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되어버린 사랑의 기억
기억을 먹고 산다.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랑이 남긴 기억의 유통기한이 어디까지 가는지 늘 궁금했다. 나는 꽤나 오래도록 놓지 못하는 축이나, 쉽게 쉽게 '연애를 쉬지 않는'능력자들은 달라 보여서.
늘 '아는 오빠'많은 친구가 나를 걱정했다.
"집착하는 것 같아. 좋았던 기억만 과대포장해서."
"그치? 서운한 것도 많은데 그것만 집착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같이 보낸 시간이 엉망 같잖아."
"실제 엉망이었을걸? 너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애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을까? 너가 콩깍지로 너무 좋게 봐준거야."
"우상숭배같은 건가. 내가 그냥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타령하는 것과 비슷한가."
"딱 그거네."
딱 그렇다고 했다.
나는 몇 가지 소중한 기억을 모시고 모시는 과정에서 그만, 그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가 한 작은 이벤트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포장된 채 내 머릿속에서 기가막힌 이미지로 남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성경의 한 구절, 복음의 한 구절이 되어, 오래도록 곱씹고 연구되어 내게만 대단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다시 나를 돌아보고, 책망할 타이밍이었다.
그게 뭐라고 금과옥조로 삼아 다칠새라 변할새라 아끼고 아껴 모셔두는가. 그 몇 안되고 성의없었던, 이른바 '좋은 기억'들 따위를.
나는 항상 그래왔던가.
스쳐가는 사랑의 기억들, 그들은 내게 좋았고, 나빴다. 하지만, 내 가슴에 남은 것은 좋았던 기억들이다. 분명히 나쁘고 독하게 헤어졌기에, 그들이 내 옆에 누워 곤한 잠을 청하는 게 아닌데 말이지.
그러고보니, 나는 전쟁영화 같은 것을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던 것 같다.
'저 여자는 저 남자를 어떻게 기다릴까.'
잠깐의 사랑, 좋았던 시간, 이기적인 이별, 그리고 방치되어 혼자 남은 여자.
대게는 돌아온다는 (빈)말을 남긴 남자주인공을 믿고, 제대로 된 이별 통보 없이 무방비하게 남겨지고, 무자비하게 오랜 시간 독박 기다림을 맞이하는 스토리들인데, 남의 얘기라 그런지, 항상 그 기다림을 말리고 싶고, 안쓰러웠다. 가령, '미스 사이공'에서 미국의 본처가 나타나는 씬을 본 순간, 나는 제일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너무 억울해서. 그러니까, 그러하므로, 무 자르듯 똑 뿌러지게 끝을 내 주는 게 필요하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처지에는 우스운 열변에 불과하지만.
"남자는 남자로 잊어야지. 같이 보낸 시간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무엇을 위한 큰 그림이냐고..."
"그치."
남자는 남자로 잊는다는 말은 너무 멋있어서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내게는 실용적인 방법 같진 않지만.
친구는 조금 더 조언했다.
"좋은 기억이라고 포장하고 예쁘게 기억해주면 너만 상처받아. 사실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해줬고, 자기 편할 때, 자기가 땡길 때, 너 이용한거야."
"그, 그렇게까지 나쁜가."
"너의 기억속에 너무 좋게 그를 포장하고 애틋해할 필요 없어. 그 신앙은 사이비야."
눈물이 흘렀다. 사이비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맞는 말이고 부인하고 싶은 말이고 받아들여야할 말이고 수긍하기 아픈 말이었다.
"난 어떻게..."
"그 기억을 지우려면, 그사람이 쓰레기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해. 너를 갖고 논 거야. 그 기억은 아름다울 수가 없어."
"엉엉엉."
"술 먹고 전화오면 받아. 그리고 만나. 그리고 그 이기적인 모습을 반드시 기억해. 그러면 그 신격화된 모습도 누그러들거야. 그러다보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이성을 찾겠지. 그 때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쓰레기통에 버려."
"쓰레기통"
"응, 가지고 있지마. 너의 기억은 쓰레기야. 곧 쓰레기통에 버릴 일이야. 그래야,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어."
"엉엉엉."
나는 그 날 이후 오래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그의 전화가 무서워 전화기도 바꿨다. 친구는 내가 그의 진가를 마주보기 무서워서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다시 보면 다시 만나고 싶을 것 같다. 나는 아주 대단한 신도인것 같다. 기억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의 기억은 영원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그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다.
나는 그저, 그를 쓰레기통에 버리기 싫은데,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없을까.