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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Nov 13. 2019

임시 유럽 체류자 신분 이용해먹기

모험이 두려운 날의 기억력


모험의

현실적인 여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모험을 동경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나는 전자다. 적어도 스물둘에는 그랬다. 길 위의 난관에 맞서 성장하고 새로운 친구들의 다름을 포용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어려서부터 여러 날을 원했다. 대개 화려하고 유명한 고전 속에서 모험을 떠나고 역사를 이루는 주인공들은 꼭 그런 모습이었다. 근사했다.


그러나 새로운 만남과 모험을 동경한다고 말하기에는 실제 내 기질은 그 꿈과는 거리가 있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간이 날 때면 혼자 책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 하는 것을 좋아했고,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찾아 다니며 또래 들과 몰려다니는 일들은 어쩐지 피곤했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잠든 밤이면, 책에서 찾은 나만의 문장들을 잡아먹으며 스무 살을 넘겼다. 내게 여가의 유희는 아주 어려서부터,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방식으로 채워졌다.


다만 책 속의 휘황찬란 한 자연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먼저 겪어본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만날수록, 내심 책장 밖이 궁금해지긴 했다. 진짜일까? 정말 그 모든 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어디 한번 누려보고 싶어. 이런 음식, 저런 자연, 그런 웃음들.


내향적인 성향은 오히려 스스로에게 밖으로 나가보고 싶지 않냐고, 소곤소곤 주문을 걸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내게 진짜 모험할 여건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을 때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University of Oslo)로 교환학생을 가게 됐다. 낯선 나라로의 공식적인 임시 체류를 인정받은 덕분에,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혼자 떠나는 세계 여행에 유리해진 것이다. 신기하게도 스무 살을 훌쩍 넘은 그 나이쯤 되니 붙임성도, 포용력도 10대 시절보다 더 자라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진짜 떠나보기로 했다. 가보자. 최대한 내가 안 해봤던 낯선 방식으로. 모험답게. 내 모험의 베이스캠프를 노르웨이 오슬로와 유럽 대륙 전체로 삼아서.


그리고 나는 이때 그 모험을 도와줄, 흥미로운 것을 하나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라는 웹사이트다. 카우치서핑이란 일종의 여행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로,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남은 방이나 카우치를 낯선 여행자에게 빌려주거나, 때로는 자신이 여행을 떠나면 낯선 현지인의 집에서 잠을 신세지면서 여행하는 것을 즐겼다. 쉽게 말하면 그 웹사이트는 여행자와 여행자 간의 카우치 공유 플랫폼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시작된 이 카우치서핑은 미국과 유럽의 20대 사이에서는 이미 꽤 알려져 있는 듯했다.



* 집 안에 있는 카우치(Couch, 한국에서는 흔히 소파라고 한다)를 서핑(Surfing)하듯 여행을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참조

카우치서핑 공식 웹사이트

 YES24 카우치서핑 안내 웹진 기사, 나는 2011년에 카우치서핑을 했다



이게 웬 신세계람? 나는 너무나 반가웠다. 일단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왜 옛날이야기를 보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인심 좋은 마을 주민들이 잠도 재워주고 밥도 챙겨주질 않나. 어라? 요것 봐라? 그런 오래된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여행을,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당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웹사이트를 구석 구석 뒤졌다. 내 입장에서 카우치서핑은 교환학생 확장판과도 같았다.


