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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Oct 11. 2020

그들은 왜 이리 열심히 일할까요?

실리콘밸리 세계관이 만들어준 강력한 동기부여



“이럴 거면 미국에 왜 왔어!”


어느 날 아내가 사자후(獅子吼)를 내질렀습니다. 애들이 잠든 밤이면 어김없이 서재로 들어가 낮에 못다 한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이 못마땅했나 봅니다. ‘미국 가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남편의 달콤했던 속삭임이 사기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출처: 드라마 완벽한 아내, KBS


저뿐만 아니라 저희 팀 친구들도 모두 일을 참 열심히도 합니다. 여기서 ‘열심히’란 부지런하다기보다 ‘스스로 일을 잘 찾아’한다는 말이죠. 일을 선택하는 자유도가 높은 리서치 직군임을 감안하더라도, 자기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동료들과 공유하곤 합니다. 몇 번의 토의를 통해 아이디어는 다듬어지고 제안자의 연구 프로젝트가 됩니다. 다소 미래지향적 주제라면 당분간 연구로만 진행되고, 수년 내 사업화 가능성이 있다면 사업부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사업화가 모색되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기술적 결정은 실무자들이 스스로 내립니다.


매니저는 팀 프로젝트들의 진행사항을 담당자와 1:1 면담을 통해 파악하지만, 기술적 디테일에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씩 프로젝트 운영상의 이슈가 발생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고, 필요할 때는 조언도 아끼지 않죠. 매니저로서 오랜 이력이 있어 웬만한 이슈는 그의 경험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기 주도적인 문화는 연구원들이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적게는 1~2개, 욕심이 있는 친구들은 4~5개까지도 동시에 해내죠. 가끔씩 밤에 온라인에 접속했을 때 사내 메신저에 아직도 ‘Available’의 상태로 불이 켜져 있는 친구를 보면 탄성이 나옵니다.


“아니,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나 같은 범인은 어떡하라고!”


저희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천재는 노력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사진출처: 토크가 하고 싶어서


그리고 보면 저도 미국으로 이직한 뒤로 무언가 홀린 듯 일에 몰두한 것 같습니다. 육아에, 가사까지 돕느라 남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조금의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누가 그랬나요, 실리콘밸리에는 야근이 없다고. 야근(夜勤)이 '야심한 밤에도 일한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면 이는 이곳에도 실체적으로 존재합니다. 단지 장소가 ‘사무실’이 아닌 ‘자신의 집’인 것만 다를 뿐이죠.


연구(硏究)라는 업종자체가 그렇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뭘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게 바로 연구’입니다. 겨우 한 문제를 풀어내면 무수한 의문이 솟아나, 새롭게 일거리가 파생되는 네버엔딩 스토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이 파놓은 함정에서 끝없이 허우적대는 활동이 바로 연구입니다. 연구원은 그래서 진리를 끊임없이 쫓는 구도자(求道者)와 같죠.


무념무상으로 구도자의 길을 걷던 와중에 아내의 일갈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했죠.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일을 왜 이리도 ‘열심히’ 하는지. 노력하는 천재를 따라잡기 위해?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조직문화나 근무환경이 좋아서? 아니면 일자체가 좋아서?


성장형 사고방식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가는 세계관


이 회사에 인터뷰를 볼 때 인터뷰어로 들어왔던 (현재 팀원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 회사가 좋아. X사나 Y사의 연구팀과 달리, 내가 한 연구가 이 회사의 다양한 제품에 영향을 줄 수 있거든. 그게 아니면 난 X사 갔을 거야.”


‘노력하는 천재’에게 동기부여는 ‘기술적 영향력 (technical influence)’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연구해 발명한 기술이 제품을 통해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친구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죠. 이 친구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연구 주제에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점심을 같이하던 옆 팀의 또 다른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실제로 이직에 뜻이 없더라도, 2년마다 이직 시장(job market)에 나가보곤 해. 내 몸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면,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거든.”


이 친구는 자신의 성장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경력을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환산하면서 자신의 커리어 향상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던 이 친구는 결국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의 한 회사로 이직을 했습니다.



인간의 사고방식(mindset)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스탠퍼드 대학 교수 Carol Dweck은 사고방식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주어진 문제를 배움과 성장의 기회로 이해하는 성장형 사고방식(growth mindset)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회피하는 고정형 사고방식(fixed mindset)이죠. Carol교수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기르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라고 합니다. 이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데 주저함을 떨치게 하고 결국 재능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성장형 vs 고정형 사고방식. 이미지 출처: https://www.yesfutures.org


실리콘 밸리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많은 엔지니어들에 의해 동작하고 있습니다. 현재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곧 자신의 커리어가 되고, 그 노력만큼 결국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일 자체가 주는 성취감이든, 승진, 이직을 통한 연봉 상승이든 말이죠.


