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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Sep 28. 2020

네가 걸어온 길은 최고였어

당신의 선택은 항상 최선이다.


가끔씩 인터넷에서 ‘대학원 진학’에 대한 글들을 보곤 합니다. 대체로 해주는 대답은 자신이 장래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고 장차 교수직과 같은 학계에 뜻이 있다면 진학을, 단순히 고급 지식 습득이나 경력을 위해서라면 바로 취업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문제는 하고 싶은 것조차 모른다는 것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학원을 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청년들 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명확히 아는 친구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저 질문에는 ‘장래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실업, 학력 인플레가 심화된 요즘 같을 때, 조금이라도 나은 스펙을 위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자문’ 하라는 주문은 그래서 공허하기만 합니다. 애초에 심도 있는 학문을 해봤어야 열정이 있는지도 알지 않을까요? 학계나 업계 그 어느 곳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조차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나 한국만큼 그 나이에 맞는 위치를 강조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대학원 졸업으로 남들보다 늦어진 사회진출이 독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아 제때 진학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하죠. 두 선택지의 장단점은 극명해서 자칫 막대한 기회비용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열악한 처우에 노출된 대학원생은 ‘돈이나 벌 걸’, 자신의 스펙에 아쉬움을 느끼는 직장인은 ‘대학원에 갈 걸’이라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곤 합니다.


어떠한 선택이든 후회하기 마련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markstivers.com/

 

인생은 선택과 후회의 연속


저도 애초부터 진학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군에서 전산병으로 근무하면서 코딩에 대한 재미를 붙이고, 전공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어렴풋한 생각에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자대와 타대를 고민하다가 조금이라도 나은 대학원에 가고 싶어 몇 달을 준비해 상위 학교로 옮겼죠.


때마침 한국은 IMF 금융위기가 터져 취업의 문이 거의 막힌 상황이라 타의 반 자의 반의 진학이 되었습니다. 대학원에 막 진학했을 때만 해도 박사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연구실에 간 첫날 제가 선배에게 한 질문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불킥을 합니다.  


“저는 사정상 석사만 할 건데요, 여기 졸업하면 취직은 잘 되나요?”


선배는 웃으며 다들 취업은 잘한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어떻게 연구하고, 공부할지 포부를 보이기는커녕 취직 걱정이나 하는 신입생이 얼마나 우스웠을까요.



석사 2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교수님, 프로젝트 보조만 하다가 연구라는 것을 해보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늘 아쉬웠습니다. 졸업을 위해 쓴 석사 논문도 학술적 가치가 있기는커녕 가볍기 짝이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죠. ‘나도 박사과정이 되어 제대로 연구해야겠다’라는 생각에 덜컥 박사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모 대기업에서 받던 학술장학금을 모두 되돌려 주면서까지.


박사과정이라고 여유롭게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안서, 프로젝트, 보고서 등 연구 외로 해야 할 잡일의 수준만 높아졌습니다. 그다지 좋은 논문도 쓰지 못했죠. 지난하고 궁핍했던 박사과정을 그렇게 보내고 삼성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군 휴학 3년 후 학부 졸업, 석사 2년, 박사 5년 반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나이는 이미 서른 넷이었죠. 그 뒤 삼성에서 11년을 보내고 미국에 온 지금, 가끔씩 내가 지나왔던 길을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 과거에 내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지금 내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대학원을 안 가고 바로 취업을 했더라면? 더 빨리 자리 잡아 돈도 더 많이 모았겠지? 결혼도, 출산도 훨씬 빨랐을 테고. 대학원 진학을 미리 계획했더라면 어땠을까? 특례요원을 할 수 있어 군대도 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 더 잘 준비해서 좀 더 좋은 학교로 진학을 했으면, 학계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예 유학을 갔더라면? 내 대학원 경력이 좋은 논문으로 더욱 화려해졌을 텐데. 영어도 지금보다 훨씬 잘했을 테고. 그렇게 과거의 제 선택에 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나지 않는 의미 없는 가정법이 됩니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