당시 나는 오슬로에서 하루하루 낯선 나라에서 온 외국 애들과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친해져 볼까 연구하느라 바빴다. 낮이면 수업에서 옆자리 친구들과 몇 마디라도 나누길 원했고, 밤이면 각종 기숙사 키친 파티에 참석하면서 남미, 유럽, 동남아 등지에서 온 아이들과 페이스북 아이디를 교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사교활동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것은 단순히 '교환학생의 적응력'을 인증하기 위한 몸부림 만은 아니었다. 한국과는 다른 글로벌 사교 현장에서 색다른 자극을 쫓아서도 아니었다. 나와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아이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나의 존재가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나라 등 익숙한 집단이 아닌 커뮤니티와도 소통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알게 했다. 국적을 초월한 커뮤니티에 대한 소속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내게 카우치서핑이야말로 딱이다 싶었다.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학교나 학생 기숙사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큰 초경계 교류의 장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구석구석 웹사이트를 뒤져보니 이내 카우치서핑 커뮤니티만의 용어도 습득할 수 있었다. 여행자에게 무료로 잠자리를 허락하는 집주인은 '호스트(Host)', 그리고 그 호스트의 집에 머무는 여행자는 '서퍼(surfer)'라고 부른다. 전 세계 몇 백 여 개의 도시에 살고 있는 호스트들과 서퍼들을 클릭 몇 번으로 만날 수 있다.


곧이어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걸 하는 걸까? 카우치서핑 이용자들은 여행자를 자신의 집에 맞이하기 위해서 프로필을 공개해야 하는데, 그 프로필만 살펴 봐도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직업, 학교, 국적을 떠나서 자신의 철학을 한 줄로 표현하거나 인상 깊게 읽은 책이나 영화를 내세우며 스스로의 개성을 자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개성 넘치는 외국 친구들의 거실에서 잠을 잔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졌다. 나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남다른 침실을, 거실을, 구경하며 그들과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커졌고, 이 마음은 스스로를 그 어느 때보다 낯가림 없고 담대한 기질이라고 자부하게 만들었다.


‘떠나지 않으면 모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잖아? 내 친구도 아닌 '낯선 외국인'의 집은 단연 그중 하나야!’


게다가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장점이 많아 보였다. 일단 현지인의 개성적인 인테리어나 취향을 가까이서 엿보면서 내 또래들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배울 수 있다. 유명 관광지만 돌아다니면 절대 들여다볼 수 없던 아주 내밀한 현지의 일상에 들어갈 수 있는 거다.


결정적으로는 여행 경비를 절약할 수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카우치서핑은 호스트와 서퍼 사이에 금전 거래가 없는 게 원칙이다. 솔깃했다. 여행에서 숙박비만 빠져도 전체 예산의 절반 가량이 절감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가고 싶던 나라, 보고 싶던 풍경을 만나러 갈 때면 난 카우치서핑을 하겠어! 노르웨이 오슬로 작은 원룸에서 노트북을 덮으며, 나는 분명하게 결심했다.



모험을

시작하는 기분



 ‘아! 북극권의 파리(Paris)라는 말이, 이래서였구나…!’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어느새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인 노르웨이 북부의 작은 도시, 트롬쇠에 다다르고 있었다. 비행기 창밖으로는 ‘북극권의 파리(Paris)’라고 불린다는 트롬쇠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북유럽 도시들 중에서도 유난히 야경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라는 트롬쇠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칠흑 같은 검은 밤사이로 다닥다닥 낮은 빛들이 둥그런 해안가를 따라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옹기종기. 반짝반짝. 나는 두근거렸다. 마치 요정들이 숨어 사는 섬에 들어가는 듯, 이 여행이 시작되는 게 그저 신기했다. 카우치서핑이라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 것일까? 트롬쇠라는 몇 번 들어보지도 않던 도시로의 모험이라서? 요정이라는 말은 분명 그 순간만큼은 그리 낯간지러운 묘사가 아니었으리라.


사실 트롬쇠는 한국에서 흔히 선택받는 여행지는 아니다. 일단 너무 멀다.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 오는 직항도 없지만, 노르웨이 오슬로 국제공항에 도착해서도 국내선을 한번 더 타야 한다. 게다가 관광지나 유적지의 규모 면에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서유럽 나라들에 한참 밀린다.


