공, 참여했던 프로젝트들, 진급, 이직 등등으로 업계에서 보낸 경력을 통해 한 분야에서 꾸준히 성장해 온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 자신이 이력에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서사가 없다면, 당신의 이력서를 보는 인사 담당자는 더욱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융합형 인재가 절대적인 미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가 업계에 우선 증명해야 할 것은 전문성이다. 전문성 없는 잡다한 경험들은 결코 융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풀 스택 엔지니어'라는 허상에 갇히지 말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향후 5년, 10년 뒤 내가 전문가로 불리기 위기 위해서 그동안의 경력 경로를 일관되게 지켜 나가야 한다. 그것이 글로벌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 길고도 지난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AMD에 입사하려 인터뷰를 볼 때 일이다. 면접관 샘 나프지거(Sam Naffziger)를 만났다. 한국으로 따지면 전무급 정도의 임원이던 샘은 실무 엔지니어 기술, 특히 저전력 설계로 업계에 족적을 남겨 IEEE Fellow에 선임된 인물이었다. 그가 면접에서 내게 해줬던 조언이 있다. 


"엔지니어 경력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CPU와 GPU의 전력을 덜 소모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30년 넘는 시간을 업계에서 보내왔다. 그러한 치열한 고민이 지금의 나의 자리를 만들었다."


샘의 조언은 내가 AMD에 입사한 이후 아직까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이 되었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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