하지만, 여기까지 온 제 인생은 단순히 제가 내렸던 작은 선택들의 결과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아는 것은 학부를 졸업하던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일 뿐이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진로를 걱정하던 그때로부터 미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지금까지, 그 20년간의 시간 동안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과의 인과(因果) 속에서 내 삶의 족적이 채워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아쉬움을 낳았겠죠.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내린 선택은 그 시점의 '현재'에서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학부생들도 똑같은 고민을 합니다. 실리콘 밸리의 IT기업으로 가기 위해서 박사학위가 필요할까요? 스타트업 아니면 대기업으로 가야 할까요? 버클리 대학원의 어드미션과 구글의 오퍼를 같이 받았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선배에게, 지도 교수에게, 멘토들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이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별반 우리와 다르지 않죠. 하지만, 선택 뒤에 찾아온 새로운 길에 충실하고 자신의 경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래만을 생각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respect.cz/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할 때 'Connecting Dots'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내가 내린 '선택'이라는 점(dot)들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며 미래의 점들을 연결하지 못하고, 대신 뒤를 돌아보며 과거의 점들을 연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그리는 미래의 점들이 어떻게든 과거의 점들과 연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와 계획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내린 선택은 미래의 나에게 최선일 것이라 믿고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더 나은 내 미래를 열어주는 길이 아닐까요?


대학원 진학에 대한 제 경험과 장단점을 알려주고 싶어 시작한 글이었지만, 결국 이를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말 한마디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이후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 만날 미래의 나는 ‘네가 걸어온 길은 최고였어’라고 말해줄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 예나빠.


ps.


<실리콘 밸리에서 취업하려면 석박사 학위가 필요한가요?> 

취업만으로 봤을 때 결론부터 말하면 필요없다. 가장 많은 직군인 Software Engineer를 예를 들어보면, 채용 과정에서 학위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 철저히 문제해결 능력, 코딩 실력으로 검증해 채용한다. 그래서, 미국의 Computer Science를 전공한 학부생들도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지향하는 경우 석박사 학위에 대한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4-5년 동안 보낼 시간에 회사에 더 빨리 입사해 실무경험을 쌓는 것이 커리어 측면에서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정 수준의 학위를 요구하는 직군은 있다. Reaserch Scientist와 같은 '연구'가 본업인 직군은 박사, 최소 석사학위 이상을 요구한다. 연구원을 채용할 때는 지원자가 대학원에서 진행했던 연구실적을 심도있게 본다. 지원자가 발표한 논문의 주제, 수준, 지원한 회사 연구와의 적합성을 토대로 채용을 결정한다. 

다만, 엔지니어 직군의 경우라도 채용과 별개로 업무 수행시 대학원과정을 통해 길러져야 할 역량이 필요할때가 있다. Tech회사에서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다양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의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기위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과정에서 논문을 찾아 읽고 이론을 바탕으로 구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학원 학위과정에서 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글과 같은 소프트웨어 회사는 박사학위자가 30% 이상 되기도 한다. 

또한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의 실리콘밸리 Tech회사로 취업하기가 쉽지가 않다. 한국-미국 현지간 취업 정보의 비대칭성, 비자 문제, 언어 장벽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미국에서 최소 석사 유학을 한 뒤 미국 회사에 취업하기도 한다. 현지에서 일종의 적응 기간을 거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대학원을 진학하여 연구 실적, 코딩 실력, 영어 능력을 쌓아 도전하기도 한다.

정리하면, 채용 프로세스만으로 봤을 때 학위가 필요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1) 깊이있는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고, 2) 현실적인 준비기간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진학을 권하는 편이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이 되면 학점관리, GRE, 영어를 잘 준비해, 미국 석사 유학을 통해 현지에서 도전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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