그런 트롬쇠에 내가 굳이 왜 왔냐하면, 바로 오로라(Northern Lights)를 보기 위해서다. 밤하늘이 마치 요술을 부린 듯, 신비로운 옥빛으로 찬란한 춤사위를 연출하는 바로 그 아름다운 광경, 오로라.


아주 오랫동안 내게 오로라를 보는 것은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어려서부터 세계 문화에 관심이 많아 <EBS 세계 테마 여행> 이라든가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여행 다큐멘터리를 즐겨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브라운관에 담긴 오로라를 보게 됐다. 하늘 위에서 정체불명의 빛들이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TV로 봐도 이렇게 신기한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황홀할까? 성인이 되면 꼭 오로라를 보러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뒤로 한 해 한해 지나면서, 내 안에는 오로라뿐만 아니라 각종 바닷속, 협곡과 계곡들, 그리고 여러 트래킹 코스를 가보겠다는 다짐들이 생겨났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세상의 낯선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들이 쌓여간 것이다. 자연 다큐멘터리 PD가 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싶어 고등학교 때는 섣불리 장래희망을 방송 PD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인데, 결국엔 대학 전공을 미디어 커뮤니케이션(Media Communication)으로 정했으니 어려서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힘이 참 큰 것 같다.


결론적으로 노르웨이로 교환학생을 떠나온 것은, 절대 극성맞은 모험가도 아니고 다소 내향적인 모범생 같았던 내 나름의 전략이라고 할 만 하다. 독특하고 즉흥적인 방랑자의 방식은 아니더라도, 노르웨이 임시 체류자 신분을 이용해 틈틈이 광활한 자연과 각양각색의 여행자 무리 속으로 떠날 수 있던 기회의 시간이었다.


그러고보면 내게 참 많은 사람들이 물었던 것 같다. 왜 교환학생을 노르웨이로 갔냐고. 북유럽이 미국이나 영국 못지않게 영어를 연습하기 좋은 환경이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뛰어난 복지제도를 공부하고 싶어서? 모두 아니었다. 노르웨이는 내게,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모험의 여정을 현실적으로 펼칠 최적의 베이스캠프로 간택된 거라고 해야 맞다.


트롬쇠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뿌듯한 마음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그래, 꿈은 이렇게 이루는 거야.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좋았다. 이 낯선 도시의 차가운 공기가. 어리다면 어리고, 이제 알 만큼은 안 다고 단단히 착각하기도 했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이야기 계속)









브런치 북 소개


좋은 기억력이란 '기억하는 힘'이 아니라 '기억해낼 수 있는 힘'이다. 최대한 많은 과거를 또렷이 외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딱히 생산적인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신에게 힌트를 줄 수 있는 과거의 긍정적인 대화나 사랑받았던 시간들을 필요한 순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늘과 내일의 더 나은 삶의 동기를 찾아내는 데 있다. 그게 진짜 기억력(力)이다.



모든 여행 후에, 모든 사랑 후에, 모든 이별 후에. 우리에게는 기억력이 생깁니다.
지금 당신을 구원하는 기억력은 어떤 말을 걸고 있나요?

20대라면 모두가 여행 중이거나 여행 후인 요즘. 훗날, 우리는 이 젊음을 어떤 시간으로 기억할까요? 바로 그 '훗날'의 입장에서 지난 여행을 소회해 보았습니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만 20살부터 10년 동안 경험한 노르웨이 1년 체류, 카우치서핑 (프랑스,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라트비아, 스웨덴) 은 물론 산티아고 도보 순례 및 리투아니아 워크 캠프 & 터키, 이태리에서의 엄마와 떠난 여행들이 건강한 30대로 성장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여행 후의 기억력>을 공유하겠습니다.





작가 소개


글 쓰고 운동하는 브랜드 마케터.

좋은 기억력과 좋은 일기장에 기대어, 과거형의 기억을 미래형의 문장으로 소환합니다.

@sehee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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