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우리. 같이.

축하할 일을 혼자 삭이며 쓰는 글

by Nima

아는 분이 남자를 소개해주고 싶다 하셨다. 그럴 분이 아니고, 그럴 사이가 아닌데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라 나는 긴장했다. 다짜고짜 돈이 많다는 둥 어느 학교를 나왔다는 둥 조건을 읊었고, 나는 최선을 다해 관심있는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금방 탄로나고 말았지만.


그 분은 매우 놀랍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니, 과장님 평생 벌어봐, 그 사람 집 못 사."

"알아요, 호호."

"근데 표정이 너무 심드렁한데? 얼굴 봐? 얼굴도 괜찮아. 다 갖췄어."


그러니까 말이다. 그런 분이 왜 혼자인가.

듣기만 해도 그는 젊고 어린데 예쁜 여자를 좋아할 분인데, 왜 나를 갖다 대는가. 괜히 한 번 더 시달리고 싶지 않다. 괜히 차이는 것도 지겹단 말이다.


"만나보는 걸로 해."

"아, 네. 뭐."

"됐네 이제. 그럼, 과장님이랑 나랑 그 분이랑 다 같이 되는 날 보는 걸로 하자. 다음주 일요일 되나"


아. 그런 거였구나.
진짜 '인연이 될 남자'를 만나라는 것이 아니었구나.
3명이 보자는 말, 그 남자와 본인도 서로를 더 알아가야 하는 구나. 그럼 나는 좋은 구색이구나.

그 자리는 소개팅을 빙자한, 사교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러게, 갑자기 그렇게 돈 많은 데, 잘 생겼는데, 학교 어디 나온 사람이 왜 나의 소개팅남이 되는지 고민했던 내가 창피했다. 나는 그 분의 구색만 맞추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 정도의 사람인데, 혼자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왜 이럴까, 아마추어같이. 내 인생의 키워드가 '사랑밖엔 난 몰라'였던가. 나는 오래도록 붉어진 얼굴을 식히느라 진땀을 뺐다.




친구에게 이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마음을 달랬다.

친구는 내게 물었다.


"이 참에 너무 진지하게 볼 생각 하지 말고, 돈 많은 남자 사람 친구 하나 사귄다고 생각해봐, 너도 그 분이랑 같이 만나는 크루(crew)가 되는 거지."

"그런 크루니 남자사람친구니 하나 더 늘면 뭐해?내 인생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변화야 있겠지. 우선 안 보던 부류의 사람을 친구로 둘 거고 그 덕에 인맥도 늘거고."

"인맥 늘어야 일하는 직업이면 난 망했을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봤다고 대단히 나를 잘 아는 척, 또 보자며 빈말 날리는 인맥들. 좋을 때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서 '내 친구'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이 나이에 친구를 하나 더 사귈때에는 내가 죽을 때 서로 보고 싶어할 사람을 골라 사귀고 싶다. 친구는 심드렁해하는 내게 물었다.


"넌 뭐가 제일 급한데? 남자사람친구 사양해야 될만큼 급하게 인생에서 필요한 게 뭐냐?"


나에게 급하게 필요한 것.


그것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남자,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생존 여부를 체크하는, 우리의 반쪽, 내 남자다. 살랑 살랑 겉도는 얘기나 주고 받으며, '가끔 봐요', 혹은 '00이랑 같이 봐요'라고 인사할 사람들은 필요 없다.


눈을 뜨면,

출근길에 오르면,

점심을 먹으면,

일이 꼬이면,

회의가 길어지면,

저녁이 늦어지면,

야근이 힘겨우면,

퇴근길 택시를 잡으면,

내 생각을 떠올리며 내게 안부를 물어줄 내 남자가 필요하다.


'나 이제 들어가려고, 아직 회사니?'

'택시 타면 말해.'

'잘자라.'


바빠도, 떨어져 있어도, 힘겨운 하루,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도, 순간순간 떠오른 나를 생각하며 보내는 한 마디들.

이 한 마디들이 주는 안정감은 그냥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여자가 받을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온 하루를, 그의 머릿속 전체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그의 여자에게 주는 그의 몸 한 조각, 한 조각이다. 그는, 그의 여자와 '우리 언제보지?'를 걱정하고, '우리 같이 있자'고 칭얼대고,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함께. 같이. 가 가능한 사람.

그러기 위해 매순간 온통 내 생존이 궁금한 사람.

그래서 항상 '뭐하니?'를 물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내 남자가 필요하다. 그 소개팅을 빙자한 비즈니스 미팅에서 그런 인연을 만날 자신은 없다. 사실, 이제 어디서도 그런 남자를 만날 자신이 없다.




그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열심히 일 한 만큼, 좋은 소식은 당연했다. 우리가 꽤나 잘 지내던 그 시간 내내 우리가 기다렸던 일이다. 우리, 우리라고 해도 될까.


아니지, 아니야.

이미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나를 버렸고, 나는 홀로 피를 뚝뚝 흘리며,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다가, 엄동설한의 눈비를 맞다가, 피고름을 쏟았다. 흉하게 덧난 내 상처들이 아물어 가는 요즘, 나는 그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간단한 사실을 받아 들였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 좋아 눈물이 났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그는 그러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는, 그가 받아마땅한 결과를 최대한 즐겼으면 좋겠다. 이제 정말 그간의 고생을 추억 삼아 오늘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가 느낄 성취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좋아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홀로 누워 있다보니, 이 좋은 소식을, '우리 진짜 맥주한잔 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며 함께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긁었다. 그는 이 기쁨을, 이 만족을, 이 성취감을 다른 이와 함께 '우리의 미래'라며 이야기할 것이다. 축하할 것이다. 함께, 같이 기뻐할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이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성취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아니다.

남의 집 일이다.

남의 일이다.

내 알바 아니다.

그냥 남의 일이다.





간신히 눌러담았던, 그의 모습들이 약해진 마음 틈새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어디니?'

'점심은 누구랑 먹니?'

'회의는 잘 끝났니?'

"너 잘못 아니야, 울지마.'

'집에 갔니? 얼른 자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떠오른다.

마치 이번 생의 남자라고는 그가 전부였던것처럼, 갑자기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자꾸 자꾸 비집고 뛰쳐나온다.


이제 정말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인지,

이렇게 축하할 일에, 내가 낄 곳이 없다는 현실 때문인지,

그는 그렇게, 영원히 죽지 않는 에드워드처럼 살아나, 온 밤을 헤집어 놓을 것 같다.



차라리 외국으로 도망갈까보다.

거리와 시간이 무색할만큼 무지하게 아주 많이 생각날까.

영원히 이렇게 아쉽고 억울하게 그를 혼자 삭여내다보면, 눈 녹듯 사라져 형체도 기억이 안나는 순간이 오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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