이 사고방식의 엔지니어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 결과가 제품으로 출시되어 사용자들에게 전파됩니다. 그 결과는 이들의 경력을 한 단계 성장시키고, 적정 수준에서 이직을 시도해 자신의 가치를 키웁니다. 시간과 장소를 옮겨가며 발생하는 이러한 선순환이 실리콘 밸리 전체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수렴할 수밖에 없었던 직장인의 생애주기


과거의 저에게도 뜨거웠던 두 번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갓 입사했을 때입니다. 저는 그때 소위 신입사원이 겪는 ‘회사 뽕’에 취해있었습니다. 부모님의 감동, 주변인들의 축하, 새로운 일터에 대한 기대감, 나를 강력히 원했던 부서장의 모습에서 ‘뭐라도 된 것 마냥’ 우쭐하기까지 했죠. 5년 내에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받고 말겠다는 허황된 꿈도 꿨습니다.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삼성그룹이 해마다 각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올린 임직원에게 주는 상. 전 임직원 중 12명에게만 시상하고 시상자는 상금, 발탁 진급 등 최고의 명예가 돌아간다.

부서에서 진행되는 모든 프로젝트는 인상적이었고, 내 전공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를 알아간다는 즐거움에 밤이 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회사 뽕은 오래가지 못했죠. 입사 한 달 만에 조직개편이 되었고, 내 선호도와 다른 조직에 배치되며 의욕이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가지 않는 회사라는 스팀팩. 출처:스타크래프트 2


두 번째는, 내가 발굴한 연구주제가 인정되어 제 독자 팀을 갖게 된 때였습니다. 실무를 하면서도 프로젝트, 대외 협력 관리업무까지 도맡아야 했지만 힘들지 않았습니다. 빡빡한 일정에 연구, 개발, 시연, 그리고 논문까지 쓰느라 팀원들과 불같은 주말을 보냈죠. 팀원들은 모두 뛰어났고, 해마다 성과도 나왔습니다. 고과도 최상위를 찍었죠. 성장형 사고방식을 갖고 업무를 주도했던 제 경력의 정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장이 끝내 열리지 않았고 팀이 해체되면서 5년간의 노력이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고, 저와 제가 하는 일의 온도는 점차 식어만 갔습니다.


직장인의 생애주기. 출처:뇌피셜


제가 보아왔던 동료들, 상사들도 대체로 비슷한 생애주기를 그렸습니다. 열정과 패기 넘치던 신입시절부터 경력을 키워가며 점차 상승곡선을 향합니다. 몇 번의 진급 뒤 열정의 정점을 찍은 후 서서히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죠. 조직 개편으로 자신의 팀이 없어지기도 하고, 부서 이동으로 새로이 전환점을 맞기도 합니다. 누구는 임원이 되고, 누구는 권고사직을 받기도 했습니다. 직장에서의 부침은 이들의 생애주기에 작은 변곡점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한쪽으로 수렴합니다. ‘월급’만이 ‘출근’의 유일한 이유가 돼버리는 지점으로. 

월급날이 제일 행복했어요. 출처: 미생.


‘나는 지금 이 일을 왜 이리 열심히 하는가?’


그 수렴 구간을 통과했던 제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답은 하나입니다. 충실하게 보낸 ‘오늘’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죠. 그 믿음은 절대자에게 향한 맹목적 신앙이 아닌, 이 실리콘 밸리의 세계관이 만들어준 강력한 동기부여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온도를 유지시키는 힘. 하루아침에 회사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며, 언제든 짐을 싸 회사를 나가야 할지 모르는 살벌한 이곳에서,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 예나빠


ps.

<왜 실리콘밸리의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일하나요?>

모든 직원들이 자발적(self-motivated)으로 일하지는 않는다. 여기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다양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당연히 일, 연봉, 인간관계, 조직문화에서 스트레스도 받으며 살아간다. 다만, 그 스트레스를 해결할 방법, 나아가 더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직원들이 동기부여를 갖게 하는 요소는 성취감, 복지혜택, 연봉, 주식, 경력 향상 등 다양하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일'이다. 일자체가 자신의 적성에도 잘 맞고, 자신의 일이 업계에 파급력도 있으며, 정체감 없이 항상 도전적인 과제가 주어진다면 '일'자체에 만족하게 된다. 이런 직원들은 조직에서 주로 '승진'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곤 한다.

둘째는 '돈'이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좋은 커리어를 쌓아 자신의 몸값을 키우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직원들은 주로 주기적인 '이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한다.

셋째는 '가족'이다. 일이나 돈보다 자신의 '가족'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일을 무시하지 않고(그래서는 살아남기도 힘들지만), 필요한 만큼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 노력은 가족에게 쏟는다. 이런 직원들은 승진도, 이직도 아닌 본인의 '시간'을 추구하게 된다.

이 세 가지 가치관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일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돈을 포기하지도 않고, 돈을 중요시한다고 가족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 가지 모두 은퇴할 때까지 별 무리 없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이 인정되고 각자의 살 길이 열려있다는 것이 실리콘밸리만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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