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에서 그라나다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왔다.
아침 일찍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9시 5분쯤 전광판에 플랫폼 정보가 떴고 입구에서 티켓 확인을 받은 후 출발 홈으로 내려갔다.
출발이 오전 9시 25분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기차가 도착했다.
결혼식 후 사돈댁이 챙겨준 올리브오일로 무거워진 캐리어를 열차 수납공간에 넣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기차가 조금 일찍 도착한 것 같았지만 마드리드에서도 열차가 정시 출발을 하지 않았던 터라 별생각 없이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다행히 수납공간이 남아있어 캐리어를 올려놓고, 자리로 갔다.
그런데 내 자리에 누가 앉아 있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티켓을 보여주며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는데 이 기차는 그라나다행이 아니란다.
헐, 멘붕이 왔다.
순간 시간이 멈춰 버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최선의 길을 찾았다.
다음 역이 어디지, 거기서 내려 다시 코르도바로 돌아오면 된다고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라나다에 가더라도 너무 더워서 저녁때나 되어야 밖에 나갈 수 있으니 오늘 중으로 그라나다만 가면 된다고 안위하며 괜찮다고 주문을 외웠다
주변에 있던 스페인 사람들이 기차를 잘못 탄 이방인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 기차는 세비아로 간다고 알려주었다.
조금 있으니 커피를 파는 역무원이 왔다.
기차를 잘못 탔다고 말하니 "카페테리아"라고 말한다.
맨 처음 그 말이 뭘 뜻하는지 몰라 그곳에 서 있었는데 옆 칸으로 갔던 그 직원이 돌아와서 카트를 앞세우며 따라오란다.
도착한 곳은 특등실 앞에 있는 식당칸으로 무전기를 들고 있는 여직원에게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코르도바에서 안내받은 플랫폼으로 갔고 그라나다행 열차인 줄 알고 탔는데 세비아 행 열차였다"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비슷한 시간대에 두 대의 열차가 같은 플랫폼에 진입한 것이었다.
직원은 내 표를 본 후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걱정마라며 세비아에 도착 후 Renfe customer center로 가면 표를 change 해준단다.
우리가 기차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사이, 기차를 잘못 탔다는 소식을 들은 딸부부와 사돈은 난리가 났다.
오늘 세비아에서 시부모와 작별하고 그라나다에서 우리를 만나기로 했는데, 사돈이 기차를 잘못 타서 세비아로 다시 오고 있다니, 여느 때처럼 오래간만에 온 아들과 며느리를 떠나보내며 작별의 눈물을 교환해야 했는데 열차를 잘못 탄 사돈으로 인해 애틋한 시간을 강탈당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딸이 전화가 왔다.
나는 change 해준다는 말의 의미를, Renfe 기차 회사가 잘못 탄 외국인에게 수수료 없이 표를 바꾸어 준다고 이해하고 걱정마라고 했다.
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어떻게 기차를 잘못 탈 수 있냐며 이제 좀 나이 든 걸 인정하고 주변에 물어보면서 행동하란다. 그리고 어떻게 무료로 표를 바꿔주냐며 그런 일은 없으니 표를 다시 끊어야 한다고 핀잔을 준다.
기차를 잘못 탄 것은 인정하지만 역무원과 대화할 때 나는 분명히 무상으로 교환해 주니 걱정하지 말라고 들었는데, 딸은 나의 영어 대화를 영 믿지 못하고 있었다.
딸과 사위는 해답을 찾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우리들이 타고 갈 기차표 두 장을 구입해서 우리가 세비아 도착하면 역을 빠져나오지 않고 플랫폼에서 바로 열차를 바꾸어 타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간대에 도착과 출발이 이루어져 열차를 갈아타기에는 시간상 여유가 없었다.
결국 딸과 사위는 예정대로 그라나다로 먼저 떠났고 사돈댁이 세비아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카페테리아에서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직원은 우리를 특등실로 안내했다.
3열로 된 특등실 내에는 우리 포함 네 명이 있었다.
넓은 특등실에서 편하게 앉아 세비아로 돌아가자니 걱정보다 오히려 이 순간이 재미있고 심지어 웃음이 터졌다.
여행은 이처럼 때로는 길을 잃어버리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비아에 도착해서 플랫폼 출구로 나오니, 사돈 내외가 길 잃은 어린양을 바라보는 눈길로 우리를 맞이했다.
