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다 물거품이 되는데
남는게 없었다.
온 영혼을 다 바쳤던 것처럼 내 24시간이, 모조리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건만, 그 대단한 사랑은 벼랑 끝에서 어이없이 끝났다.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시간 같은 것은 내게는 사치인가. 무슨 이런 팔자가 있나 . 나는 계속 지렁이 몸에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변에서는 나를 달랬다.
"그 놈 애저녁에 영양가 없었어. 이 쯤에서 끝나서 나는 다행이야."
"가슴 한 구석에 구멍 뚫린 그림 말이야... 나 알 거 같아... 그게 무슨 심정인지."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 시간이 약이야."
시간.
그래, 그 24시간이 모자라던 그 시간.
바쁜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서 만나도 그 늦은 새벽에도 지칠 수 없었던 그 시간. 내가 쏟아부은 시간. 나는 무엇을 위해 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가.
허무했다. 허무한만큼 사무치게 보고싶었다. 외로울수록 그 이름은 미치도록 생각이 났다. 나는 허탈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네."
"뭐, 반지는 아니라도 목걸이라도 받은 거 없어?"
"하하하하하하."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겠다는 게 없었다. 뭐, 내가 그런 것을 잘 받아내는 종류도 아니긴 하지만. 그런데, 난 그래서 남는게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난 뭘 받아내는 걸 말한 게 아니야. 나는 또 이 나이에 혼자잖아. 이제 누구를 만나 언제 결혼해."
"뭐가 그렇게 아쉽니? 뭘 남겼어야 되? 결혼?"
"우리가 보낸 시간은 그럼, 아무것도 아니야?"
"추억으로 가져."
"그런 추억 있으면 뭐해. 나는 남는게 없어."
말을 하다보니 더 애가 닳았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매일같이 붙어지냈고, 매일같이 연락했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그렇다고 친구로 남은 것도 아니잖아."
"너, 꼭 이혼 못해주겠다고 하는 조강지처같다."
혀를 끌끌차던 내 친구는 나더러 본전이 생각나서 이렇게는 이혼해줄 수 없다고 매달리는 여자같다고 했다. 그냥 쿨한 척, 침 한번 딱 뱉고 유유히 돌아서주라고 했다. 나는 조강지처라는 말에 꽂혔다.
"내가 그래보여? 딱 붙어서 이혼 못해주겠다는? 근데 난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
"니 입에서 나오길 바라고 그딴식으로 군 거야. 결국 니가 말하자마자 끝이었잖아."
"아니야, '그래, 이제 편하게 보자.'라고 했어."
"편하게 뭐 어떻게? 자기 술 먹고 기분 좋을 때 가끔 만날 여지를 흘려두면서? 너랑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랬다. 그 말은 정답이었다. 나도 그 말의 의미를 알기에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 놓고도 그는 오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매번 너는 왜 그랬냐고 물었고, 그는 화를 냈다. 언젠가는 나더러 무슨 말이 듣고 싶냐고 했다. 내가 원한 것은 '그런 말 해서 미안해, 그런 뜻 아니었어.' 였던 것 같다. 나는 그말을 원한다고까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냥 갈 길 가라고. 그래놓고 나는 늘 그를 못잊고 있다. 나는 정말 이혼을 거부하는 전업주부 조강지처인가.
내가 이혼 못하겠다고 구는 이유는 무엇인가.
벌이 없이 내쫓기는게 무섭고 두려운 절박한 이유라도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게 이유가 있다면, 그를 내 인생으로부터 밀어놓게 된다는 것,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어딜 가든, 그와 상관 없어지고,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그는 관심이 없어지고 나 역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지는 그 상황이 두렵다는 것 뿐이긴 한데 그것이 지금의 내게 전부였기에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과 달라지는 점이 두려웠다. 그를 놓기가 두려웠다. 나는 엉엉 울며 말했다.
"이제 이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
"걔는 안 슬플거야. 그걸 생각해봐. 너가 쏟은 그 사랑과 관심과 시간이 억울하지? 억울해서 못 놓으면 너는 그 조강지처야. 그렇게 되고 싶어?"
억울한가.
내가 더 사랑한 것이 아까워서 못 놓는가.
그건 아니다. 그런데, 억울하다는 말을 완전 부인하기도 어려웠다.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 하나가 엄청나게 억울했다. 내가 그에게 2캐럿 반지를 받지 못해 억울한 것이 아니라는 게 더 억울했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을 놓는 것을 억울해하고 있었다.
후배 하나가 고민을 털어 놓았다.
공무원쪽으로 길을 터 보려고 몹시도 노력을 했는데, 잘 풀리지 않아 접고 싶다고. 그런데,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고.
"매몰비용(Sunk Cost)없는게 어디 있니. 털고 가는 거야."
"언니, 나만 이걸 놓는게 너무 억울해요."
문득, 나의 조강지처 코스프레가 생각났다.
나는 정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그를 놓지 못한 것인가. 내가 이런 모습일까. 나는 남는 게 없어서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았던 그 순간들이 기억났다. 나는 애써 멋진척 말했다.
"남은게 있을 거야. 공부하느라 머리에도 남았고, 그 시간도 추억이 될만큼 더 잘될거야."
"추억이 있으면 뭐해요. 그리고 전부 도서관 뿐인데 추억해도 지긋지긋해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추억 있으면 뭐하나.다른 남자 만나면 뭐하나.
내 인생으로부터 너란 사람이 튕겨져 나가고, 나에게는 허무한 몇 가지 기억만 남았는데. 우리는 다시 볼 수 없고, 그나마 나만 이렇게 그 사실에 마음 아파하는데.
나는 그날, 공감의 화신같은 선배가 되어 오래도록 동생을 부둥켜 앉고 울었다.
어떤 에세이 책 글 가운데 '열심히 해도 안되는게 있다'라는 제목이 있다. 나는 제목만 봤을 때는 그 내용을 꽤나 기대했는데, 그 내용은 제목과 크게 매치되지 않아 약간 실망했다. 다만, 읽다가 피식 웃은 부분이 있어 적어본다.
각자에게 주어진 한계를 인정했을 때, 오히려 마음이 안정된다. 현대사회에서 대유행중인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그를 매몰비용으로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인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외로워 견딜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대유행중인 고독이 극복될 수 없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