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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Oct 19. 2020

상무님 다시 한번 재고해주십시오

직원을 평가하는 두 가지 원리: 상대성과 절대성

“상무님, 다시 한번 재고해주십시오. 저희 팀만큼은 안됩니다.”


평소 상사의 말에 고분고분했지만 그때만큼은 저도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논리가 바닥을 드러내자 읍소까지 하기 이르렀죠. 그만큼 필사적이었습니다. 정작 내 팀이 해체될 때도 이때만큼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임원과 팀 고과에 관한 면담을 하던 자리였습니다.


완벽한 타인을 만드는 상대성 이론


해마다 평가 철이면 그룹장, 랩장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바로 마법의 비율 10% 때문이었죠. 그룹원의 10%는 최상위 고과 'EX'(excellent)를 가져갈 수 있었는데, 또 다른 10%는 최하위 고과 'NI'(need improvement)를 받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NI'를 누가 받느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룹원 어느 누구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 없고, 실력이나 실적이 떨어지는 사람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이 “저성과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겨야 하냐 말이죠. 관리자의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나다니엘 호손. 주홍글씨


'NI' 등급을 받는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연봉, 보너스뿐만 아니라 진급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진급이 몇 년 늦춰질 수도 있었습니다. 누적된 고과 점수로 진급이 결정되기 때문이죠. 고과를 최종 결정해야 하는 랩장으로서, NI 대상자 10%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고역이었습니다. 당사자가 입을 대미지를 모를 리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고과 면담 자리는 고과권자도, 피고과권자도 곤혹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자네가 ABC라는 이유로 올해는 이런 고과를 받았네. 아쉽겠지만 내년에...."라고 고과권자가 나름의 사유를 설명하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아무도 이 말에 "넵, 상무님! 내년에는 열심히 해서 NI 안 받을게요."라고 웃으며 대답할리 없었습니다. F학점과 같은 최하위 고과를 받으면, 회사에서 낙오자, 루저가 된듯한 기분이 들고, 서러운 마음이 족히 몇 달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출처: https://www.istockphoto.com/



회사에서 정한 평가 정책은 간단했습니다. 학교에서 성적으로 등수를 매기듯 직원을 일렬로 세운 후 정해진 비율에 따라 차등 등급을 주는 상대 평가 방식이었죠. 각 팀 리더들에게 팀별 순위표가 올라오면 랩장은 그룹장들과 함께 이들을 조정(calibration)해서 최종 리스트를 만들었고, 이 리스트에 금과옥조 같은 비율을 적용했습니다.


팀 관리자였던 저도 평가 철이면 팀원들을 평가해야 했습니다. 바로 나를 포함한 팀원의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었죠.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팀원 모두 열심히 했고, 상대적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업무도 달라 단순 비교도 불가능했죠.


결국,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을 계량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내려준 평가 항목들을 월별, 주별로 잘게 쪼개 수치화했고 이를 합산한 최종 값으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게 쪼갠다 한들 각 항목에 입력할 점수는 결국 제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항목을 잘게 쪼갬으로써 그 '주관적 판단이 주는 위험성'이 분산되기 바랄 뿐이었습니다. 최종 순위를 보낼 때마다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결과가 맞는 건가, 가장 후순위로 가는 친구는 억울한 점이 없을까?'라고 생각하며 몇 번이고 데이터를 살펴봤습니다.


그렇게 순위표를 보낸 며칠 뒤면 랩장과 팀 리더들은 1:1 면담을 했습니다. 자신이 제출한 팀 순위표에 대해 소명하는 시간이었죠. 팀원 A가 왜 팀원 B보다 우선하는지, 왜 팀원 C가 팀원 B 뒤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랩장은 각 팀의 사정도 듣고, 최종 고과 면담 시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각 팀 최후 순위자들이 최종 NI의 후보군에 들어가게 될 거야..."


전혀 생각지 못했던 랩장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해 팀 성과가 꽤 좋아, 저나 팀원들은 은근히 좋은 고과를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죠. 팀에서 NI 고과자가(후보자 조차도) 나오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순간 반사적으로 팀원 C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팀 최후 순위자. 아니, 최후 순위자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차순위자.


당시 우리 팀원은 단 두 명이었습니다. 선행 연구를 하는 파일럿 팀이었기 때문에 소수정예(?)로 운영되고 있었죠. 개발을 하는 타 팀들이 10명 내외의 인력으로 구성된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팀을 형평성 있게 관리하고자 하는 랩장의 의지는 알겠으나, 10명 팀과 2명 팀의 최후 순위자들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설득했습니다. 기술이전, 사내 전시회, 특허 등등 우리 팀이 올린 실적을 강조했죠. 어쩔 수 없이 순위 매김 당했지만, C는 절대 NI를 받을 인력이 아니라고, 아니, 애초에 2명 팀과 10명 팀에서 각각 NI 후보를 내야 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물론 억지일 수도 있었습니다. 임원 입장에서는 누군가에게 NI를 줘야 했고, 10명 팀이나 2명 팀이나 후순위자들 모두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입니다. 사정이 없는 팀은 없었겠죠. 인원과 무관하게 팀별로 후보를 내는 것이 형평성에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다행히도 우리 팀원 중 'NI'를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제 설득이 먹혀서 C가 애초에 'NI' 후보군에서 빠진 건지. 아니면, 후보군에 들어갔다가 조정 과정 중에 탈출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출처: https://internetretailing.net/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하는 내내 평가 시즌이면 '상대 평가'를 받거나, 해야만 했습니다. 직원을 경쟁시키고 성과를 쥐어짜는 방식이었지만, 다행히도 소속 팀원들은 평가 때문에 서로를 배척할 정도로 인성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필요하면 서로 잘 도와가며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평가 철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며 의식할 수밖에 없었죠. 모두들 '올해 팀 순위는 어떻게 될까?' '난 저 친구보다는 확실히 잘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고, 'XX님은 팀장이니까 어차피 고과 잘 받을 거잖아요!' 라며 푸념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죠. 그렇게 고과 때문에 경쟁관계에 놓이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완벽한 타인'이 되어 갔습니다. 회식에서, 간담회 자리에서는 모두 가족같이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끝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저울질하는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절대'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미국 이직이 결정된 후, 이민을 준비하면서도 알고 있는 새로운 회사에 대한 정보는 정작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평가 방식도 그중 하나였죠. 입사 전에도 기회는 있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엄청난 '성과 검토(performance review)' 문화는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사 전부터 걱정하고 싶지 않았죠.