안달루시아 지역은 제스처나 억양 그리고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우리나라 부산과 비슷하다.
바깥사돈이 나를 끌어안고 어깨를 다독거리며, 부산 사나이의 허세로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걱정 마라'는 제스처로 "오늘 그라나다로 떠나는 기차표는 없다"라며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 함께 가자고 이끈다.
바깥사돈은 영어로 대화가 되어, 기차 안에서의 역무원과 대화했던 상황을 설명하고 Renfe 사무실로 가야 한다고 하자 따라오신다.
Custom center가 어디 있는지 몰라 티켓 판매 부스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려 하니 손사래 치며 무조건 번호표 뽑으란다. 아마도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표를 구매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한듯했다.
결국 대기표를 뽑고 순서가 되어 표를 보여주며 설명을 하니 여기가 아니고 다른 곳으로 가라며 알려준다.
바로 코너를 돌아가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시간만 소비했다.
그곳에 두 사람이 일을 보고 있었는데 상황을 설명하고 eticket을 내밀었다.
기차 안에 있던 역무원의 연락을 받았는지, 내가 내민 eticket을 받고 PC 자판기를 두드리며 한참을 조회 후 eticket에 도장을 찍고 수기로 작성된 열차표를 eticket에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준다.
그러고는 열차시간, 코치 번호, 좌석번호를 설명해 준다.
중간 기착 역이 있는데 갈아탈 필요가 없고 대신 좌석만 옮기면 된단다.
그리고 가란다.
별도의 수수료 없이~ 헐 대박.
수기로 써준 티켓은 인쇄된 형태의 종이로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나서 관례화 되어있는 듯했다.
플랫폼에 들어갈 때 표를 검사하는 직원이 티켓과 찍힌 도장을 본 후 별다른 제지 없이 바로 들여보내준다.
아마도 나와 같은 외국인이 자주 있는듯했다.
사위는 엄청난 세금을 쏟아부었는데도 시설은 개선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했지만 그래도 배려심 많은 국영철도임에 틀림없다.
여행을 마치고 문득 한국의 Ktx인 경우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서 문의해 봤다.
답변은 열차 내의 승무원을 찾아 잘못 탄 열차 비용을 지불하고, 미탑승권은 감액 후 환불 그리고 다시 티켓 구매 후 다음 역에서 갈아타야 한단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결혼식 날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돈을 다시 보고 싶어 열차를 잘못 탔다"라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 스페인어로 보여 드렸다.
안사돈이 격하게 동감한다며 웃으신다.
두 시간 가까이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못다 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기차 출발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우연히 사위누나와 남자친구도 만나 소개받았고, 사위와 MBA 과정을 함께 끝마친 한국 중소기업 사장님 부부를 기차역에서 다시 만났다.
이분들은 한국과 스페인 두 곳의 결혼식을 참석하신 분들이었는데, 이분을 통해 사위의 좋은 면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멋진 턱수염을 기른 남편과 그를 지지하는 사모님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우연한 실수를 통해 다시 만난 우리들은 아마도 특별한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것 같다.
열차 출발 전광판에 플랫폼 정보가 떴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포옹을 했다.
사돈은 우리가 혹시 다른 플랫폼으로 갈까 봐, 들어갈 곳을 손으로 가리키고 우리가 가는 내내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나 회포를 풀고 다시 아쉬운 작별을 했다.
기차는 세비아에서 로아를 경유해서 그라나다로 가는 열차였다.
우리 부부는 같은 코치(객실)에 있었지만 좌석은 떨어져 앉아야 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라도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준 Renfe 회사가 너무 고마웠다.
붙임성 많고 사교성 많은 와이프 덕에 우리는 그라나다로 가는 기차 안에서 중국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하나 있는 딸을 유럽으로 와이프와 함께 유학을 보냈고,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합격해 축하 겸 가족여행 중이라고 했다.
대중국 기술유출을 우려한 트럼프의 반 중국 정책으로 입학허가를 거의 내주지 않아 중국에서 프린스턴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은 사람이 총 16명인데 그중 한 명이 자기 딸이란다.
엄청 수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런 딸이 자랑스럽지만 가장 무섭단다. ㅋ ㅋ
사실 우리도 딸이 무섭다고 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웃는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을 알람브라 궁전, 식당 그리고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또 만났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 것 같다.
다음 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