매니저와 첫 1:1 면담을 하던 날, 제가 했던 첫 질문은 회사의 '직원 평가' 방식이었습니다. '절대평가인지, 상대평가인지..', '평가 주요 기준은 무엇인지..', '목표 설정은 어떻게 하는지..' 그렇게, 뭔가 응어리진 것을 토해내듯 평가에 관련한 질문을 쏟아냈죠.


"우리는 직원을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않아. 연초에 개인별로 목표나, 역량 개발 계획을 설정하고 연 2회에 걸쳐 평가를 하지. 개인의 목표와 성취 여부만으로 그 직원을 평가하고, 그건 타 직원의 평가 결과와는 무관해."


"아, 그럼. 고과 할당 비율 같은 것도 없는 건가요?"


"응, 그런 것 없어. 이론상으로 전원이 최상위 고과를, 또는 전원이 최하위 고과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상대평가가 아니라는 말에 무언가가 가슴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오랫동안 족쇄처럼 나를 구속하던 무언가, 받으면서도 하면서도 늘 마음 한 편 편치 않았던 '평가'라는 굴레가 한 번에 벗겨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팀 전원이 최상위 고과를 받는 꿈과 같은 상황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론'일 뿐이었죠. 팀마다 샐러리캡(Salary Cap, 팀 연봉 총액 상한선)이란 것이 있어 매니저가 잘 주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절대평가'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진리'가 아닌 '절대'라는 말이 나를 자유케 했죠.


임직원들을 등급별로 묶는 Stack Ranking. 출처: https://www.wsj.com/


Intel 뿐 아니라 이곳 실리콘밸리의 많은 회사들이 처음부터 이런 평가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과거엔 이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직원들을 줄 세우는 일명 'Stack Ranking' 시스템을 사용했다고 하죠. Microsoft 나 Amazon이 대표적인 회사였습니다.


덕분에 직원들은 서로 경쟁했고, 성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상호 비협조적이었으며, 성과가 안 보이는 일에는 모두 방관자가 되었죠. 앞에서는 웃고, 등 뒤에서 칼을 꽂았습니다. 남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다면 평가 시 동료, 상사를 깎아내리는 배신 (backstabbing) 행위가 횡행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들 모험을 꺼렸고, 입을 닫았죠. 사내 정치, 파벌, 소통의 단절로 조직 문화가 경직되는 큰 부작용을 낳으면서, 기업들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을 파괴하는 상대평가 시스템을 버리고,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와 같은, 팀과 조직의 목표에 연계된 개인별 성과관리를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뒤로 실리콘밸리는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측정할 수 없는 우리의 가치


연말 평가 철이 되면 자기 평가서(Self-assessment)를 작성하며 일 년을 돌아봅니다. '세 가지 성취'라는(three achievement) 항목을 통해 주요 업적을 정리하고, 향후 역량 개발 계획을 함께 기술하죠. 자신의 업적을 최대한 포장합니다. 연구 결과가 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수치화하고 적절한 형용사를 사용하여 결과를 강조하죠. 본인 홍보는 본인이 해야 합니다. '겸손'이 미덕이 아니죠. 최소한 이곳에서는 말이죠.


그렇게 공들여 쓴 자기 평가서를 넘길 때마다, 한국에서도 작성하던 자기 평가서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업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영혼까지 끌어모아 항목을 채웠죠. 자기에 대한 평가 등급을 쓸 때면 포커판에서 블러핑을 하듯 모두가 (최)상위고과를 써냈습니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고과권자에 의해 등급은 깎여 나갑니다. 겸손히, 아니 적정한 등급이라고 적어내도 결국 깎이기 마련이죠. 그래서, 무조건 지르고 봐야 했습니다.

 

저는 무조건 EX입니다. 랩장님. 출처: www.titanpoker.com


상대 평가란 그런 것이었죠.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고 좋은 평가를 기대했다가도, 내 옆의 동료가 '나보다 더 높은 목표를 세웠고 초과 달성'이라도 해버리면, 내 등급은 바로 낮아집니다. 그래서 애초에 목표, 목표 달성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었죠. 그리고, 저는 그 상대성에 피해자이기도 수혜자이기도 했습니다.



올해도 저는 '평가'받을 것입니다. 그 평가가 '절대성'을 갖는다 해도 그 또한 역시 누군가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한 것이겠죠. 피고용인이라면 이 '평가'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겠지만, 마음만이라도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나와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죠. 인격,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가족에 대한 사랑, 동료애. 그것은 회사가 주는 등급보다 훨씬 값진 것일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임원에게 읍소하며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등급이 아니라 세상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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